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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붉은 달의 여제 - 0
게시물ID : readers_601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대못
추천 : 0
조회수 : 22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1/18 17:54:01

 붉은 달의 여제

 Opening - 귀족의 딸은 아무것도 될 수 없다.

 

 

 

----------

 

 1.

 

 

 정원에 놓여있는 새하얀 대리석 조각들. 그 아래의 갖가지 빛깔의 봄꽃들과 연한 녹색의 새싹들. 그 위에 날아다니는 나비까지. 모두가 햇볕을 받아 더 밝게 빛나는 오후였다.

 

 인간의 손이 닿은 곳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이 싱그러운 빛을 여과 없이 전하고 있는 정원. 그 가운데에는 그 광경에 더없이 어울리는 한 사람이 발을 사뿐히 내딛고 있었다.

 

 상아빛의 드레스. 그리고 그 위의 챙이 넓은 모자와 화려하게 치장 된 양산. 어느 나라의 귀부인이라도 되는 듯, 꽤나 거추장스러운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그 것이 불편해 보이기는커녕 보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우아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그런 여자였다.

 

 그녀의 좌우에 있는 시녀는 그녀의 신분 자체도 꽤나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곳은 대륙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델슈타포 학교'. 대륙 안의 어느 나라든지 신분이 높고 금전적 여유가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니는 학교였다.

 당연히 신분이 높으신 분들이 이 학교를 찾는 것은 꽤 빈번한 일. 학생 그 누구도 귀부인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귀부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정원이 끝나는 곳, 약간은 커다란 문이 달려있는 곳이었다. 양 옆에는 위풍당당한 모습의 병사들이 서 있었다.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무슨 용건이십니까?"

 

 위협적이지는 않게, 병사들이 문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귀부인은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 옆에 서 있던 시녀가 앞으로 나섰다.

 

 "이 분께서는 제국 스마그너스의 백작, 라이런 모디안드 님의 부인되시는 헤이스 모디안드님 이십니다. 하이거 선생님의 면담요청이 있어서 몸소 행차하셨으니, 통행을 허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랑또랑한 하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병사는 흘깃흘깃 모디안드 공작부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잘못하면 불경죄로 호되게 혼이 날지도 모르는 행동이었지만, 백작부인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눈매를 살짝 굽혔을 뿐이었다.

 

 "지나가십시오."

 

 병사들은 군말 없이 바로 문을 열었다. 또각또각. 경쾌한 구두 굽 소리가 문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모디안드 부인. 꽤 오래간만이군요."

 

 문을 한두 개 더 거쳐서야 들어온 하이거의 서재는 지저분하면서도 뭔가 규칙적으로 쌓여있는 듯 한 느낌이었다. 전형적인 학자의 방. 어지럽게 흩어진 책과 서류들은 약간은 시큼한 종이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하이거 선생은 그 가운데에 서있었다.

 

 "오랜만이군요. 하이거 선생님."

 

 손짓으로 조용히 시녀들을 물리고, 백작부인은 하이거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백발에 안대. 약간은 주름진 얼굴. 백작부인이 기억하던 얼굴과 같았다.

 "선생님은 하나도 안변하셨군요. 여전하셔요."


 "하하. 부인께서도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아, 그보다 좀 누추하겠지만 앉으시죠. 먼 길 오시느라 지치셨을 텐데."


 "감사합니다. 그럼……."
 
 하이거는 백작부인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그나마 물건을 치워둔 책상 위에서 미리 끓여두었던 차를 잔에 따랐다. 백작부인은 아무 말 없이 너저분한 책상 위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지저분하지요?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나아진 편입니다. 전쟁 때엔 이 정도 두 배 이상의 서류가 쌓였었지요."


 "아뇨, 별로요. 확실히 지휘관의 방 같은 느낌보다 학자 같은 분위기가 많이 나는걸요."

 

 주거니 받거니.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하이거 선생은 차를 한 잔씩 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차 한 모금으로 입술을 축이고, 하이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바쁘신데 굳이 직접 행차하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학생의 사적인 일은 대리인한테 맡길 일이 아니라서……."


