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기원 : 장로교회는 칼빈이 종교개혁을 실천했던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시발을 찾을 수 있다. 장로교 신학과 신앙의 뿌리는 칼빈의 신학을 기초로 발전했다. 장로교는 네델란드(개혁교회), 영국(청교도), 스코틀랜드(장로교), 프랑스(위그노), 벨기에 등 유럽으로 퍼져 나갔고 유럽의 칼빈주의자들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미국 장로교회를 형성하게 된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② 유래 : 미국 장로교회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한국 장로교회는 미국 북장로교회 외지선교회 소속의 의사 알렌으로부터 시작됐으며, 1885년 4월 내한한 언더우드 목사에 의해 본격화 됐다. 한국 장로교회는 미국 북장로교회(1885년 - 평안도, 황해도, 경상북도), 남장로교회(1892년 - 전라도), 캐나다 장로교회(1893년 - 함경도), 호주 장로교회(1889년 - 경남지방 선교)에 의해 분할되어 선교되었다. 장로교회는 서울에서 신학교를 시작한 타교파와는 달리 평양에서 시작해(1901년) 1907년에 첫 졸업생을 배출하게 됐다. 또한 1907년 대부흥운동의 영향으로 급성장하게 된 장로교회는 장로교 4개 선교부의 합의에 따라 그 해 첫 노회(독노회)를 설립하게 되며, 1912년에는 7개 노회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창립한다. 특히 장로교는 상류계층보다는 서민층 전도, 부녀자 전도와 여성 교육을 주력한 결과 한국교회의 주류 교파로 성장하게 됐다. 그러나 1930년대 자유주의 신학논쟁이 시작되고 신사참배 찬반문제가 제기되면서 교단분열의 불씨가 됐다. 해방 후 한국장로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로 재건했지만, 재건과정에서 고려신학교(현재 고신대), 조선신학교(현재 한신대), 장로회신학교를 중심으로 분열하게 된다. 첫 분열은 1948년 과거 신사참배 등의 잘못을 회개할 것을 촉구하다 밀려난 재건파가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분열해 예장 고신을 형성하게 됐다. 2차 분열은 1954년 보수파로부터 김재준 박사의 진보신학이 정죄를 당하자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를 창립했다. 3차 분열은 1959년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문제를 놓고 총회신학교(현 총신대)를 중심으로 반대하는 승동측(합동측), 장로회신학교(현 장신대)를 중심으로 지지하는 연동측(통합측)으로 분열됐다. 4차 분열은 1979년 교권과 지역갈등으로 예장 합동에서 정규오 목사를 중심으로 한 호남권 인사들이 탈퇴, 개혁교단을 설립하면서 장로교 분열은 가속화 됐다.
③ 특징 : 칼빈주의 신학입장인 ‘인간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은총과 예정’을 근거한 하나님의 절대주권, 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 탄생, 성령의 아버지와 아들로부터의 나오심, 육신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 등을 따른다. 또한 한국장로교회는 예장 합동과 고신, 개혁 등은 보수적인 성향이 뚜렷하며, 예장 통합은 중도적, 기장은 진보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장로교 신학은 박형룡 박사를 중심으로 한 개혁주의적 정통주의 신학(박윤선, 신복윤, 차영배 교수)과 김재준 박사를 중심한 신정통주의적 역사참여 신학(서남동, 안병무, 주재용 교수)이 큰 틀을 형성하고 있다.
④ 교단 : 예장 통합(www.pck.or.kr), 예장 합동(www.gapck.org), 예장 고신, 예장 대신, 예장 개혁, 기장(www.prok.org) 등 100여개의 교단이 형성되어 있다.
