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식님이 말씀하시는 기독교는 1920년대 까지의 기독교입니다.
그때 까지는 '기독교와 독립운동'과의 분리가 이루어 지지 않았고
신학문이 기독교를 통해 들어왔기에 초기 독립운동단체인
신민회의 경우 기독교인들이 주축을 이루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정에서 기독교를 위험분자라 지목한 이후
정확하게는 105인 사건이후 많은 탄압을 받아왔습니다.
문재는 3.1운동 이후입니다.
당시 3.1운동도 다른종교와는 달리 기독교는 유독
평안도 일대에서 많은 독립운동을 하고 그외의 지역에서는
그렇다 할 활동을 보이지 않았습니다.(이부분 따로 말씀드리겠지만 3.1운동의 주축세력은 천도교입니다)
또한 3.1운동후 1920년대 일본군정이 문화정치라는것을 표방합니다.
어느정도 선의 집회와문화 활동을 인정한거죠.
이때당시 기독교는 독립운동 보다는 사회주의 활동에 전념합니다.
물론 현제 기독교분들은 아실런지 몰르겠지만..
당시 신물문을 전파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던 '신생활'이라는
잡지를 통해 많은 사회주의문물을 전파하였습니다.
또한 YMCA에서 창간한 '청년' 이라는 잡지에서
이대위는 ‘사회주의와 기독교는 떨어질수 없는 것’이며 ‘맑스와 엥겔스는 현대의 예수’라는 표현까지 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전파과정에서
그전의 기독교가 다른 직업이 있는 지사가 기독교를 도구 삼아
독립운동에 나서는 것과는 다르게 ‘보통 사회의 중-하층민이
기독교라는 하나의 생활수단으로 인해서 성장하고 그것이 사회적 상승의 수단
으로만 사용’되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다시 말해 그런 계층에 있어서는 단순히 ‘생활의 수단으로서의 종교’
만 중요할뿐 ‘민족문제’ 같은 크고도 위험한 일과는 분리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광적이다 싶은 독립운동을 해오던
반일 독립 기독청년이 온순한 성경학교 선생님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과정 중에 활발한 1930년대의 기독교
계몽운동을 통해 상대적으로 많은 기독교의 청년들이
신분상승을 노리고 일본군 하급장교와 일본경찰 조직으로 들어 가게됩니다.
이과정을 통해 기독교가 친일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건지도 몰릅니다.
(당시의 하급장교와 일본순사에 들어갈정도의 능력을 갖기위해
계몽운동을 펼치는 기독교에서 교육을 받을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꼭 그곳을 않통하고 학교에서 공부하면 되지 않냐 하시는데. 당시엔
가난한 시절이라 교육받을수있는 곳이 한정 되어 있었습니다. 엄친아
정도 된다면 몰르겠지만....)
또한 논란이 되고있는 1920년대 이후 기독교계의 독립운동은
조선의 독립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조선의 공산화를 목적에 둔 운동이지
민족의 독립운동과는 무관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또한
신사참배 반대 운동또한 일부 기독교 계열에서 일어났으나 비주류였습니다.
물론 이때에는 많은 어페가 있는게 대다수의 국민이 창씨개명에 스스로
나서고있는 상황이라 모라 할말이 없습니다. 물론 당시 기독교내에서는
신사참배반대운동은 종교운동이지 독립운동이 아니라는 것이 당시의
기독교의 반응이였습니다.
또한 해방이후 '건국준비 위원회'의 경우 이상하리 만치 기독교인사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이들은 친일파라는 소리 보다는 공산당이라는 비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손을 내민건 미국군정과 이승만박사였습니다.
그때부터 미국=기독교국가라는 공식과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기독교'로 변하게 된것입니다.
당시 북에 있도 기독교 연맹도 있었으며 이곳의 거두가 김일성의 외척인
강양옥이였습니다. 하지만 북에서의 활동보다 남에서의 활동이 더 좋았는지
아니면 북에서 핍박을 받았는지 몰르겠지만 대거 남으로 내려와 교회를 만듭니다.(‘민족 반역자 몰기’, 무려 24~40명의 사망자를 낸 신의주 학생의거등,핍박 받았습니다.)