 "뭐 개인적인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요. 헌데……. 뭐 때문이죠?"


 "큰일은 아니고, 학생 진로에 대해 상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깐 모셨습니다. 이걸 좀 봐주시죠."

 

 하이거는 서류더미 속에서 서류 한 장을 요령 있게 꺼내어 백작부인에게 내밀었다. 백작부인도 유심히 그 종이를 쳐다보았다.

 

 "이건……."


 "부인의 따님, 아슬릿 모디안드의 인적사항입니다."

 

 백작부인은 눈을 굴려서 그 인적사항을 훑어내듯 읽었다. 아직 서류에 눈을 둔 채, 백작부인이 중얼거렸다.

 

 "꽤나 복잡하군요.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데요. 아슬릿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아,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참고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 부분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백작부인의 질문에 하이거 선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재빠르게 서류의 한 곳을 짚어주었다.

 

 "이 곳, 선택 수업 란입니다."

 

 백작부인의 눈은 자연스럽게 그 손가락을 따라갔다. 그 눈이 멈춘 곳에는 순서대로 '기마술, 병사학, 전쟁학'이 쓰여 있다. 하이거는 손을 자연스럽게 무릎 위로 올리고 말을 이었다.

 

 "지난 날, 저는 여러 학생들을 봐 왔습니다. 그 학생들은 거의 제각각이었지요. 머리가 짧은 녀석도, 키가 큰 녀석도, 소심한 녀석도. 하지만 하나, 그 녀석들이 유일하게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하이거는 백작부인의 눈을 쳐다보면서,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달칵. 잠시간의 정적에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다시 하이거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전부 남학생들이었지요. 다 자기 멋대로 생기고, 출신지도 제각각이었지만 어쨌든 그거 하나만은 같았다 이 말입니다."
 
 하이거는 거기까지 말하고 백작부인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하이거의 의도가 전해지지 않은 것인지, 백작부인은 조금도 당황 하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우리 아슬릿이 동기생 중엔 혼자 여학생이다……. 이 말씀이신지?"


 "동기생 뿐 아닙니다. 전쟁학 학과가 개설 된 때부터 지금까지를 통틀어 처음이지요. 아시다시피, 전쟁학 이라는 학문 자체가 여자한테는……. 죄송합니다. 여자라고 차별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다지 필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특별히 흥미를 끄는 과목도 아니고……."

 

 하이거 선생은 또 목이 타는지, 찻잔을 입술에 가져갔다가 떼어냈다. 

 

 "사실, 그 남학생들 대부분이 기사를 꿈꾸는 녀석들이나 전쟁 지휘관의 자제들이지요. 군인이 되려면 무조건 이수해야하는 과목이니 싫어도 억지로라도 들을 수밖에요. 이렇게 남학생들조차 꺼리는 그런 과목인데 아슬릿은……. 즐기는 겁니다. 그 '학문'을."

 

 하이거 선생은 마지막 말과 동시에 '성적'란을 가리켰다. 전체 수석. 기마술과 병사학은 수석까지는 아니었지만, 꽤 높은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백작부인은 과목들을 번갈아가면서 쳐다보다가 그제야 뭔가를 떠올린 듯, 처음으로 표정의 변화를 보였다.

 

 "그, 그건 그냥 아슬릿이 좋아하는 걸 하는 것뿐인걸요. 성적이 좋게 나오면 그것도 좋은……."


 "부인. 모르시겠습니까? 아니면 모르는 척 하시는 겁니까?"

 

 약간 당황한 듯 해 보이는 표정의 백작부인의 말을 하이거가 단호히 잘랐다. 그는 그보다 더 단호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아슬릿은……. 직업 군인을 목표로 하는 학생의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여자의 몸으로, 게다가 그걸 자발적으로, 매우 흥미를 느끼며 하고 있지요. 결과가 어떻게 될 지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눈을 피하는 백작부인의 얼굴을 응시하며, 하이거선생은 백작부인의 무언가를 끊어내려는 목소리로 한 마디 한 마디, 목소리들을 늘어놓았다.

