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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 김성일 2 - 관료생활
게시물ID : history_1117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늙은국삵도
추천 : 4
조회수 : 572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3/08/17 14:51:29
인물의 평가에 있어 중요시되어야 하는 부분이므로 이부분을 기술합니다.
 
학봉이 벼슬살이를 시작한 선조 초기에 이른바 사림파가 조정에 많이 나아갔습니다.
이들은 이른바 훈구파라고 불리던 귀족관료들이 중심이 되어 꾸려가던 정치를 끝내고
새로운 사림세력 중심의 정치질서를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선조가 임금이 되고 젊은
사림들이 조정에 나아가게 되면서 명종시대에 세력을 잡았던 나이 든 구세력은 점차
조정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 구세력들이 물러났다는 것은 바로 그들에 의하여 을사사화(1545년) 때 조정에서
쫓겨났던 전 임금 명종 때의 사림들이 다시 정치의 중심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개혁의 방향을 놓고 젊은 사림들과 나이든 사림들이
서로 맞서게 되었습니다. 젊은 사림들은 과감하게 옛날을 청산하고 새로운 정치를
하자고 주장한 반면, 나이든 사림들은 과거를 청산하는 데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차츰 개혁해 나갈 것을 바랐던 것이죠. 이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점차 젊은 사림들이
주도권을 잡는 쪽으로 정리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뒤로
그들 사이에 또 의견의 대립이 발생하여 사림들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지고 말았습니다.
동인과 서인이 대립하는 정국에서 서인들 편에 있으면서도 동인 서인의 화합을 위해
나름대로 동분서주하던 율곡이 1584년 세상을 떠나면서 동인들이 정치를 이끌어 갔습니다.
그러다가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불리는 기축옥사가 일어나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 옥사는 3년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정여립과 관련이 있다고 지목되어
희생된 사람들은 대부분 동인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지역적으로는 전라도, 경상우도의
인물들이, 학맥으로는 서경덕, 조식의 제자들이 주로 희생되었습니다.
 
그 후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던 중에 1591년 서인들은 다시 조정에서 밀려났습니다.
동인들은 정여립 모반사건에서 동인들을 가혹하게 다루어 많은 희생을 치르게 한
정철의 처벌 문제를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렸습니다. 희생이 컸던 서경덕,
남명학파 사람들은 강력하게 처벌하자고 주장하였고, 상대적으로 희생이 적었던
퇴계학파는 온건하게 대처하려고 하였습니다. 결국 동인은 서경덕, 남명학파가
중심이 된 북인과 퇴계학파의 남인으로 갈라섰습니다. 동인이 남인, 북인으로
갈라서자 조정은 서인, 남인, 북인의 세 당파가 서로 견제하고 서로 균형을 이루면서
이끌어 가게 되었습니다. 이상이 학봉이 1568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후부터
1591년 왜에 통신사로 다녀온 즈음까지 조정의 전반적인 상황입니다.
    
 
1568년 벼슬길에 들어선 학봉은 1593년 전장에서 목숨을 마감할 때까지
상을 당해 복을 입거나 잠시 벼슬에서 물러난 경우를 제외하고 약 25년간의
벼슬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벼슬길에 들어선 그는 그 자신이 지닌 여러 가지
능력과 덕망으로 자연히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문관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일을 시작으로 임금에게 정책을 자문하는 것을 주요 업무로 하는
홍문관에서도 일하였고, 사헌부와 사간원의 벼슬을 거침으로써 이른바
언론을 담당하는 세 기관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조 언론을 담당하는
세 기관은 임금과 다른 권력기관을 언론을 통하여 비판하고 견제하는
기능을 하는 기관이었습니다.
 
한편 학봉은 낭관(郎官)으로도 활동하였습니다. 낭관이란 조선 6조의 5, 6품관인
정랑(正郞), 좌랑(佐郞)을 말하는 것인데 직급은 높지 않으나 인사에 있어 관리
후보자를 추천하는 큰 권한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조와 병조의 낭관은
문, 무관의 인사권을 좌우하였죠. 낭관의 관리 후보자 추천권은 원래 귀족 대신들의
정치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나중에는 그 자체가 하나의 정치권력이
되어 그 자리를 누가 차지하는가 하는 문제로 당파싸움의 빌미가 되기조차 하였죠.
아무튼 학봉은 무관의 인사를 담당하는 병조의 낭관을 여러 차례 거치고, 문관의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의 좌랑과 정랑을 모두 거쳤습니다. 이것은 그의 사람됨을
살피고 헤아리기 위해 매우 눈여겨 볼 만한 일이기도 합니다.
 