이때가 한국전 전후였니다.
기독교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 나게 됩니다. 당시 있던 교회를 100개라고
한다면 90개가 북에서 넘어온 교회였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사회주의적 가치관을 가진 교회분들이 꽤 계셨는지
아니면 권력에 순응하는 종교적 신념때문인지는 몰르겠지만
서울 함락때 기독교 단체가 있었고 그 단체가 북조선의 승리와 조국해방을 위해 열성적인 구국 기도회를 열었다는 겁니다. 당시 성금으로
10만원을 내기도 했죠..
또한 웃긴게 다시 북으로 진격할시엔
일제치하때 순교하지 못햇지만 이번이야 말로 순교할때라며
기독교 청년들을 독려했죠.. 그때 또한번 기독교 인구가 늘어 났습니다.
물론 이당시 북한 정권에 협조하지 않아 순국하신 분들 대단이 많습니다.
그런데 더 대단한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1.4후퇴때 북에있던 대부분의
교회들이 남쪽으로 내려 온것입니다.
순국하진 우국충절의 인사들보다 훨씬 많은 수였습니다
이때부터 한국기독교의 반공 역사가 시작된것입니다.
-----------------------------------------------------------------------------------------------------출처 여러자료 제가 읽어보고 쓴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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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주체는 천도교였습니다.
천도교는 경술년(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 근 10년 동안 힘을 기르면서 여러 방면으로 독립 운 동을 거사할 다음과 같은 준비를 하여 왔습니다.
① 교단 안에 민주적인 의사원(議事院) 제도를 새로 두고 지방 대표를 중앙에 상주케 하여 유사 시에 대비하였습니다.
② 우이동에 봉황각(鳳凰閣) 수도원을 설립하여 지방 대표 약 500명을 뽑아 7차에 걸쳐 수련을 실시, 독립 정신을 기르게 하고 이들이 지방에서 독립 운동 거사에 주동이 되게 하였습니다.
③ 비밀히 운동 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중앙대교당 신축 기금의 명목으로 자금을 마련토록 하였 습니다.
④ 전국의 교도로 하여금 기미년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간 광복 특별기도를 행하게 하였 습니다.
이와 함께 전국 교구에 등사기를 마련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면서 전민족의 이름으로 독립 운동을 거사할 방침을 세워 나갔습니다.
이리하여 포덕 60년(1919년) 1월에 의암성사 자택에서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이 여러 차례 모여 서 회합한 끝에 다음과 같이 독립 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① 각계의 분산적 독립 운동 계획을 단일화하여 각계의 중진들을 망라한 「민족 대표」의 이름으 로 독립 선언을 할 것.
② 독립 선언서를 다수 인쇄하여 전국에 살포하고 전 민중과 더불어 대중적 만세·시위 운동을 전개토록 할 것.
③ 일본 정부와 의회 및 조선 총독부, 그리고 파리 강화 회의 각국 대표와 특히 미국 윌슨 대통 령에게 독립 의견서를 제출할 것.
④ 독립 선언서 및 서면의 작성 의뢰와 각계 섭외 활동 등의 계획 실행을 최린이 담당할 것.
그리고 이 운동의 방법으로 ① 거족적 운동으로 대중화할 것이며
② 분파적으로 하지 않고 일원화하되
③ 비폭력적 무저항주의로 할 것
등 세 가지 원칙을 확정지었습니다.
그 후 최린은 2월초 자택에서 송진우·현상윤·최남선 등과 회합을 가지고 앞서 세운 독립 운동 계획에 찬동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4일후 다시 계동 중앙학교에서 네 사람이 재차 회합하여 숙의 한 결과 ① 구한국 시대 요로 인물을 설득하고 기독교와 함께 민족 대표 수십 인의 명의로 독립 을 선언하기로 하고 ② 독립 선언서 및 의견서 등 서면 기초는 최남선이 담당하도록 합의하였습 니다.