 

 "우리는 꽃을 꺾게 될 겁니다. 막 피어나려는 꽃을 말이죠.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그 꽃을 화병에 꽃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모디안드 백작부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하이거 선생은 그런 부인을 보던 눈을 감고, 찻잔을 다시 기계처럼 들어올렸다.

 

 "귀족의 딸은, 아무것도 될 수 없으니까요."

 

 햇살이 창가를 통해 서재 안을 비추었다. 여전히 봄볕은 따뜻했지만 그 햇살을 받으면서도 모디안드 백작부인은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귀족 사회에서의 여성은 그저 여성일 뿐.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백작부인은 하이거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귀족의 딸은, 백작부인 그 자신의 딸은 자신의 지식을 아무 곳에서도 쓸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할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백작부인은 처음으로 찻잔을 집어 들었다. 맛을 느끼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입술에 가져간 차는 이미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러나 백작부인은 말없이 그 맛없는 차를 홀짝거리는 것 밖에는 아무 행동도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자신의 딸을 생각하며, 그 딸에게 해야 할 말을 생각하며…….


2.

 

 

- 두두두 두두두!


 "하앗! 하앗!"

 

 거친 말발굽소리가 한동안 평화로웠던 숲 속의 적막을 사정없이 헤집었다. 길이라고 있는 곳은 부러진 나무의 그루터기나 부러진 가지 등등이 아무렇게나 널려있어서 말이 다니기에는 조금 거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두 필의 말과 그 기수들은 요령 있게 숲속을 헤쳐 나갔다.

 

 "아스! 너무 멀리 온 것 같지 않아?"


 "오늘은 내가 가는 데로만 와! 이럇!"


 - 투두두두두 투두두두!

 

 두 말의 기수들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금빛에 가까운 노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아이와 장밋빛에 가까운 붉은 머리카락을 묶어서 올린 여자아이. 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소녀들 치고는, 아니 그걸 생각하지 않더라도 수준급의 기마실력이었다.

 

 얼마쯤 달렸을까, 소녀들 앞에 거대한 나무가 쓰러져있었다. 금발의 여자아이는 그걸 알아보고는 앞의 여자아이에게 크게 소리쳤다.

 

 "아스! 앞에!"


 - 푸히히히힝!

 

 하지만 그 말을 못 들은 것인지, 붉은 머리의 여자아이는 말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스!"

 

 금발머리의 소녀는 자신의 말을 멈추면서 붉은 머리의 여자아이에게 다급히 소리쳤다. 붉은 머리의 소녀가 탄 말은 이제 멈추려 해도 쓰러진 나무까지 남은 거리로는 절대 멈출 수 없을 정도. 이대로라면 붉은 머리의 여자아이는 낙마해서 큰 화를 입을 지도 모를 것이었다.

 

 바로 그 때.

 

 "뛰어올라! 베어헤드!"


 "푸히히힝!"

 

 소녀의 비명 같은 외침에 말 또한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

 

 - 타앗!


 "꺄아아앗!"

 

 금발 머리의 소녀의 비명이 울렸다. 하지만 그 것은 결코 공포나 걱정 따위의 감정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붉은 머리의 소녀가 탄 말이, 힘차게 도약해서 그 나무를 뛰어넘은 것이었다.

 

 "후앗!"

 

 붉은 머리의 소녀는 말이 내려섬과 동시에 가볍게 탄성을 토해내었다. 말을 도약시키는 것은 말의 신체능력 자체도 중요하지만 기수의 능력 또한 중요한 것. 붉은 머리의 여자아이는 보기와는 다르게 꽤 숙련된 기수인 것 같았다.

 

 "로나! 나 먼저 간다! 이 길로 쭉 오면 돼!"


 "자, 잠깐만 아스! 난 어쩌고?"


 "나 어디 안가니까, 빨리 와! 하앗!"

 

 붉은 머리의 소녀는 잠시 다른 여자아이에게 무어라 중얼대는가 싶더니, 이내 반대쪽으로 말머리를 돌려서 그대로 말을 몰아갔다.

 

 "너무 해엣-!"

 

 카랑카랑한 여자아이의 외침이 다시 한 번 숲속의 모든 생명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붉은 머리의 여자아이는 말을 능숙하게 몰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너무해! 너무해에에에에!"