1572년 사관으로 있던 학봉은 상소를 올려 노산군(단종)의 묘를 능(陵-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할 것과, 노산군에 충성을 다하다 죽은 사육신의 관직과 작위를 회복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왕이었으되 죽은 지 100년이 넘도록 왕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단종을 왕으로 제대로
대접하자는 것이고, 사육신도 이제는 옛 관직을 돌려주어 명예회복을 시키자는
상소였습니다. 그러나 이 상소는 좀 미묘하고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단종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사육신의 충성과 절개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지만 이를 논의하면 세조의 행위와 세조를 이은 왕조의 정통성, 나아가
현 임금의 정통성에도 흠집이 갈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과감하게 상소로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제왕이 행하는 도리는 결코 바꿀 수 없는 도리가 있고,
또 상황에 맞추어 가는 도리가 있습니다. 바꿀 수 없는
도리는 천하의 기본이 되는 도리요, 상황에 맞추어 가는
도리는 천하를 위한 도리입니다. 천하를 위한 도리가 없으면
그 상황 속에 있는 백성들이 살아가지 못할 것이오,
천하의 기본이 되는 도리가 없으면 영원히 지켜가야 하는
큰 의리가 밝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그 어느 하나라도 버릴 수 없습니다. 세조께서 그 당시
천하를 위한 도리를 행하셨다면 전하께서는 영원히 지켜가야 하는
큰 의리를 드러내어 보이십시오. 세조의 마음이 바로 전하의 마음입니다.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키고 사육신을 처벌한 것이 세조의 사사로운 마음이 아니었으니,
다시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어찌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는 세조와 세조를 임금으로 추대한 세력의 행위를 상황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이해하고, 노산군과 그에 대한 충성과 절개로서 죽음을 택한 사육신
및 사육신의 충절은 역사적으로 정당한 행위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둘 다 옳다’는
이른바 양시론(兩是論)처럼 보이지만 하나는 상황의 논리요, 다른 하나는
절대의 논리이므로 그 비중은 당연히 사육신의 충절에 있습니다. 그는 이른바
의리와 명분으로 역사적 사실을 바라보고자 하는 도학적 입장에 서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것이 논의의 시초가 되어 뒷날 단종은 왕으로 지위가 회복되었고,
사육신은 관작이 회복되었습니다.
 
1572년에 형조좌랑에 올랐습니다. 형조는 법률, 소송 등을 담당하는 관청입니다.
소송이란 예나 지금이나 판결이 쉽지 않아 서로의 주장이 달라서 사실을 판단하고
시비를 가리는 일이 쉽지 않고, 또 거기에 인정이 끼어들고, 때로는 압력이 행사되고
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당시 미루어져서 해결되지 않는 소송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는 밀려있는 수많은 소송을 모두 쉽게 판결하였고 이어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습니다.
사간이란 임금에게 간하는 것을 임무로 삼는 벼슬로 임금을 간하는 일을 맡는 자리이므로
누구보다도 깨끗하게 처신하여 허물이 없어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은 뒷날 대부분
높은 자리에 오르기 마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깨끗한 처신이 한 번 검증된 사람이라고 인정받았기 때문이었죠.
 
하루는 임금과 학문과 정사에 관해 토론하는 자리인 경연에 선조가 조용히 묻기를
“경들은 나를 전대의 제왕에 비하여 어느 임금과 견주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정언 정이주가 요순같은 성군이라 하였고, 학봉은 요순도 될 수도, 걸주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선조가 반문하자 학봉은 신하가 옳게 간하는 말을
거부하는 버릇을 지적하였죠. 이에 발끈한 선조를 보고 서애 유성룡이 앞으로 나아가서
“두 사람이 아뢰는 말이 다 옳습니다. 요순에 비유하는 것은 임금을 그렇게 인도하려는 말이고,
걸주에 비유하는 것은 임금을 경계하는 말이오니, 다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정언은 임금에게 간하는 일을 맡은 이였기 때문에 신하로서 임금의 마음가짐과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고 바르고 바르지 않음을 아뢰는 것은 임금이 신하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받아들여 정치에 반영하는 것이
임금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성왕이 되는 길이죠. 임금이 귀에 솔깃한 말에만 귀를 기울이면
자연스레 바른 말 하는 사람들이 임금을 멀리하게 됩니다. 그러면 언론의 길이 막히게 되고
쉽게 말해 저절로 언론이 통제되는 것입니다. 언론의 길이 막히면 반드시 아첨꾼이 활개를
치기 마련이고 이는 결국 조정은 거짓과 혼란으로 빠져들게 되고 맙니다.
 
