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 스타리그 4강이 끝나고 '임진록'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인 경기도 끝났다. 결과는 세 번 다 초반의 치즈러쉬로 결판을 지은 임요환의 완승.
게시판이 시끄럽겠지 하면서 그 동안 눈팅이나 하던 파이터포럼을 찾았다. 분명히 시끄러웠다. 하지만 그 시끄러움 속에는 '이건 아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너무도 많이 섞여 있다.
넌 이순간부터 임요환이 아니라 임요벙이라는 식의 이야기 - 나도벙이라는 소리처럼 '벙커러시' 때문이겠지 - 부터 시작해서 이젠 나는 임요환의 팬이 아니다. 임요환 싫다(좀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난 이제 임빠 안한다. 임까다 하는 이야기) 하는 이야기. 역대 최악의 4강전이었다는 이야기. 당한 홍진호가 능력이 없는 거다 하는 이야기, 둘다 삼류였다느니 하는 이야기. 그따위로 이기니까 자랑스럽냐는 이야기. 심지어 어떤 리플엔 이런 소리까지 써 있었다.
"임요환 당신은 프로게이머다, 프로게이머에게 승리란 인기를 위한 수단이다. 승리가 프로게이머에게 목적이 아니다. 당신은 아마추어다"
솔직히 나도 좀 싱겁다는 생각은 든다. 프로게이머들의 수준이 상향 평준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더욱이 '임진록'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라이벌이라 인정받는 경기에서 총 경기시간이 20분도 안되는 3:0승부가 나왔다는 것은 정말 의외다.
플레이에 대해 욕할 수 있다. 기껏 기대했는데 힘 한번 못써보고 당한 거 아쉬워할 수 있다.
그러나...... 그뿐이다.
인신공격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이 재수없다 뭐다 하는 소리는 왜 나오는가? 임요환 선수나 홍진호 선수가 당신들을 향해 가운뎃 손가락이라도 날렸나? 경기 시간에 늦었나? 아니면 경기를 중간에 디스커넥트라도 했는가? 비매너가 있었나? 톡 까놓고 이야기하자. '당신들이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프로게이머의 자격은 왜 문제삼는가? 그들이 어떠한 연습을 하는지 어떻게 생활하는지 말한다는 거는 어리석은 말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도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한번 장난같이 즐기고 마는 스타크래프트를 그들은 죽어라고 밤낮없이 잡고 산다는 것밖에는 모른다. 나는, 자신들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했다고 누구의 직업 자격이 안 된다고 문제삼는 거는 정말이지 치졸하다는 것밖에는 모른다.
당신들은 결과만 생각하는가? 임요환 선수의 인터뷰를 보았는가?
"오늘 너무 쉽게 이긴게 아니냐고 보실 수도 있지만, 내가 이 전략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는 잘 모를 것이다. 상대가 알고도 못 막을 만한 타이밍을 찾아 내려고 며칠 밤을 새웠다. 정말 과거의 결승전 보다 더 많이 준비했다. 스트레스도 심하게 받았다."
왜 고민하고 밤을 새웠다고 생각하는가? 승부 때문에? 그것도 맞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바로 '임진록'을 오늘 보았을 바로 당.신.들. 때문이었다. 최고의 전략으로 승부를 결정지어야 한다는 압박이 작용한 것이다. 그런데 당신들은, 오늘 파이터포럼에 E-Sport의 팬이라고 와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너무도 빨리, 찰나에 스쳐간 경기만을 보고, 세 번 다 같은 전략으로 끝난 결과만을 보고 3류니 뭐니 기대 안한다느니 하는, 아쉬움을 넘어선 망발만을 끄집어냈다.
더욱이, 내가 따옴표까지 써가면서 인용한 리플 - "임요환 당신은 프로게이머다, 프로게이머에게 승리란 인기를 위한 수단이다. 승리가 프로게이머에게 목적이 아니다. 당신은 아마추어다" - 그것은 정말 이기주의로 인한 자가당착의 극치일 뿐이었다. 승리가 프로게이머의 목적이 아니라고? 그 리플을 쓴 사람에게. 전국의 프로게이머들이 다 그런 리플을 단 사람 하나하나를 위해, 아니면 '팬'이라고 이름붙인 인간들을 위해 무보수 봉사라도 하는 줄 아는지 묻고 싶다.