 "으왓! 로나, 아파! 아프다고!"

 

 어느 새 숲을 벗어나서 서로를 만난 둘. 금발의 소녀는 계속해서 화를 내면서 붉은 머리의 여자아이를 때렸다. 그런 소녀에게 연신 사과하는 붉은 머리의 여자아이는 계속 아프다고 말은 하지만 별로 아파보이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뭐가 좋은지 실실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이 상황 자체를 즐기는 것 일지도 몰랐다.

 

 "진짜 너무해도 진~짜 너무해! 나 말 못 탄다고 무시하는 거지? 응?"


 "그런 거 아니라니까? 자자, 그래도 널 믿었으니까 이런 험한 데까지 오라하지. 그만 때리고 저기 보라니까?  저기 에가로트 성의 모습이 다 보여!"

 

 그녀들이 말을 세우고 서 있는 곳은 경사가 꽤 져있는 벼랑이었다. 아주 깎아내린 곳은 아니지만, 안전하게 내려가려면 군데군데 자라있는 나무들을 붙잡고 가야 할 정도? 어쨌든 간에 무방비로 떨어지면 크게 다칠 만 한 그런 곳이었다. 그런 절벽에서 약간은 두려워하면서도, 금발의 소녀는 눈을 풍경에서 떼지 못했다.

 

 "으, 으응. 멋지긴 하네. 이런 곳은 언제 찾은 거야?"


 "아니 뭐, 저번에 시험 끝나고 바람 쐴 때. 점프 연습도 하다가 우연히 발견했어."


 "하여튼……. 위험한 짓은 선수라니까……."

 

 어느새 화가 났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듯, 듯 넋 놓고 에가로트 성의 전경을 보는 금발의 소녀. 적발의 소녀는 그 모습을 보더니 피식, 웃고는 시선을 에가로트 성에 보냈다.

 

 "아스."


 "응?"

 

 나지막이, 금발의 소녀가 다른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적발의 소녀는 그 말을 듣고 다시 노란 머리의 소녀를 쳐다보았다. 금발의 소녀는 햇볕과 바람에게 머리카락을 맡긴 채, 푸른 눈동자로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넌 스마그너스에서 왔지?"


 "응. 그렇지."


 "거긴, 어때? 여기랑 많이 틀려?"


 "뭐……. 항상 말했잖아.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다고."

 

 붉은 머리의 소녀는 금발의 소녀의 말을 듣고, 애써 무신경한 척, 이야기했다. 항상 금발의 소녀가 하던 말. 그녀가 하는 다음 말은 붉은 머리의 소녀도 아는 말일 것이었다.

 

 "난……. 플레파에서 태어나서 플레파에서 자랐어. 내가 휴토르 가(家)에서 가장 많이 벗어난 곳이라 해 봐야 여기, 에가로트 성 정도라고."


 "……."


 "난……. 보고 싶어. 이 세상을."

 

 알고 있는 말이었기에, 알 수 있는 반응이었다. 금발의 소녀는 붉은 머리의 소녀 앞에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늘 하던 말, 늘 하던 표정. 다시 태엽인형처럼, 금발의 소녀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힘들겠지?"


 "그런 말 안 해도 되잖아."


 "난 여기서 결혼하고 또 거기에 머물겠지? 사교계에서 만나던 사람을 또 만나고 늘 똑같은 환경에 적응하겠지?"
 
 늘 이랬다. 늘 하는 대화였다. 우물 안을 벗어나려는 개구리처럼 노란머리의 소녀는 발버둥치려 했다. 하지만 주변의 반응은 냉담했다. 늘 그렇게 살아가는 줄 알던 사람들은 늘 그렇게만 살아갈 뿐이었다.

 

 "로이나 휴토르씨."

 

 그런 친구를, 붉은 머리의 소녀는 돕고 싶었다. 승마를 가르치고 넓은 곳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건 작은 것 일뿐. 노란머리의 소녀, 로이나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 때마다 붉은 머리의 소녀는 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당신을 모디안드가에 초대하겠습니다. 언제 스마그너스에 한 번 들르시지요? 모디안드 가의 영애, 아슬릿 모디안드의 이름을 걸고, 정식으로 당신을 초대하도록 하겠습니다."