임금이 절대 권력을 쥐고 있는 왕조시대에는 임금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느냐,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안정과 백성들 삶의 질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신하들이 해야 할 일은 단순히 임금을 도와 정책을 결정하고 그것을 집행하고 하는
일만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임금이 은혜로운 마음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도록 끊임없이 임금을 교육하며 언론의 길을 열어 임금이 백성과 조정의
실정을 제대로 알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조에서 임금과 신하가 학문과 정책을
토론하는 경연이 바로 임금을 성왕이 되도록 교육하는 기능을 하였으며 상소가
바로 언론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한편 당시에 왕의 친인척을 비롯하여 여러 대신, 심지어 그들의 가솔에 이르기까지
뇌물, 비리 등의 권력형 비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에 학봉은
왕실이 엄격하게 다스려지지 않는 가닭에 왕실 아녀자가 정치에 개입하고,
왕자의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왕실토지로 재물을 늘려 백성을 괴롭히는 일
등이 일어나 아래로 폐습이 내려온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왕실의 일이란 사실
임금 자신이 살고 있는 궁정의 일이고, 임금 가족의 일이므로 임금의 사적인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므로 학봉은 그 점을 지적하여 나라의 안정과 백성의 삶을 돕기 위해 하였습니다.
 
그의 언관으로서의 태도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1583년 사간원 사건 때
사간원 정언 송응형을 구한 일화입니다. 당시 송응형이 이이를 소인이며
나라를 그릇된 방향으로 이끄는 신하라고 탄핵하는 글을 올립니다. 이에
이이는 벼슬에서 물러나고 반대로 김우옹(동인)은 송응형이 잘못했다고
규탄하는 상소를 올려 송응형도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학봉(동인)은 이에 대해 임금에게 언관은 공론을 전달할 의무가 있고 송응형은
언관으로서 해야할 일을 했다하여 두둔하였습니다.
쉽게 말해 서인을 탄핵한 사림를 동인이 다시 탄핵하니,
같은 동인에 속하는 사림을 변무한 것이죠.
 
다시말해 학봉을 당파적 성향으로 규정하기에는 어렵다고 할 수 있고
서인이었지만 조정에서 당파를 없애고자 노력한 율곡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1588년 한 해 남짓 고향에서 퇴계 문집을 교정하는 등의 일을 하며 지내던 그는
다시 조정으로 돌아옵니다. 당시에는 사림들의 의론이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각각 의견을 달리하고 있었는데 학봉이 조정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그가 오면 과연 어떤 의견을 따를 것인가 분분하였습니다. 그는 조정에 이르러
“자기와 견해가 다르다고 하여 반드시 다 소인이라고 할 수 없고 자기와 견해가 같다고 하여
어찌 다 군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어진자만을 등용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버리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학봉은 세 차례에 걸쳐 지방에 나가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살펴볼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1579년 42세 때 그는 함경도 순무어사의 며을 받고 변방의
방비태세를 점검하고 백성의 실정을 살폈다. 황초령 길주, 명천, 경원, 종성,
온성을 돌아보고, 아오지까지 북상하면서 변방의 군졸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아울러 변방 오랑캐 추장을 부럴 위로하기도 하였는데 이 때 변방을 돌며 보고
들은 것을 적은 일기가 북정일록(北征日錄)입니다.
 
