"나는 정치보복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정치보복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김대중은 1998년 4월 속칭 '국정원 대량숙청사건'을 일으켰다. 엄연한 정치보복이었다.
김대중의 어록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후 한 번도 거짓말을 해본 적은 없다. 다만 약속은 안 지킨 일은 있다."
김대중이 정권을 잡았을 때 가장 먼저 손을 본 것은 국정원이었다.
대한민국 종북좌익의 원조이자 거두였던 김대중으로서는 국정원과 악연이 깊었다.
김대중은 일본에서 반국가 활동을 하다가 국정원에 의해 국내로 납치된 적이 있었고,
김대중은 국정원으로부터 암살 위협을 받고 있다는 공갈을 전가의 보도처럼 선거에 이용하곤 했었다.
1998년 4월 1일, 국정원 직원들은 만우절 같은 소식을 들어야 했다. 재택근무를 하라는 명령이었다.
구조조정 명분으로 한 순간에 책상이 없어진 직원은 무려 581명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대공활동의 전문정보 수사요원들이었고, 이들의 70%가 영남 출신들이었다.
앞에서는 정치보복은 없다는 미소를 흘리고 뒤에서는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국정원의 '피의 숙청'이었다.
‘국가정보원을 사랑하는 모임’의 대표이자 ‘국가안보기능회복추진위원회’ 상임대표인 송영인은
숙청된 직원들의 기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김대중을 싫어하는 사람,
둘째, 이회창을 지지한 사람,
셋째, 한나라당의 고위당직자와 친분이 있는 사람 순이었다.
'국정원 대량숙청사건'에서의 도살자는 김대중의 심복이었던 이종찬 국정원장과 이강래 기조실장이었다.
김대중이 보수우파로부터 종북이라는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김대중은 국정원만을 숙청한 것이 아니라 아예 대한민국의 대공 활동 전체를 무력화 시켰다.
공안기관 대공경찰 2500명의 자리가 없어졌고, 기무사 요원 600여명, 공안검사 40%가 자리를 잃었다.
반국가 활동의 전력이 있던 김대중으로서는 이들을 그냥 두는 것은 뒤통수가 근질거릴 일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쫓겨난 자리에는 민변출신의 변호사와 호남출신의 좌경화 인사들이
무시험 특채로 국정원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대공 업무에 대한 자질이나 간첩 잡는 교육은 무시되었다.
노무현 정권 당시 '김대중의 숨겨진 딸'에 대한 시사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는데,
당시 김대중의 숨겨놓은 딸을 유치원으로 데려가는 임무를 맡았던 사람들이 국정원 직원이었다,
대통령의 숨겨진 딸을 유치원으로 데려가는 일이나 하던 정보원들이 무슨 수로 간첩을 잡을 것인가
김대중, 노무현 정권 당시에는 간첩 수준의 인간들이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던 탓도 있지만
간첩을 잡았다는 뉴스가 거의 없었다.
간첩이 잡히기보다는 비밀 정보업무를 하던 정보원이 민간인에게 들켰다는 뉴스가 더 많았다.
좌익정권의 국정원은 미션임파셔블의 탐 크루즈와는 거리가 멀고 일반 절도범 수준이었다.
김정일이가 황천길에 올라도 국정원이 모를 수밖에 없던 이유는 순전히 국정원의 손발이 묶여있기 때문이었다.
기술자들이 대거 잘리면서 대공정보 수집능력은 탐문 수사나 하는 파출소 순경 수준이 되어버린 것은,
이런 대공기관 무력화의 원인은 순전히 김대중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휴민트 사건이 있다.
휴민트는 고도로 훈련된 스파이로 적의 수뇌부에 잠입하는 임무를 하는데
대북 정보망을 파악하고 적을 교란하기 위해 투입되는 북파공작원들이 그들이다.