(2006년) 세력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6,621(총회장:안영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6,795(총회장:황승기) *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4,100(총회장:장근태)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개혁국제....2,357(총회장:한창영)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정통)....2,263(총회장:홍태희)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1,576(총회장:이한석)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1,403(총회장:최복수) *한국기독교장로회....1,448(총회장:박원근) *대한예수교장로회(성내동개혁)....1,019 1000개미만의 교회는 제외
친일 반성 : 1576 친일 부정 : 26006
-------------------------------------------------------------------------------------------------- 장로교의 특징으로 주로 북에서 활동 과거 가장 교인이 많고 세간에 영향력을 행사 하였다. 과거 신사참배와 관련하여 반성하는 쪽과 반성하지 않는쪽이 다퉈 반성하는 쪽이 밀려 비주류를 이루었다 이후 친일행위를 반성하지 않는 쪽이 여로문재로 분열되어있다.
틀린부분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 2. 감리교
① 기원 : 18세기 웨슬레 형제 주도의 영국 국교회 개혁운동에서 시작된 감리교는 옥스퍼드 대학의 ‘신성구락부’ 소모임 조직에서 기원한다. 평신도 운동으로 시작된 감리교는 점차 독자적인 교회로 확립해 나갔으며 1744년 최초로 조직된 연회를 설립하면서 영국교회로부터 분리되었다. 산업혁명 여파로 성장한 감리교는 미국으로 건너가 19세기에 급성장하면서 미국 내에서 침례교와 더불어 양대 교파로 확장된다.
② 유래 : 미국 감리교회의 한국선교는 두 흐름으로 나뉘어 이루어졌다. 미국 북감리교회는 한미수호통상조약(1882년)을 계기로 한국에 진출하면서 선교의 교두보를 마련했다면, 1885년 4월 미국 북감리회의 선교사 아펜젤러 부부가 제물포에 상륙하여 인천 내리감리교회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북감리회는 1897년 서울 구역회를 설치함으로써 교회조직을 시작했다. 1901년 인천을 중심으로 한 서지방회,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지방회, 서울을 중심으로 한 남지방회로 분류되었고, 1908년 정동감리교회에서 ‘한국연회’를 창설했다. 한편 미국 남감리회는 1895년에서야 한국 선교사업이 본격화 했다. 개성?강원북부?원산을 거점으로 활동한 남감리회는 1897년 지방회를 조직하고 1918년에 ‘한국연회’가 성립된다. 미국의 남?북감리교회가 별도의 연회조직을 갖고 각기 치리하다가 1930년에 ‘기독교조선감리회’로 통합하였다.
해방 후 교회의 친일문제로 교단이 ‘재건파’와 ‘부흥파’로 양분되다 1949년에서야 통합된다. 그러나 1954년 교회헌법 수정을 놓고 ‘호헌측’과 ‘총리원측’으로 분열됐다가 1959년 재통합하게 되었고, 1974년 감독선거를 둘러싸고 정치적으로 ‘갱신총회’, ‘연합총회’, ‘중부중립’ 등 3개파로 분열된 후 1978년에 재통합해 현재의 ‘기독교대한감리회’를 형성했다.
③ 특징 : 감리교는 정통 칼빈주의(장로교)와는 달리 인간의 적극적인 책임과 활동을 강조하는 ‘자유의지’(알미니안주의)를 강조하였다. 그 결과 교리주의를 배격하고 경건을 강조하며 개인의 신앙자유를 존중하는 자유주의를 견제한 경건주의 신학성격이 강하다. 한국의 감리교는 정경옥 교수(종교신학)의 영향으로 타교파에 비해 전통문화와 기독교를 접목하는 ‘토착화 신학’(誠의 신학, 풍유신학, 타종교의 신학 등)들이 시도되었다. 한편 감리교의 예배는 설교와 찬송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성결’과 ‘성화’ 정신을 강조하는 등 복음주의적 신앙성향도 강하다. 감리교 정치제도는 ‘감독제’로 감독을 정점으로 운영되는 중앙집권적 성향이 강하다.
