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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Be] 나비
게시물ID : humorbest_6052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be(º∇º)
추천 : 15
조회수 : 1547회
댓글수 : 4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4/09/19 22:34:26
원본글 작성시간 : 2004/09/09 01:56:17
유난히도 하늘이 맑던 날이었다.
쓸데없는 소리로 시간을 잡아먹고 있는 강사의 존재는 무시한 채
나는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팔랑 팔랑-.

나비 한 마리가 때 늦은 나들이를 나온 모양이다.
녀석도 나처럼 가을 하늘을 즐기고 싶었던 것일까.

주욱 나비의 움직임에 시선을 꽂고 있다가 가방을 챙겨 강의실을 나와버렸다.
순간 모여드는 흥미로운 눈길들과 강사의 불쾌해하는 표정 따위는 이미 안중에 없었다.
그의 주절거림은 얼마든지 무시해줄 수 있었지만,
갑자기 사방을 가로막고 있는 벽면이 숨통을 조여오는 느낌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건물을 나와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
붉은 벽돌을 배경으로 흰 점 하나가 이리저리 나풀거리고 있다.
그 나비인가보다.

잔디밭에 가방을 던지고 누웠다.
한국 특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가을 하늘은 한숨이 절로 나올만큼 새파랬다.
구름 한점도 없이.
그래서 눈물이 날 만큼.

누워서 보는 하늘은 넓다.
서서 보는 하늘은 반쪽이지만, 누워서 보는 하늘은 온전하다.

녀석은 이런 날씨를 매우 싫어했다.

「난 비오는 날이 좋아.」

난 비오는 날이 싫다.
그리고 너무 맑은 날도 싫다.
그저 적당히 구름이 끼고 적당히 바람이 부는 날이 좋은데..
사촌언니는 이런 나를 가리켜 ‘변태’라고 칭했다.

바스락.

머리 위쪽에서 소리가 났지만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한번의 바스락거림을 끝으로 더 이상의 소리는 없었다.
바람이었나보다.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꺼내 물었다.
싸구려 라이터의 찰칵거림과 함께 불이 붙었다.
멋모르던 시절 그저 알싸하다고만 표현했던 연기가
나의 몸 깊은 곳으로 들어가 혈관을 타고 흐른다.
바보같았다.
맨솔이 아니라면 알싸한 맛은 없는데.

「어, 이거 내가 피는거네?」

Time Menthol.
녀석이 피던 담배였다.
나중에 Season으로 바꾸긴 했지만.

눈을 감았는데도 햇빛은 나의 얇은 눈꺼풀을 통과한다.
그리고 망막에 잠시 머물렀다가 그리 크지 않은 뇌에 각인된다.

계속해서 망막을 스쳐지나던 빛들이 조금씩 모양을 변화시킨다.
마치 우주속을 탐험하는 느낌이 드는 일은 종종 있었으므로
조금쯤은 즐기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빛들은 어느샌가 녀석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충격을 받을 법도 한데.
나는 이상하리만치 잠잠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관망하는 듯한 태도랄까.

녀석이 내게 말했다.

「하려는 자는 하지 못하게 되고, 잡으려고 하면 잡지 못하는 법이지.」

그리고는 낮게 키득키득 웃었다.
마치 나를 약올리는 것 처럼.
어느샌가 손에 쥔 담배를 입에 물고 그 연기를 따라서
나풀나풀 춤을 추며 사라져간다.

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보지만..
역시 잡을 수 없었다.
녀석의 말이 씨가 된 것일까?

녀석을 이루고 있던 빛들이 어느 순간 흩어져 수많은 나비들이 되었다.
그리고 그 나비들은 모두 나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독 한 마리는 저 높은 곳에서 혼자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었다.

가만히 손을 뻗었다.
우습게도 내 손은 바람이었다.

말도안돼.

피식 웃어버리고는 이내 다시 손을 뻗었지만
역시 한줄기 바람이 몰아칠 뿐.

내가 일으킨 바람에 나비는 내게서 조금 더 멀어져갔다.
나는 다가오라고 열심히 손짓했지만
그 손짓은 더 큰 바람을 만들어 나비를 내게서 더 멀리 떨어뜨려놓았다.