이어 최남선과 송진우는 구한국 시대 요인을 찾아 각각 교섭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였습니다. 한편 최남선은 기독교와 교섭하기 위하여 정주의 이승훈을 만나고자 현상윤으로 하여금 상경하도록 전 언을 의뢰하였습니다. 현상윤은 다시 정노식 집에 유숙 중이던 정주 사람 김도태에게 부탁, 김도 태는 2월 8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9일에 정주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이승훈은 선천에 가고 없었 습니다. 그래서 박현환에게 상경하도록 말을 전하게 한 결과 이승훈은 2월 11일에 급거 상경하였 습니다.
한편 이무렵 재일 동경 유학생들이 독립 선언과 만세 운동을 전개하여 국내에서 일본 관헌의 경 계가 자못 심하여졌습니다. 이 때 최남선은 지목을 피하기 위하여 이승훈과 직접 만나지를 못하 고 송진우로 하여금 만나 상의하게 하였습니다.
송진우는 이승훈에게 천도교측의 독립 운동 계획을 말하고 기독교에서 같이 합류하기를 권하자 쾌히 찬동하였습니다.
이승훈은 다음날 선천으로 내려가 기독교의 이명룡외 세 사람과 회합하여 찬동을 얻고 다시 14일 에는 평양에 가서 길선주·신흥식 등과 만나 찬동을 얻었습니다. 그 후 이승훈은 재차 상경하여 기독교 청년회에 있는 박희도와 상면하여 기독교측의 독자적인 독립 운동 모의에 참석하였습니 다. 2월 20일 모의한 결과는 ①일본 정부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되 ②경성 및 지방에서 청원서에 서명할 동지를 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이와 때를 같이하여 기독교계의 함태영, 안 세환, 이갑성 등을 중심으로 별도의 독립 운동 모의가 있었습니다.
그 후 2월 21일에 최남선은 이승훈을 만나 그와 함께 최린을 방문하여 의견을 교환하게 되었는데 최린은 기독교측의 독립 청원서 제출 계획을 듣고 독립 청원보다 독립 선언이어야 한다고 역설하 면서 교파가 다르다 하여 서로 다르게 하여서는 안 된다고 간곡하게 합류할 것을 말하였습니다. 이에 이승훈은 다른 동지와 협의하여 회답키로 약속하는 한편 독립 운동비조로 자금을 마련하도 록 요구하고 헤어졌습니다. 이에 최린은 의암성사에게 운동 자금 융통에 대한 승인을 얻어 5천원 을 22일 이승훈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 후 이승훈은 함태영과 함께 기독교측 대표로서 천도교측 섭외 대표인 최린과 여러 차례 협의 한 끝에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독립 운동 방법을 합의하였습니다.
① 독립 선언은 3월 1일 오후 2시 낙원동의 탑골공원에서 행합니다.
② 독립 선언문을 민중에게 살포하는 동시 학생단과 민중으로 하여금 만세 시위 행진을 감행토록 합니다.
③ 각 지방 거사는 중앙을 모방토록 하고 선언서 발송등 지방 연락은 천도교와 기독교가 각기 지 방 조직을 통해서 분담합니다.
④ 독립 선언서의 기초, 인쇄, 서명 등은 천도교측이 담당합니다.
⑤ 일본 정부와 의회에 대한 서류 제출은 임규, 안세환에게 서면을 주어 2월 27일 서울을 출발케 합니다.
⑥ 미국 대통령과 파리 강화 회의 각국 대표에 대한 서면 제출은 기독교측에서 담당합니다.
⑦ 민족 대표로 연서할 사람은 천도교와 기독교에서 각 10여 명으로 정하기로 하고 불교측 대표 는 최린이 한용운을 만나 약간인 참가키로 합니다.
이리하여 민족 대표 33인이 정해지고 2월 28일 저녁 의암성사댁에 민족 대표가 회동하여 다음날 3월 1일의 거사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합의한 결과 독립 선언서 낭독을 태화관에서 하기로 변경한 것 외에는 모두 당초 계획대로 재확인하였습니다.