④ 교단 : 기독교대한감리회(http://kmc.or.kr), 예수교대한감리회 등이 있다. (2008년) 교회수 : 5913개소
----------------------------------------------------------------------------------------------- 과거 친일문재로 다툼이 일어나 분열 되었다가 다시 합쳐졌다. 하지만 친일파쪽의 승리로 보인다. 이후 종교내 기득권을 두고 다툼이 일어나 몇번의 분열끝에 합쳐지게 되었다. ----------------------------------------------------------------------------------------------
3. 성결교
① 기원 및 유래 : 1907년 동경성서학원을 수료한 김상준, 정빈 등이 서울에 ‘동양선교회 예수교 복음전도관’(경성복음전도관)을 설립 전도하면서 성결교가 시작됐다. 1910년 조선성결교회 첫 총회를 개최하였고 1911년 무교동에 경성 성서학원을 설립했다. 1921년 ‘조선 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명칭을 바꾸면서 정식교단으로 조직됐다. 1943년 해체된 성결교는 해방되자 교회를 재건하고 1948년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로 개칭하였다. 1950년대 후반 한국교회에 몰아친 진보와 보수간의 갈등, 조선기독교연합회(NCC)와 복음동지회(NAE) 가입문제에 대한 대립으로 성결교는 1961년 서울신학교측의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와 성결교신학교측의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로 분열됐다.
③ 특징 : 19세기 미국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영향을 받은 성결교회는 사중복음(중생, 성결, 신유, 재림-기독론적 구원론)과 재림사상(세대주의적 전천년설 경향)을 강조한다. 신학적 경향은 성서주의적 복음주의를 따른다. 성결교는 교회정치구조를 초기 감독제도에서 지방자체제도로 바꾸었다.
④ 교단 : 기독교대한성결교회(www.kehc.org), 예수교대한성결교회(www.sungkyul.org) 등이 있다.
2008년 교회수 : 2149 (52) 2020년까지 3000여교회로 교세확장이 목표
---------------------------------------------------------------------------------------------- 친일로 다툰 흔적이 전혀없다. 친일을 아예 않했거나 아니면 친일을 인정한걸로 보인다. 아니면 친일보다는 신앙생활에 중점을두고 판단했다고 보는게 옳다고 보인다.
재림교리가 천황의 신성을 모독한다는 이유로 해체되었지만 성결교회에서 사부라 불리우는 이명직 목사가 재림교리를 부정하는 발언을 했음.. 성결교회내부에서는 그의 신앙인적 삶은 정직했으며 그의 '친일 행위는 교단을위한 어쩔수없는 행위'로 교단측은 받아들임 성결교회 내에서는 '친일은 신앙생활을위해 어쩔수 없다' 라는게 정론으로 보임
① 기원 : 침례교의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유럽의 재침례파, 네델란드의 메노나이트파, 17세기 영국의 회중교회의 분파인 청교도주의로부터 비롯됐다고 본다. 영국을 중심으로 성장한 침례교는 18세기 대각성운동을 맞이하면서 현재 미국에서 가장 큰 교파로 성장했다.
② 유래 : 한국 침례교회는 1889년 내한한 ‘펜윅’이란 캐나다 독립선교사가 1894년 한국순회선교회를 조직하고, 1896년 원산을 중심으로 침례교 선교사업이 시작됐다. 1906년 충남 강경에서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하고 총회본부를 원산에 두었다. 1921년 ‘동아기독교회’라고 교단명을 바꾸며 성장했으나 1944년 일제에 의해 해체된다. 해방 후 다시 재건된 침례교는 1949년 총회에서 ‘대한기독교침례회’로, 1952년 미국 남침례회의 선교지원을 받으면서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으로 교단명을 바꿨다. 이 과정에서 1959년 교단 분열을 야기시켰고 1968년 ‘한국침례회연맹’으로 통합되었고, 1976년에 지금의 교단명칭인 ‘기독교한국침례회’ 변경되었다.
③ 특징 : 침례교는 타 교파의 세례와는 달리 물 속에 담그는 침례를 하며,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성찬에 있어서 상징설을 지지하며, 성경의 무오성을 지지한다. 침례교의 신학적 경향은 다양한 신학적 성향을 지니고 있지만, 온건한 칼빈주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교단의 교리보다는 개인의 체험적인 신앙을 강조한다.
④ 교단 : 기독교한국침례회(www.kbtus.ac.kr/history/site/site.htm), 대한기독교침례회, 한국성서침례회, 대한선교침례회연합회 등이 있다.