 "후훗. 또 그 말이구나?"

 

 과장된 몸짓과 과장된 말투. 늘 같은 말에 같은 행동이었다. 이쯤이면 질릴 만도 하지만 이걸로도 로이나는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아직까진 그걸로 만족했다. 그 때문에 붉은 머리의 소녀, 아슬릿은 말 뿐일지 모르는 초대를 몇 번이고 남발했다.

 

 "하아. 백 번 넘게 초대했으니까 백 번 넘게 와야 돼. 알겠어?"

 

 능청스럽게 한숨을 쉬는 아슬릿. 로이나는 그 한숨에 오히려 함박웃음을 지었다.

 

 "알았어! 꼭 갈게 아스!"

 

 그렇게 두 태엽인형이 벼랑 위에 서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밖에 움직이지 못하는 똑같은 인형들이기에, 거짓 약속을 할 수 밖에 없는 자신들을 알기에 서로의 마음을 더 잘 알 수 있는 것일지도 몰랐었다. 그 둘은.


3.

 

 

 학교, 델슈타포는 크게 나누자면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 번째는 강의실. 두 번째는 교무실. 세 번째는 기숙사.

 

 그 세 부분 중 외부인의 왕래가 가장 잦은 곳은 기숙사 쪽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방학 때의 얘기. 학기 중에 있는 학생에게는 별로 볼 일이 없는 탓에, 유동 인구 자체는 별로 많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커다란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짐은 다 쌌습니다. 부인."


 "알겠습니다. 아슬릿이 오면 바로 출발 할 테니, 준비하고 있으세요."


 "예."

 

 호위 무사처럼 보이는 사람이 마차 옆에 서 있던 귀부인의 말을 듣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물러갔다. 그 귀부인, 헤이스 모디안드는 호위 무사를 물리고, 마차 옆에서 무언가 복잡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군요. 아이에게 충격이 가는 건 아닐지……."

 

 옆에 서 있던 다른 사람, 하이거 선생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헤이스 부인은 그런 하이거의 말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충격이 가도, 지금 싹을 뽑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요. 나중에 가면…….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돌이킬 수 없게 될지 모르니……."

 

 헤이스 부인은 망설임은 없었지만 여전히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이거는 무어라 더 말을 하려고 하는지, 입을 열었다가 그냥 고개를 떨구어버렸다.

 

 - 투두두두! 두두두두!

 

 그 때,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던 하이거도, 헤이스 부인도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천천히 다가오는 두 실루엣은 말 위에 탄 소녀들. 서서히 보이는 얼굴은 그들이 기다리던 얼굴, 아슬릿 모디안드였다.

 

 "어, 어머니?"

 

 붉은 머리의 소녀, 아슬릿은 꽤나 놀란 듯 했다. 놀란 것은 로이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아슬릿에 비하면 그렇게 많이 놀란 것도 아니었다.

 

 "오랜만이구나. 아슬릿."


 "아, 아니 그게……. 그러네요……. 아, 하이거 선생님도 안녕하셨어요?"


 "그, 그래."

 

 아슬릿은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지만 이내 하이거가 있다는 걸 눈치 채고는 급히 마음을 추슬렀다. 하이거는 그런 아슬릿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그런 하이거의 얼굴을 보고, 아슬릿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저, 하이거 선생님? 무슨 일 있으세요?"


 "아슬릿, 난 아무 일도 없다. 그, 그래! 나보다는 네가……. 아니지, 지금 이럴 때가 아니란다!"


 "예? 오늘은 수업 없는 날인데요? 무슨 일이라도……."

 

 하이거는 눈에 띄게 뻣뻣한 모습으로 아슬릿에게 말을 꺼내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지금, 그 태도를 눈치 채지는 못한 것 같았다. 하이거가 다른 말을 꺼내기 전, 잽싸게 모디안드 부인이 말을 했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다. 아슬릿."


 "……. 예?"