드디어 3월 1일이 왔습니다. 인류의 역사상 평화적 독립 운동의 빛나는 시범의 기원이 될 이 날 민족 대표들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불렀습니다. 때맞추어 탑골공원에 서는 남녀 학생단이 모여 일반 민중과 더불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드높게 외치 면서 시가로 쏟아져 나와 시위 행진을 감행하였습니다.
같은 날 평양과 해주, 의주, 길주, 원주, 서산, 전주, 진주 등지에서 거사하고 연이어 삼천리 방방 곡곡에서 성난 파도와 같이 남녀노소가 총칼 앞에 맨주먹으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서도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으로 민족 대표를 비롯하여 수많은 독립 투사들이 투옥당하고 이름없는 많은 애국 지사가 학살을 당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국내에서 독립 운동이 거족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해외에서는 망명 지사를 중심으로 상 해에서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세우게 되고. 숭고한 3·1정신은 그 후 대한 민국 건국 정신 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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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하고 전파하고 한게 주체가 아니면 어떤것이 주체인지 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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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의 유레
박영효는 기독교인이었을까?
이상규 교수 (고신대학교)
박영효(朴泳孝, 1861-1939). 그가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는 김옥균, 서재필 등과 함께 개화파인사로서 갑신정변의 주역의 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친일적 인물이었다는 점 때문에 그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우연찮게도 내가 그에 대한 일본측 문서를 열람하는 중에 그가 22년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할 때인 1907년 6월 부산의 미국북장로교 선교사였던 어빈(Ch. Irvin, 어을빈)의 집에 일주일간 체류했다는 기록을 발견하게 되었다(大阪每日新聞, 1907. 6. 14일자).
그가 어떻게 부산의 선교사 어빈 집에 체류하게 되었을까?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일주일간이나 묵을 수 있었을까? 이 점을 확인하는 중에 그의 기독교에로의 관심과 선교사와의 교류의 실마리를 풀게 되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박영효는 한말의 정치가이자 개화사상가였다. 그는 1882년에는 제3차 수신사로 일본 방문했고, 이듬해 한성순보를 창간(1883년 10월)했던 인물이다. 특히 그는 태극팔괘의 도안을 기초로 태극기를 처음으로 제작했던 인물이다. 1884년에는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인물인데 후일 친일적인 성향을 보였다고 하여 최근의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3090명의 친일인사 명단 중에 포함되었다는 정도이다.
사실 그는 양반신분의 세도가 출신이다. 그는 판서(判書) 원양(元陽)의 아들로서 철종(哲宗)의 사위였다. 박영효는 북경과 천진을 오가는 오경석(吳慶錫)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의 일가인 박규수(朴珪壽)를 통해 개화사상을 접하게 된다. 그의 형인 영교(泳敎),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도 이런 영향권 안에서 개화사상가로 발돋움 하게 된다. 박영효는 김옥균보다 꼭 십년 연하였으나 문벌이나 지위가 높아 항상 어른 대접을 받았다.
박영효는 당시 정치 현실에서 일본과 교류하면서 개화당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당시 민영익 등 수구파과 서구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청과 지속적인 관계를 갖기를 원해 친청(親淸) 입장을 견지한 반면, 미국이나 근대 일본을 경험했던 개화파 인사들은 일본 세력을 등에 업고 급진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하고자 했다. 외국인이었던 그리피스의 눈에도 양측의 대립은 심상치 않았다. 그는 “1884년 10월 말에 이르러 서울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쓰고 있다. 일본의 지원을 받는 개화파와 친청 정책을 고수하는 보수파의 갈등은 갑신정변의 원인이 된다.
물리적으로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거사를 감행했던 박영효를 비롯하여 김옥균(金玉均), 서광범(徐光範), 서재필(徐載弼) 등 개화파 지도자들은 1884년 12월 4일의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일본 공사관이 민중의 습격을 받게 되자 개화파 지도자들도 “일본인으로 가장하고”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다. 일본에 도착한 이들 일행은 곧바로 요코하마 성서공회의 헨리 루미스를 찾아 갔고, 루미스는 그들에게 숙소를 제공해 주었다(C. D. Loomis, Henry Loomis, Friends of the East (NY: Fleming H. Revell Co., 1923), 84.).