(2008년) 교회수 : 2800여개소로 추정되며 2010년까지 3000 여 교회로 확장을 목표로 매년 100개의 교회를 늘릴 계획이다 ----------------------------------------------------------------------------------------------- 엄청 보수적이다. 독립운동,사회주의 운동 전혀 상관없이 신앙생활에 몰두했다. 과거 신앙적문재로 일제측과 대립 다른 교회와 달리 타협않하고 해체함. 결과적으로 다른교회들이 일제시대때 양적팽창의 기틀을 다진거와 달라 교회수및 신도수도적다 과거 공산당에게 당한이들 거의 침례회로 추측된다. 진짜 보수적 타협 없음 -----------------------------------------------------------------------------------------------
5. 오순절교(순복음, The Pentecostal Church)
① 기원 : 20세기 초 미국에서 일어난 오순절 부흥운동에서 기원했으며, 성결교와 감리교계통에서 분리된 한 분파로 본다. 미국의 오순절계통의 교단을 보면 침례교에 가까운 ‘하나님의 성회’와 감리교에 가까운 ‘그리스도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교회’, ‘오순절성결교회’ 등이 있다.
② 유래 : 1928년 오순절 계통의 미국 선교사 럼지가 내한해 최초의 오순절교회(1933년)를 서빙고에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선교 초기부터 방언하고 기도로써 병을 고치는 것을 강조해 당시 주류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비판받았다. 6.25 직후까지 오순절교회는 8개에 불과했으나, 미국 ‘하나님의 성회’와 관계를 맞으며 성장의 계기를 맞이한다. 1953년에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를 창립 후 빠른 성장을 보였던 오순절계통의 교회는 57년 교리논쟁으로 내분에 휩싸이게 된다. 60년대에 오순절계통의 미국 교단들이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여러 개의 교단을 형성하게 된다.
③ 특징 : 오순절교회는 교리보다는 성령세례와 은사체험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오순절 신학은 인식론적이기보다는 경험적이고, 사변적이기보다는 행동적이며, 분석적이기보다는 실천적이다. 또한 사도와 선지자, 방언하는 자의 계시적 은사를 포함해 성령의 은사들이 오늘날 교회에도 일어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④ 교단 :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http://www.ag.or.kr), 예수교대한하나님의 성회, 기독교한국하나님의 교회, 한국연합오순절교회, 기독교한국성서하나님의 교회 등이 있다. ----------------------------------------------------------------------------------------------- 시간이 없어서 못찾음 ----------------------------------------------------------------------------------------------
6. 구세군(The Salvation Army)
① 기원 : 영국의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부드와 그의 아내 캐더린이 창시한 종교단체로 19세기 영국 산업혁명의 결과로 나타난 빈민들을 위한 전도, 자선 및 사회사업을 목적으로 출발했다. 1865년 런던에 본부를 두고 천막을 치고 전도에 전념했다. ‘기독교 전도회’으로 활동하다가 1878년부터 ‘구세군’이라고 불렸다.
② 유래 : 1908년 10월 호가드 정령 일행이 새문안에 영문을 설치하고 전도하면서 시작됐다. 1909년 구세군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사관 양성을 시작했다. 항상 군인제복을 입고 거리에서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면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전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일제말기에는 신사참배반대와 군복착용으로 인해 박해를 받았다.
③ 특징 : 창설자 부드가 감리교 목사였다는 점에서 신학적 경향은 웨슬레 교파와 비슷하며 중생, 성결, 봉사를 중요시한다. 구세군은 전통적으로 성탄절이 되면 거리에 자선냄비를 걸어 놓고 모금을 하여 그 기금으로 빈민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단체로 알려졌다.
④ 교단 : 구세군대한본영(www.salvationarmy.or.kr) -------------------------------------------------------------------------------------------- 시간이 없어서 못찾음 ---------------------------------------------------------------------------------------------
7. 성공회(The Anglican Church)
① 기원 : 1534년 영국 헨리 8세에 의해 비롯된 성공회는 영국을 중심으로 성장했으며 17세기 호주와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그리고 미국 등 영국의 식민지에 세워지면서 퍼지기 시작했다.