애가 타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팔을 휘둘러보고 목이 터져라 외쳐보았지만
휘몰아치는 광풍에 나비의 날개는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점점 멀어져 갔을 뿐만 아니라
조금씩 찢어지기 시작했다.

덜컥 겁이 난 나는 스르륵 손을 내렸다.
나비를 죽일 듯이 달려들던 바람은 잔잔한 산들바람이 되어
그의 다친 날개를 살포시 어루만져 주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나비의 눈빛은 원망스러움을 한껏 담고 있었다.
나는 도리질을 쳤다.

아니야.... 아니야....
그러려던 것이 아닌데.......

억울했다.
눈물이 났다.
저 멀리 보이는 나비의 눈에서도 눈물 방울이 떨어진다.

토옥-, 톡.

울지마.....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울지마.....
니가 울면 내가 아파.....

그러나 나비는 점점 더 많은 눈물을 흘린다.

한방울, 두방울 늘어가던 눈물은
어느샌가 비가 되어 누워있던 나의 몸을 적시고 있었다.

울지마.... 울지마....
제발......

“선배 여기서 뭐해요? 비오는데 과실 가서 자요!”

.....

꿈이었다.

“응...”

대답은 했지만 여전히 누운채로 가볍게 손을 들었다 내리고는
달려가는 후배놈의 뒷모습을 잠시 보다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새파랗게 맑던 하늘이었는데 어느샌가 구름이 몰려
비를 뿌려대고 있구나.
누워서 비를 맞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땅을 향해 달려들던 빗방울의 일부는 내 얼굴에 부딪히고
속도를 낮춰 얼굴의 곡면을 따라 또르르 흘러내린다.
또 일부는 깜빡이는 틈을 타 눈으로 곧장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이내 닫히는 눈꺼풀에 밀려 옆으로 흘러나왔다.

깜빡.. 깜빡..

분명 눈에 들어간 빗방울은 얼마 되지 않는데
신기하게도 눈 밖으로는 계속계속 빗물이 밀려나온다.
웃긴다. 하하.

붉은 벽돌 위의 흰 점은 사라진지 오래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매고 스적스적 걷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을 타고 빗방울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와글와글 내 옷에 달라붙더니 이내 스며든다.
얼굴로 달려든 녀석들은 눈물로 화해 뺨으로 턱으로 목으로
데구르르 구른다.

「뭐야.. 화나서 우는거야?」

아니야 바보야..
내가 어떻게 너한테 화를 내...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 그만해-. 창피해.」

.....
그냥... 조금 달래주길 바란건데...
내가 너무 지나친걸 바랬던거니...?

「바보.」

차마 아파서 사랑한다는 말조차도 할 수 없었다는거 알고는 있는지..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너는 왜 항상 내게 등을 돌리고 있는건지...

걸었다.
비가 내리건 말건, 몸이 젖건 말건.
걸었다.
비가 내려 몸이 젖는 것은 조금도 상관 없었다.
그러나 눈물이 내려 마음이 젖는건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마구 걸었다.

「바보.」

니가 내게 제일 많이 했던 말.

「바보같아.」

나는 네 사랑을 믿었는데..
너는 내 사랑을 믿지 못했던걸까...

내가 손을 휘두르지 않았다면....
나비는 내게 와 앉았을까..?

내가 네게 달려가지 않았다면....
너는 내게 와 머물렀을까....?

아프다.
니가 없는 나는 너무나도 아프다.
너무 아파서....
정말로 바보가 되어버린 것 같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미안해.....


========

그 넓은 하늘에서 보고있다가
이렇게 한심한 내 모습 보이거들랑
노란 나비 되어 잠시만 다녀가주오..

폭신한 구름 위를 구르다
혹시나 아직 내 모습 잊지 않았거들랑
하얀 나비 되어 잠시만 내려와주오..

머무르는 것도 바라지 않으니..
그저 모습 한번만 보이시구려..

그러면 내 작은 용기라도 얻어
아직 멀고 먼 인생길 힘겹게나마
갈 수 있으려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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