이것이 박영효가 기독교선교사와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계기가 된다. 개화파 인사들이 선교사인 루미스를 찾아간 것은 신변 안전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일본 체류보다는 미국행이 자신들의 장래에 유익하다고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루미스와 지내는 동안 이들은 한국에서 보수파가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이제 귀국은 요원한 현실로 인식했다. 쿠데타를 주도했다는 이유에서 박영효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처형되었고, 그의 아내는 친구 집 문 앞에 자신의 갓난 여아(女兒)를 놓아두고 한강에 투신자살했다.
위험을 감지한 박영효는 서광범과 서재필과 더불어 미국행을 결정했다. 이 때 루미스는 미국에 안전하게 입국할 수 있도록 소개장을 써 주고, 또 미국 동부에 정착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미국에서 서재필은 유수한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잠재적인 인정받고 의학을 공부하게 되어 한국인 최초의 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박영효는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1886년 5월 31일 일본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요코하마에 2년 이상 머물렀다. 이때에도 루미스는 변함없이 박영효를 지원했고, 자주 자기 집에 그를 초대했으며, 필요할 경우 그에게 서적도 빌려 주었다.
박영효는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미국 선교사들과의 교제하면서 한국도 일본처럼 서구문화와 기독교를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확신하게 된다. 박영효는 망명생활 중에 고종에게 서양 문화와 기독교의 수용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한다. 즉 박영효는 상소문에는 “오늘날 천주교와 야소교(耶蘇敎)가 왕성한 구미 각국은 그 나라가 가장 강하고 왕성한데 우리의 조선 유교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둘 다 쇠퇴하여 이 때문에 국세가 침약(沈弱)하였으므로 한심하고 탄식할 따름입니다”라고 했다. 그는 일본에서 선교사를 만날 때마다 한국에 와서 서구와 같은 고등교육을 실시해 달라는 것과 한국에 복음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의 재래 종교는 지금 기운이 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기독교에로의 개종의 길은 환히 열려 있습니다. 기독교 교사들과 사업가들은 일단은 우리나라 어느 구석에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합법적인 개혁을 하기에 앞서 먼저 우리 백성을 교육해야 하며 기독교화해야 합니다(F. A. McKenzie, The Tragedy of Korea(New York:E. P. dutton & Co., n.d.), 54-55.).
아펜젤러가 1885년 한국에 입국하기 전 일본에 잠시 체류하는 동안 박영효는 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한국선교를 준비하도록 배려해 준 일도 있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박영효는 기독교를 접하게 되고 선교사들과 교류하게 된다. 그가 1907년 부산을 방문하고 어빈 집에 유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연유였던 것이다.
사실 개화파 인사의 기독교와의 접촉은 박영효의 경우만은 아니었다. 불교신자였던 김옥균도 서구문명의 내용이 기독교를 통한 개화를 갈망했고, 후일 일본의 청산학원 설립자인 맥클레이 선교사를 만나 한국선교를 호소해 후에 한국이 기독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야스카와 목사와도 가까이 지냈으며, 그에게 편지를 보내 “기독교 교리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었다. 비록 갑신정변이 실패했지만 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은 한국의 선교의 장을 여는 데에 적지 않는 기여를 하게 된다. 박영효와 루미스와의 친분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후에 박영효가 한국에 돌아가 다시 내각에 등용된 후 그가 헨리 루미스에게 다음과 같은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존경하는 헨리 루미스목사님, 나는 일본에서 13년을 보냈습니다. 내가 이 여러 해 동안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친절한 보호덕택이었으며, 나는 어떤 말로도 나의 감사를 표현 수 없습니다. 최근 나는 나의 조국의 부름을 받고 돌아왔는데, 황제 폐하께서 나의 반역을 은혜롭게도 용서해 주셨고, 나를 이전 직책에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나는 천수(天壽)를 누려 왔으며, 이제 나는 눈물로 이에 대해 나의 주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C. D. Loomis, Henry Loomis, Friends of the East (NY: Fleming H. Revell Co., 1923), 85-6.). 개화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던 박영효는 이제 그리스도인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2007. 1. 4. 교회와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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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태극기가 만들어진 년도는 1882년도 였으며 당시 박영효는 기독교와 상관이 없는 인사였습니다.