② 유래 : 1885년 11월말 중국에서 선교하던 영국 성공회 선교사 월프가 2명의 중국인 전도자와 함께 부산에 도착하면서 성공회 선교가 시작됐다. 1889년 골페 주교가 조선 교구의 첫 교구장으로 임명받은 후 1890년 인천항에 도착해 서울과 경기도 그리고 충청도 지방에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1926년에는 정동에 동양에서 유일한 로마네스크양식의 주교좌대성당을 건축했다. 현재 대한성공회는 3개 교구(서울, 대전, 부산) 100여 교회, 약 5만명의 신자가 있다.
③ 특징 : 성공회는 선교초기부터 한국문화의 토양에 깊이 뿌리를 내린 교회가 되고자 토착화에 힘썼으며, 한국건축양식으로 지은 성당들이 강화읍, 진천, 청주 등에 남아 있다. 예전에 있어서는 카톨릭에 가깝지만(7가지 성사, 성찬례 등), 신학적 경향은 개혁교회에 가깝다.
④ 교단 : 대한성공회(http://anck.peacenet.or.kr) ---------------------------------------------------------------------------------------------- 시간이 없어서 못찾음 ------------------------------------------------------------------------------------------------
8. 정교회(The Orthodox Church)
① 기원 : 1054년 서방교회와 결별한 동방교회로 초대교회의 예식과 전통을 가지고 있다. 정교회는 동유럽과 비잔틴지역(그리스, 터키, 중동지역)을 배경으로 성장했으며, 현재 전세계적으로 4억명의 교인이 있다.
② 유래 : 한국 선교는 1897년 대한제국 주재 러시아 공사였던 블라노프시키 공사가 러시아 정교회에 선교사 파송을 의뢰하면서 시작됐다. 1903년 러시아 공사관이 있는 정동에 성당을 축성하면서 선교를 본격화했지만, 선교초기(1904년 러일전쟁, 1910년 한일합방 등)부터 일본의 영향으로 선교적 탄압을 받았다. 1917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한국 선교부는 폐쇄되는 등 일제시대에는 위축되었다. 정교회가 한국에서 재기하게 된 것은 6.25사변 직후인 1953년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그리스 군대의 군종신부들에 의해 성당이 재건되었다.
③ 특징 : 성경과 전통(사도들의 구전적 교훈, 세계공의회의 결정, 교부들의 기록과 전례 등)을 동등한 가치와 중요성을 지녔다고 믿는다. 신앙신조는 니케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채택된 신조를 믿는다. 정교회 성당은 대부분 비잔틴 양식에 기초하여 건축되었고, 십자가 형태의 구조물에 둥근 돔이 얹혀 있는 모습을 띄고 있다. 천정의 돔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화와 천사, 성인들의 성화가 그려져 있다. 한편 정교회는 카톨릭과 달리 초기부터 기혼자와 독신자 양쪽 모두 사제와 보제의 직분을 허락하나 주교들에게는 독신을 요구한다.
④ 교단 : 한국정교회(www.orthodox.or.kr)
----------------------------------------------------------------------------------------- 시간이 없어서 못찾음
① 기원 : 16세기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에서 비롯된 개신교회로 독일과 북유럽을 중심으로 전세계적으로 폭넓게 분포되어 있다.
② 유래 및 특징 : 한국에서의 루터교 선교는 1958년에 미국의 미조리 시노드 루터교회에 의해 시작됐으며, 72년 7월 루터교 세계연맹에 가입해 세계 루터교회의 일원이 됐다. 사회선교를 위해 66년 3월 사회사업부를 개설해 구호사업을 벌였고 문서선교를 위해 59년 컨콜디아 출판사를 세웠다. 루터교회는 다른 개신교회들과 외면적으로 약간 색다른 예배의식을 갖고 있으며, 교회력에 따라 예배를 준비하며 예배의식문을 사용한다. 또 하나의 특색은 성찬식을 자주 거행하는 것이다.