 

 네 사람 중 놀라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둘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사실에, 하나는 모디안드 부인의 연기력 때문이었다. 아슬릿은 말에서 급히 내려오며 헤이스 부인에게 다가갔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니?"


 "말 그대로란다. 아버지께서 편찮으셔. 그래서 이렇게 서둘러서 학교로 온 거란다."


 "그, 그래. 아슬릿. 학교보다는 집이 우선 아니겠니? 빨리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슬릿의 급한 말투와는 다르게 헤이스 부인은 천천히 그 말에 대답했다. 하이거 선생은 여전히 부자연스러운 말투로 급히 동조했다. 아슬릿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 그런……. 어떻게 하면 좋지……."
 
  발을 동동 구르는 아슬릿. 그런 아슬릿을 보고 헤이스 부인은 여전히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짐은 다 싸 놓았으니 지금 바로 스마그너스로 돌아가자꾸나. 학교일은 하이거 선생님께 다 말씀드려두었단다."


 "잠깐만요! 짐은……. 제 물건 전부잖아요? 아버지가 나으시면 돌아올 건데?"

 

 아슬릿은 '짐'이라는 말에 마차에 실려 있는 짐을 보고는, 자신의 자질구레한 생필품까지 전부 실려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물었지만, 헤이스 부인은 역시나 조용조용히 대답했다.

 

 "아버지 병이 꽤 오래 갈 것 같아서 그런단다. 짐은 올 때 다시 가져오면 되잖니?"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사실 때문인지 아니면 학교를 떠난다는 사실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아슬릿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 어서 가자꾸나."

 

 그런 아슬릿의 손을 당기며, 헤이스 부인은 마차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미련을 가지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급하게.

 

 "자, 잠깐만요!"

 

 아슬릿은 그런 부인에게 약하게 저항했다. 부인은 그제야 자기가 너무 급하게 굴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아슬릿을 놓아주었다.

 

 아슬릿은 아직까지 말에 타고 있는 로이나에게 다가갔다. 로이나는 친구에게 닥친 충격적인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몰랐다.

 

 "아슬릿? 그게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말을 해야……."


 "아니야. 무슨 말 할지 알아. 그러니까. 고마워."

 

 아슬릿은 아직 말이 서툰 친구에게 약하게 웃음을 지었다. 왠지 복잡해 보이는 그런 웃음이었다.

 

 "또 봐."


 "어, 어? 그, 그래……."

 

 그리고는 두 음절의 소리만을 남겨 둔 채, 아슬릿은 뒤돌아섰다. 그리고 마차에 올랐다. 아슬릿의 말도 마차에 묶였지만, 아슬릿은 알지 못했다. 그 뒤에 하이거 선생과 어머니가 무어라 말 한 것 같았지만 아슬릿은 듣지 못했다. 이윽고 마차의 문이 닫혔다. 그 것마저 아슬릿은 몰랐다.

 

 "출발하세요."

 

 헤이스 부인의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그때야 아슬릿은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

 

 "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볼을 따라, 주르륵.

 

 '왜 이러지? 이건 작별이 아니잖아. 금방 다시 볼 건데 왜 이러지? 그쳐야 돼.'

 

 속으로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아슬릿은 참았던 눈물을 더 흘렸다. 자기가 우는 이유를 모르며 아슬릿은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가 위독해서 흘린 눈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이유는 몰랐지만, 아슬릿은 그 눈물을 왠지 친구에게만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왜 그런지도 이유는 몰랐다.

 

 그냥, 아슬릿은 눈물을 흘렸다. 어쩌면 열다섯 살 소녀의 눈물은 원래 이유가 없고,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한 봄날의 기억은, 눈물로써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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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 연재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아무래도 네이버쪽은 너무 빨리 묻히고.... 반응은 기대 못해도 두 곳에다 연재하면 읽어 주시는 분들이 조금이라도 늘겠지요.

 

많은 사람이 봐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링크는...... 올릴까요 말까요.... 하하, 일단은 안올립니다.

(나중에 혼자 열폭해서 추천구걸할지도 몰라요.... 따끔하게 혼내주시길)

 

그리고.... 제가 읽기에도 왠지 문장이 매끄럽지가 않은데, 고칠 방법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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