또한 박영효가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말할수 없는 부분이 아래를 보시면 아실것입니다
일본동경도립중앙도서관 고서부에 소장되어 있는 1882년 10월 2일자 신문 시사신보(時事新報) 에 게제된 자료
그신문 기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때까지 조선에는 국기로 부를 만한 것이 없어 지난번에 탁지부를 방문한 중국의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는 중국의 국기를 본받아 삼각형의 청색바탕에 용을 그려야 하며, 본국인 중국은 황색을 사용하나 조선은 중국의 동방에 위치하는 나라이므로 동쪽은 청색을 귀히 여긴다는 뜻에 따라 청색바탕을 이용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이에 국왕은 분히 여겨 절대로 중국의 국기를 흉내내지 않겠다하여 사각형의 옥색바탕에 태극원 (두개의 소용돌이 문양)을 청색과 적색으로 그리고,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4괘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령을 하교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당시 태극기를 만든 분은 고종황제였으며 이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일본군정에서 박영효가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상식으로 전파된것입니다.
그리고 말도 않되는게 당시 절대왕정시대에 한나라를 대표하는 국기를 일개 신하가 만든다는게
왜 지금까지 상식으로 남아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박영효가 고종의 명령으로 태극기를 만들었다손 처도 혼자만든게 아니라 다른사람있었는데 제가
까먹어서 적지 못하겠네요 그 두분이서 만들었고 당시엔 기독교 인사가 아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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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관련글 입니다
(1) 나라꽃 무궁화
무궁화는 우리나라 꽃, 국화(國花)이다. 나라마다 상징하는 꽃으로서 국화를 두고 있다. 국화가 정해지는 것은 법으로 공식화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과 깊은 관련을 가진 꽃이 자연스럽게 국화로 정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면, 수십 수백 가지의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 가운데서 왜 하필이면 무궁화가 우리 민족에게 선택된 것일까?
무궁화가 국화로 굳어진 역사적 시점은 개화기로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화가 법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확실한 고증은 있을 수 없으나 대체로 이에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문호개방 이후 서구 문물이 유입되면서 서양 여러 나라들이 그들 왕실의 문장(紋章), 훈장, 화폐 등에 사용한 국화를 접하게 되자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나라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꽃으로 자리잡고 있던 무궁화가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국화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무궁화는 일제 강점기 암울한 시기를 거치면서 슬픔과 고통을 함께하는 겨레의 꽃으로 마음속에 자리하였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정식으로 채택된 애국가의 후렴에 등장함으로써 국화로서 확실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무궁화가 국화로 적합한가에 대한 시비를 벌여온 세월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논쟁 자체가 무의미해졌고 더 이상 문제를 삼는 사람들도 사라졌지만, 지상(紙上)논쟁까지 벌이며 국화로서의 무궁화에 대한 자격이 호된 시련을 겪은 적이 있다. 왜 그랬을까?
무궁화가 국화로서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의 논리는 이러하다. 한 나라의 국화가 되기 위해서는 ①국토 전체에 분포하는 꽃 ②우리나라 원산종으로 민족을 상징하는 꽃 ③민족과 더불어 애환을 함께 한 꽃 ④이름과 모양이 모두 아름다운 꽃이어야 하는데, 무궁화는 ①자생지가 전국적이지 않고 주로 남쪽에 분포하며 ②원산지가 인도이므로 외래식물이며 ③진딧물이 많이 붙고 꽃이 단명허세(短命虛勢)하며 ④휴면기가 너무 길고 봄에 싹이 너무 늦게 돋는 등 국화로서 자격 미달이라는 것이다.