③ 교단 : 기독교 한국 루터교회(www.lck.or.kr) ------------------------------------------------------------------------------------------- 시간이 없어서 못찾음 ------------------------------------------------------------------------------------------
10. 복음교회
① 기원 및 유래 : 한국의 자생적 교파인 복음교회는 최태용 목사와 그의 신앙노선을 동조하는 사람들에 의해 1935년 12월 ‘기독교조선복음교회’(현 기독교대한복음교회)로 창립된다.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은 최태용 목사는 한국적 기독교와 영적 기독교를 주장했다. 또한 당시 구미 선교사에서 맹종하는 교회 지도자를 규탄하며, 한국의 교회는 신앙과 경제권에 있어서 한국인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② 특징 : 복음교회는 복음적이고 생명적인 신앙과 신학의 학문성, 조선의 주체적 교회를 표어로 삼았다. 교회사가들은 복음교회에 대해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운동과 달리 반 선교사적 색채가 짙다”고 평가했다.
"우리에게도 부끄러운 과거가 있습니다…(중략)…일본의 강압적인 마수는 1942년에 이르러 초대감독 최태용 목사에게 무거운 죄책의 짐을 지게 하고 말았습니다…(중략)…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더 민족을 사랑하지 못한 죄를 날마다 회개할 따름입니다."
기독교대한복음교회(회장 나명환 목사)가 지난 20일 발표한 '초대감독 최태용 목사 친일행적에 대한 죄책고백문'의 일부이다. 일제시기 각 종교의 친일행적은 많이 드러났지만 교단 차원에서 반성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에서 기독교대한복음교회의 이번 고백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일제강점기 한국교회의 친일부역은 심각한 배교행위"
교계 지도자의 친일행적을 교단 자체에서 공식적으로 고백한 것은 천도교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천도교는 지난해 8월 29일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1차명단'을 발표한 기자회견장에서 최린·이종린 등 교단의 핵심 지도자 및 교단 차원에서 이뤄진 친일행적을 참회하는 글을 발표했다.
기독교대한복음교회는 '고백문'에서 "일제강점기 한국교회에서 이뤄진 친일부역은 심대한 배교행위"라고 규정한 뒤 "우리에게도 부끄러운 과거가 있다"며 최태용 목사의 행적을 고백했다.
최 목사의 대표적인 친일행적 증거로 제시되는 것은 1942년 잡지 <동양지광>(10월호)에 기고한 '조선기독교회의 재출발'이라는 글. <동양지광>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였으나 이후 친일파로 전향한 박희도가 '내선일체와 황도선양'을 내세우며 1939년 창간한 친일잡지다. 박희도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참사 등을 역임한 대표적인 친일 언론인이다.
최 목사는 이 글에서 "조선을 일본에 넘긴 것은 신"이라며 "우리는 신을 섬기듯이 일본 국가를 섬겨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것을 일본국에 바치도록 신에게서 명령받고 있다"며 징병제 참여를 그 예로 제시했다.
이는 당시 일본의 적국이던 미국과 영국 기독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기독교의 일본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비롯된 주장이다.
"'신을 섬기듯 일본 섬기자'고 했던 부끄러운 과거... 가슴 아프지만 고백"
기독교대한복음교회는 지난 16~17일 열린 제 46차 총회에서 이 문제를 논의 안건으로 공식 상정했고 토론 끝에 '친일과거사 죄책고백 특별위원회'를 구성, 최 목사의 친일행적을 고백하는 글을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본래 교단에서는 10여년 전부터 젊은 교인들을 중심으로 이 문제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 표명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나왔으며 이번에 받아들여져 총회에서 공식 결정된 것이다.
특별위원회원인 전진택 목사는 23일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최 목사님의 경우 다른 교단 지도자들처럼 적극적으로 친일행위를 한 것은 아니라는 의견이 총회에서 나왔고 논란이 있었다"며 "그렇지만 그런 글을 남긴 것은 분명한 사실인 만큼 교단 차원에서 고백하고 털고 가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전 목사는 "그렇지만 우리는 교단 차원에서 신사 참배를 결의하거나 한 적은 없다"고 강조했다.