김대중 정권때 고의적으로 대북 정보망을 지닌 인사들과 요원들의 신분을 공개해
사실상 대북 정보망을 아예 차단시켰는데
이것은 즉 북파 공작원들은 김대중 정권 당시 북한에서 고문받다 사살되었다는것을 의미한다.
김정일 사망소식을 한참 지나서야 안 이유도 이 휴민트 요원들이 숙청되어서이다.
더 어처구니 없는건 김대중이 김정일에게 직접 휴민트 요원 250명의 명단을 넘겨주었고,
남한에 있는 북한 간첩에 대해 받은 자료가 전혀 없다.
1. 대남비서 김용순(김정일 최측근) 사고사로 위장 암살
2. 북한 농업상 서관히(북한내각 실권자) 남조선 간첩 혐의로 공개 총살
3. 장군 임태영 상장(북한군 지도 총국장) 남조선 간첩 혐의로 총살
4. 장군 우명훈 중장(북한군 총참모부 국강) 남조선 간첩 혐의로 총살
5. 장군 이상일 소장(북한국 64 저격 여단장) 남조선 간첩 혐의로 총살
6. 그밖의 인사들 다수 (북한군, 북한 내각내)
2010년 이후 황장엽의 증언으로
김용순 대남비서는 김정일의 최측근으로 황장엽 뜻을 같이한 동지로 밝혀졌고
서관히 농업상 같은 경우 김일성 빨치산 동지로서 황장엽과 뜻을 같이해서
황장엽의 아들 황경모와 함께 김정일 암살계획을 세우게 됨
실제 서관히는 한국 간첩으로 발각 공개총살에 처해졌음
북한군 장성들 같은 경우
한국의 대표적 휴민트로 활동 하였음
지난 1968년 1.21사태때 이들 휴민트 공작에 들어가
기나긴 오랜시절동안 북한내 휴민트를 육성해왔고
임태영, 우명훈, 이상일 또한 북한군부내에서 휴민트로 활동했음
하지만 1998년 2월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이후
휴민트 기사내용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353&aid=0000007929
박정희 대통령 시절 1.21 사태 당시,
청와대로 향하던 북괴 공비 30명 중 29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하였다고 발표했는데, 사실은 1명이 아니라 3명이었다.
그 중 한 명이 김신조 목사고 나머지 한 명은 고문받다가 사망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이 전향해서 북괴로 다시 돌아감
훗날 북한의 상좌까지 오른 인물
이렇듯 우리의 휴민트는 박통 시절부터 수십년간 각고의 노력으로 만들어 놓은 것
한 명의 휴민트를 만드는데에만 수십억이 들어간다고 한다.
그걸 한 순간에 와해시킨게 바로 김대중
휴민트 와해 이전과 이후의 사건 팩트
[휴민트 와해 이전]
1. 김일성 사망 => 우리나라 안기부가 세계 최초로 알았음 (북한의 우리측 휴민트에서 알려줌)
[김대중 집권 휴민트 와해 후]
2. 김정일 사망 => 미국 정보부와 일본 정보부가 우리나라 국정원 보다 먼저 알고 우리에게 알려줌
[현재]
대북 휴민트 재건중...
다행인건, 탈북자도 많아지고, 북괴 경제사정이 좋지 않고,
게다가 김정은이 성격이 변덕스러워서 고위급 포섭이 상대적으로 쉽다고 한다.
그래서 상당히 빠르게 재건되고 있다고 함
요약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자마자
(1) 1998년 4월부터 국내에서는 국정원, 기무사, 검찰 공안과 등에서
간첩잡는 정예 요원들이 대거 해고되고 시작했고
(98년 4월부터 98년 12월까지 국정원 직원 900여명, 대공 경찰 2500명,
기무사 정보요원 600명, 공안 검사 40명을 해고하는 등 대공요원 3000명 해고)
(2) 같은 시기 북한에서는 1998년 10월 임태영 등
우리가 북한에 심어놓은 250명 이상의 휴민트(대북 정보원)가 일거에 잡혀 총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