자, 그럼 지금부터 무궁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해 보자. 국화는 그 민족을 상징하는 꽃이므로 우리 국민 대다수가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꽃이 있다면 바꿀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시비에 앞서 우리가 무궁화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자기 점검부터 해보아야 한다. 국화는 단순한 식물로서의 꽃이 아니라 역사와 정신을 함축하는 상징으로서의 꽃이기 때문이다.
(2) 역사적 사실과 상징 의미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많이 자라고 있다는 기록은 춘추전국시대에 저술된 동양 최고(最古)의 지리서 [산해경(山海經)]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君子國.....有薰華草朝生暮死’라 하여, 군자의 나라에 훈화초가 있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군자국은 우리나라, 훈화초(薰華草)는 무궁화를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무궁화를 훈화초(薰華草), 목근(木槿), 순영(舜英), 순화(舜華), 조개모락화(朝開暮落花)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피기 시작한 것은 2천년이 훨씬 넘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지봉유설(芝峰類說)]에도 ‘君子之國 地方千里 多木槿花’라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많이 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신라때 최치원이 왕명으로 작성하여 당나라에 보낸 국서(國書)에도 신라를 무궁화가 많은 나라라는 뜻으로 ‘근화향(槿花鄕)’이라 일컫었고, [구당서(舊唐書)] 신라전(新羅傳) 기사에도 ‘신라가 보낸 국서에 그 나라를 일컬어 근화향, 곧 무궁화의 나라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하여 보면 고대로부터 중국인들은 우리나라를 ‘군자의 품격을 갖춘 나라, 무궁화가 아름답게 피는 나라’라 예찬하였으며, 또한 신라시대에 이미 무궁화가 우리나라를 일컫는 꽃으로 사용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고려, 조선시대에 와서도 우리 스스로 근역(槿域), 근화향(槿花鄕), 근원(槿源)이라 하여 오늘날까지 ‘근역(槿域)’은 무궁화가 피는 땅, 즉 우리나라를 일컫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그럼, 무궁화(無窮花)라는 꽃이름이 사용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고려 중기 이규보의 글 중에, 친구 두 사람이 근화(槿花)를 일컬어 한 사람은 ‘무궁(無窮)’이 옳다하고, 또 한 사람은 ‘무궁(無宮)’이 옳다고 다투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미 고려 시대에 ‘無窮花, 無宮花, 舞窮花, 등으로 쓰이다가 조선 말기에 無窮花로 확실하게 정착된 게 아닐까 싶다.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예로부터 무궁화는 우리나라 고유의 다른 이름이 있었으며, 이 우리말에 유사한 한자음을 따서 사용해오다가 뜻이 좋은 무궁화로 통일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양화의 수필 <무궁화>에 보면 시골에서 ‘무강나무’로 불렀다는 얘기가 나온다.
조선시대 강희안이 저술한 [양화소록(養花小錄)]을 보면 ‘우리나라에는 단군이 개국하였을 때 목근화(木槿花)가 비로소 나왔으므로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일컫되 반드시 근역(槿域)이라 불렀다 한다........속명 무궁화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이화(李花오얏꽃)를 왕실화로 삼았으나 과거에 장원한 사람에게 임금이 내리는 어사화(御賜花)는 무궁화였고, 임금을 모시고 베풀어지는 연회에서 신하들이 사모에 꽃는 꽃도 무궁화였는데 이를 진찬화(進饌花)라 하였다.
[출처] 무궁화(無窮花)|작성자 머거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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쩝.. 보시면 아시다 시피 무궁화는 우리 민족 고유의 꽃입니다. 이것을 남궁억등 기독교 계열
인사들이 국화로 만드는 운동을 하였습니다. 이부분에 대해서는 공감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무궁화였을까요? 저위를 보시다시피 무궁화가 우리나라에 많이 피고 많이 사용되었으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꽃이라고 할수 없었고 대표한다는 꽃은 왕실의 꽃은 오얏꽃이였습니다.(일본의 국화가 일본 왕실꽃인 벗꽃입니다 ,영국 장미 왕실 휘장이였습니다.) 당시 절대 왕정이거나 정치상황은 틀려도 정치적 구조가 비슷한 나라들을 보면 대부분 왕실꽃을 국화로 지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찾아 보았습니다.