최 목사의 조카인 최홍정 장로도 같은 날 통화에서 "<동양지광>에 쓴 글은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며 최 목사님은 해방 후 일본인들이 두고 간 교회도 접수하지 않았다"고 강조하면서도 "교단 차원에서 과거를 정리하고 가야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져, 개인적으로는 가슴 아프지만 (고백문 발표를) 받아들였다"고 심경을 털어놓았다.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실장은 "기독교대한복음교회는 장로교나 감리교 등에 비해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일제의 우선적인 정책 대상은 아니었다"고 전제한 뒤 "그렇지만 창립자의 친일행적을 교단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올바른 판단이자 의미있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기독교대한복음교회는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은 고 최태용 목사가 서양 선교사 중심의 기성 교단 체계를 비판하며 1935년 '복음적이고 생명적인 신앙, 학문적인 신학, 한국인 자신에 의한 교회'를 표방하고 창립한 교단이다.
다음은 기독교대한복음교회가 발표한 고백문 전문.
교단 창립 70주년을 맞이하여 하나님과 민족과 역사 앞에 엎드려 회개합니다.
지금 우리는 묵은 시대를 엎고 새로운 시대로 갈이 하는 역사의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지나간 시대의 진실을 털어놓고, 정의에 기반한 용서와 화해를 이룬다면 창창한 미래가 우리에게 있을 것을 믿습니다.
일제 강점에 의한 친일 부역과 해방 전후의 극심한 혼돈, 반세기도 넘는 분단과 이념의 갈등 속에서 빚어진 비극의 일단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마냥 덮어두고 잊혀지기만을 기다릴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한국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친일 부역은 단순히 식민지 백성의 비굴한 조아림을 넘어 일왕과 신사를 숭배하고, 대동아공영의 가치를 두둔하며 침략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습니다. 이것은 심대한 배교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부끄러운 과거가 있습니다. 1935년 암울한 식민지하에서 <조선인 자신의 교회>를 높이 외치며 기독교대한복음교회가 창립되었습니다. 교단적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모진 시절을 꿋꿋이 견디면서 민족교회로서의 사명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강압적인 마수는 1942년에 이르러 초대감독 최태용 목사에게 무거운 죄책의 짐을 지게하고 말았습니다.
1) 최태용 목사는 福元唯信이라는 이름으로 창씨를 개명하였습니다. 2) 친일잡지 <동양지광(東洋之光)>1942년 10월호에 일문으로 <조선기독교회의 재출발>이라는 친일논설을 기고하였습니다 3) 젊은 교인들을 강제징용이라는 총알받이에서 구제하기 위해 국민학교 교재용으로 쓰인 모형항공기 제작 공장을 차리게 했고, 총독부는 이를 군수품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어떤 내용도 숨길 것이 없습니다. 있다면, 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더 민족을 사랑하지 못한 죄를 날마다 회개할 따름입니다. 개인의 경건과 내적 만족에 치중하지 않고 하나님의 위엄하신 역사 안에 거하고 발전적인 미래를 선도하는 교회의 사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다시금 각오합니다. 오늘 죄책고백을 드리는 우리의 뜨거운 눈물을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긍휼하심으로 받아주시리라 믿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민족과 역사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교단으로 회복하여, 낮은 곳에서 낮은 자들과 더불어 맑은 생명신앙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이 되겠습니다. 뜨거운 눈물이 있는 진실한 죄책고백 뒤에는 진정어린 용서와 화해, 희망 있는 전진을 기대합니다.