프로게이머는, 그것이 직업이다. 부정한 방법을 쓰지 않는 한, 최선을 다해 이기고, 입상을 하고, 우승을 하고, 상금을 타고, 그로 인해 좀더 좋은 연봉을 받고 대우를 받는 것이 목표이다. 자신과 동일시한 사람이 팬들이 되고 성원해 주는 것을 프로게이머들이 묵과해서는 안 될지 모르지만, '승리가 프로게이머에게 목적이 아니다'라는 헛소리를 한다는 것은 E-Sport의 팬으로서, 아니, 사람으로서의 인성을 아예 포기한 망발에 지나지 않는 것일 뿐이다.
언제는 자신들을 환희에 떨게 해 줬으니 최고의 프로게이머고, 오늘은 막상 임진록이라고 해서 엄청나게 몰려들고 TV에도 붙어 내 시간 버리고 왔는데 임요환은 그렇게 이겨서, 홍진호는 그렇게 져서, 자신들을 충분히 즐겁게 해주지 못했으니 아마추어다? 그런 거지같은 논리가 어딨나?
파이터포럼에 모인 E-Sport의 팬이라고 하는 사람 중 대다수의 이런 허접한 움직임들을 보니 어느 사이트에서 읽은 뉴스가 떠올랐다.
'지금은 '부자 되자'하는 소리만 넘쳐나지 잘 살아보겠다거나 행복해지겠다는 생각 같은 것은 아예 없는 세상'이라고. 그리고 그게 대세라고. 하지만 그게 옳은 것일까?
결과만을, 그리고 그 결과에서 얻어질 떡만을 바라보는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그리고 지금 이런 같잖은 몰골들을 보면, 정말이지 우리나라 E-Sport의 미래가 어찌 돌아갈지는 불보듯 뻔하다. 뭐 국회건 서울시건 게이머건 제대로 돌아가는 곳이 한 군데도 없는데 이런 자가당착을 범하는 족속들이 팬이라고 있는 사람들의 세계가 얼마나 버틸까?
그리고 이 글을 보고서 만일 E-Sport의 진정한 팬으로써 나에게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도 묻고 싶다. 나의 글에 분노하기 전에 왜 이 헛소리가 난무하는 기사의 리플이나 게시판에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거나, 상처입는 당신들의 프로게이머들을 한 발 물러선 시선에서 살펴주지 않는가? 그런 이들이 만들어낸 생각없는 대세의 흐름에 세상이고 뭐고 다 집어삼켜져도 나만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진정으로 프로게이머를 생각해 주면 된다는 것인가?
방관은 독이다. 깨어있는 한 사람이 중심도 잡지 못한 채 이리저리 휘둘리는 한 나라보다 강하다. 그리고 진흙탕이 된 곳을 청소할 때에 진흙이 자신에게만 안 묻으면 된다는 생각은 헛된 것일 뿐이다.
끝으로 밝혀둘 것은 - 변명쯤으로 생각하겠지만 - 난 임요환 팬도 홍진호 팬도 아니다. 프로게이머는 더더욱 아니다. 난 파이터포럼의 기사에 리플을 달고 게시판에 글쓴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겨우 이런 정도밖에 안되는지에 대해 어이가 없어서 이 글을 쓰기 위해 회원 가입을 한 것이고, 이 글이 끝나면 그저 눈팅이나 하던 예전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나는 내가 응원한 선수들이 아니었고,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더 편안하게 경기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근거리?마음이 없다고 하지는 않겠다. 아니, 이 글을 읽는 이들보다 더했다고 자신할 수도 있다. 명색이 임진록 아니었는가.
그리고 이 글을 보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나 앞서 내가 말한 '이건 아닌 발언'을 하는 사람들보다 별로 내가 나을 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이다. 자기의 이익이나 재미를 위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렇게 만만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지는 말았으면 하며, 더욱이 오늘처럼 기대에 충족되지 않는 결과가 눈 앞에 보여졌다고 해서, 부정한 방법을 쓴 경기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한 악플을 달고 선수들을 폄하하는 당신들이 누구의 팬이다 안티다 말하는 것 조차 그저 같잖고 우스울 뿐이다.
그런 이들에게 어울리는 소리는 '찌질이'라는 것뿐이다.
오늘 나는, 3:0으로 끝난 '임진록'에 실망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위대한 E-Sport를 이끈다고 소리높여 외쳐대는 인간들에게 실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당신들을 위해 싸우는 - 정확히 말하면 당신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 프로게이머들이 오늘 한없이 불쌍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