샤론의 장미라고 하시면 기독교분들 아시는지 몰르겠습니다. 저도 찾아보고 놀랐습니다.
초기 계몽운동이 이래서 중요하구나.. 우리나라의 초기계몽운동이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구나
이런것을 다시한번 느꼇으며 이래서 기독교인사들이 국화를 무궁화로 할려고 했다는걸 알았습니다.
샤론의 장미(무궁화)란 예수님을 찬미하는 내용을 가진 꽃이며 이는 찬송가에도 나옵니다.
정체 불명의 꽃이라고들 하는데 영어에서는 무궁화를 뜻합니다. 이는 피식님도 아실것입니다.
이것을 볼때 조금 불손한 생각이 드는건 어쩔수 없나 봅니다.
그리고 이 것의 보급운동을 할 당시에는 국화로 무궁화가 제정된거도 아니였습니다.
이를 보면 의도적으로 기독교계 인사가 무궁화를 전도 수단으로 활용했을수도 있겠다 싶어
이렇게 올립니다.
그리고 자료로써 국화로 사용된 오얏꽃 문양과 태극기 옆에 그려진 오얏꽃을 올리겠습니다.
이사진들을 보면 당시에 국화로 오얏꽃이 사용되었으나 기독교 인사들로 인해
무궁화로 변경된걸 추측할수있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얏나무(자두나무)의 꽃인 오얏꽃 즉, 이화입니다.
이화는 대한제국의 국화이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인장이 찍혀진 칙서나 정부의 문서등에는 대한제국기인 태극기와 함께 이화가 그려져있었습니다.
또한 이화는 대한제국의 황실 문장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화는 황제의 의복에도 문양이 새겨져 있고, 대한제국군의 의복자체에도 있었고 모자에도 있고 견장으로도 쓰였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고종황제의 사진입니다. 황제의 모자 중앙에 달려있는 문양이 바로 이화입니다.
대한제국군의 제복입니다. 군데 군데 이화문양이 새겨져있죠.
대한제국군의 모자입니다. 이화문양이 매우 선명하죠.
대한제국군의 견장입니다. 밑 부분에 보면 이화무늬가 박혀있습니다.
대한제국 황실문장입니다.
붉은 바탕에 위에는 '전주이씨'全州李氏라고 적혀져 있고 이화 문양 가운대에는 마루 종宗자가 적혀져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미 7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군이 강제해산을 당했을 때 자결을 한 박승환 참령의 초상화입니다.
한마디로 지금 정설로 되어있는 무궁화는 당시엔 그냥 기독교를 대표하는 꽃이었을 뿐입니다.
국화로 된이유가 국민대다수가 그렇게 인정한다는것이면 이것은 기독교로인해 일어난 참상일뿐입니다.
저또한 무궁화가 국화가 되는데는 아무런 반대가 없지만 당시엔..
기독교가 독립운동을 위해 무궁화를 전파시켰다고 말하기에는 어페가 있어서 이렇게 올립니다.
진짜 독립운동을 할려고했으면 무궁화를 전파시킬게아니라 오얏꽃을 전파시켰어야 옳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 우리 국화는 오얏꽃이 되어있었겠지요.
(그리고 첨언이라고 할건없지만 더한다면 남궁억은 대한제국시절 관리까지 지낸 인물입니다.
한마디로 국화가 오얏꽃이란걸 알고있던 인사입니다.)
이것은 읽어보시는 분들이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확실한건.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와 무궁화는 연관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시대때엔 국가를 대표하는 꽃이 아니였다 물론 일제시대때도 마찬가지였으나 기독교의 무궁화 보급 운동으로 국화 화 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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