2006년 1월 20일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회 친일과거사 죄책고백 특별위원회 ------------------------------------------------------------------------------------------ 순복음교회와 복음교회는 교단이 틀립니다. --------------------------------------------------------------------------------------------- 잘못된 방향으로 교회 이끈 것, 반성해야
“원로 분들 앞에서 개신교 부일협력을 얘기하다 ‘빨갱이 짓’이라 욕먹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독선에 빠지고 자기반성이 없는 것이 기독교 신뢰를 떨어뜨린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민족, 역사 앞에 회개하는 것이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출처] 친일부역 회개는 교회 신뢰 회복의 길|작성자 윤희용
2008 친일인명사전 수록 명단(모두 4776명, 개신교 58명)이 공개된 가운데,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김승태 목사(한국기독교장로회 세움교회)를 2일,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나 ‘개신교 친일 부역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승태 목사는 “개신교 인물 중 옳다고 생각해서 일제에 협력한 사람은 없다고 본다”며 “교회를 지키기 위해 마지못해 협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러다보니 더 깊이 빠져 들어갔던 것”이라 말했다. 김 목사는 “성서는 다윗과 바세바의 동침, 솔로몬의 우상숭배 등을 기록하며 반면교사로 삼고 있다”며 “친일인명사전 편찬도 정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며, 이를 위해서도 교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 것은 반드시 반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 개신교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하신 분도 계신 반면, 국방헌금을 위해 두 교회를 하나로 합치면서까지 건물을 팔아 헌납한 경우도 있다.”며 “이러한 것은 하나님 앞에 잘못임은 물론 일본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것”이라 지적했다.
그는 이어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되었던 정춘수·박희도 목사와 상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부의장 등을 지냈던 정인과 목사 등을 거론 “독립운동을 하다 변절한 분들을 보면 차라리 은퇴하여 칩거만 했더라도 하는 안타까움이 크다”고 말했다. ‘친일인명사전 수록 명단’ 선정기준에 대해서는 “개인으로 창씨개명을 하거나 신사참배를 한 것은 문제 삼지 않았다”며 “그러나 교단에서 어느 정도 지위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파급효과를 낸 사람들을 포함했다”고 밝혔다. 그는 ‘김활란’의 제자들이 쓴 회고록을 인용, “김활란이 징병유세를 하고 다니다 안질에 걸리자 남의 아들들을 전쟁터에 가게 했으니 죽거나 장님이 되어도 할 수 없다고 했다 한다”며 “잘못인 줄 알면서도 징병유세를 하고 해방 뒤에도 반성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당시 교회를 유지하려면 일제에 협력 안할 수 없었고, 교세만큼 부일협력을 했다고 생각하면 맞다”며 “한국교계(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침례교) 전체가 뜻을 모아 공개 죄책성명을 내고 사과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회,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등은 죄책고백을 별도로 낸 바 있다). 그는 “그들은 일제 식민정책의 희생자이며, 친일부역이라는 흠집이 난 피해자일 수도 있다”며 “그러나 지도자로서 행한 잘못은 잘못됐다고 인정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친일인명사전, 공ㆍ과 함께 정리”
그는 개신교 지도자들이 친일행위를 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근본 원인은 양심과 신앙심 결핍”이며 “일제의 강압정책과 자신의 기득권 유지 욕망, 개인의 위기의식과 나약성, 역사의식과 민족의식 결핍이 결합된 것”으로 봤다. 그는 해방이후 죄책고백을 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도 “자신들도 일제 강압의 피해자로 인식하고 자기 합리화에 급급했고, 죄책고백을 할 경우 기득권 상실과 사회 비난의 두려움이 컸을 것”이라 밝혔다. 그는 “그들의 회고록은 시대분위기를 기록할 뿐 자신의 행위나 태도는 기록조차 남기지 않는 등 부정한 기억을 망각하는 자기방어 심리기제를 엿볼 수 있다”며 “하나님 앞에는 회개했겠지만 교회와 역사, 민족 앞에 잘못을 인정해야 올바른 역사정리가 될 것”이라 말했다. 그는 “이의 신청 중에는 아무 혜택도 못 받고 억지로 한 것이라거나 독립운동을 했다며 기준이나 조사가 잘못됐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며 “그러나 공ㆍ과를 함께 정리하는 것이 친일인명사전의 내용임을 설득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신사 참배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자들이 해방 후 교계의 실세로 남아 기득권을 누렸으며, 일제 당시의 잘못에 대해 어느 누가 고백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출처] 친일부역 회개는 교회 신뢰 회복의 길|작성자 윤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