1583년에는 황해도 순무어사가 되어 해주를 중심으로 여러 고을을 순찰하며
관리들의 행태와 민정을 살폈습니다. 1588년에는 51세에 경기도 추쇄경차관
명을 받고 백성의 실정을 살폈습니다. 그가 경차관이 된 이유는 나라에서
남쪽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백성들을 북쪽 빈 땅으로 옮겨 살게 하였는데,
이 때 견디지 못하고 도망해 오는 자가 많았고, 한 사람이 도망해 오면 그 일족과
이웃 사람까지 연좌로 처벌해 민심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 업무를
전체적으로 바꾸고 새롭게 하여 아전들의 부정한 장난질을 없애니,
비로소 백성들이 마음을 놓았다고 합니다.
그는 세 번에 걸친 백성의 실정을 살피는 과정에서 느낀 감상을 시로써 수없이
그려 내었으며 그 결과를 장계와 상소의 형태로 임금에게 보고하였습니다.
당시 백성들이 가장 괴롭게 느끼는 것은 두 가지 였는데 하나는 지나치게
많은 부역과 세금이오, 다른 하나는 흐트러진 병적관리와 군사행정의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함경도 순무어사로 활동하면서 지은 시로 추정되는 적병행(籍兵行)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적병행
 
조정에서 난리 전에 미리 대비하느라고
어사들이 동쪽 남쪽 사방으로 나가누나
왕신이 호령 함엔 위엄 세움 중하거니
중임 맡아 어느 틈에 백성 참상 슬퍼하랴
먼저 매를 가지고서 여러 고을 닦달하니
각 고을들 덜덜떨며 풍문 듣고 놀라서는
병자 머슴 모두 뽑아 목전 급함 때우고서
어린애도 모두 뽑아 항오에다 채운 탓에
삼년 동안 분주하게 병적 작성하였건만
개와 닭도 사이에 낀 헛장부가 되었다네
 
항오중에 태반은 이름만이 있는 자라
병영에는 파리한 군사들만 남았는데
이들마저 채수의 결태질에 시달려서
창에 기대 궁리해도 살아갈 길 없는 탓에
잇달아서 도망침에 마을마다 텅텅 비어
밭은 풀이 뒤덮인 채 경작하는 사람없네
군문에선 정한 숫자 채우라고 채근하며
문서 매일 보내어서 바꿀 병사 재촉하네
한 장정이 떨돌면 구족이 다 시달려서
궁벽진 시골마다 원통하다 울부짖네
외적이 오기 전에 나라 근본 기울어져
천리토록 어수선해 병화 겪은 것만 같네
 
내 듣건대 맹자가 제량에서 유세할 때
다스림은 민정 뒤져 모으는데 있지 않고
부역 조세 가볍게 해 백성 부유하게 한 뒤
효제충신 백성들의 정을 인해 닦게 하면
임금 어른 잘 섬겨서 국세 절로 강성해져
강대국도 채찍으로 매질할 수 있다 했네
그런데 왜 구구하게 군사들을 점고하여
부질없이 백성들을 지치게 한단 말인가
 
 
또한 그는 황해도 순무의 결과를 7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상소하였는데,
 다섯 항목이 군사와 병역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부세 병역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 책임을 가족이나 이웃에 떠넘기는 일로 해서
도망가는 가구가 수없이 발생하여 마을이 비고 농경지에 잡초만 우거져 있다.
그런데 아전들은 뇌물을 받고 세금과 병역 문제를 제멋대로 처리한다.
 
2. 병적에 포함될 사람이 부족하자 제 나이에 5, 6세를 보태어 병적에 편입시킨다.
병역을 면제하거나 제대를 시키는 일을 공정하지 않게 처리하여 60세를 넘기고도
병적에 편입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심한 병이 들어 병역을 면제받는 사람은
감사가 몸소 심사하여 정할 것을 건의한다.
 
3. 병사가 겪고 있는 고통의 실상은 참혹하다. 병역의 불법적이고 변칙적인 운영이 자행된다.
수자리 대신에 물품으로 납부하느라 파산한다.
 
4. 황해도가 군사 전략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어 벙비가 허술하다.
그렇게 허술하게 방비하므로 왜구 등 해적이 출몰한다. 병사의 병역 이외의 부담을 줄이고,
훈련과 방어에만 전념하도록 하자. 군대의 장수로 하여금 훈련을 철저히 감독하게 하여
훈련성적 불량자는 벌을 주자.
 
5. 병적을 편성할 적에 수령이 자기능력을 과시하려고 실제 복무능력이 없는 머슴,
걸인 등을 병적에 포함시키고 이를 병조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쓸데없는 군사 예산이
늘어났고 이는 결국 본인이 감당 못하면 가족 이웃에게 책임을 묻는 일이 늘어가는
부작용을 낳는 실정이다. 그 결과 병사와 백성에게 심각히 해를 끼친다.
 
 
이를 종합해보면 병역 문제나 군사 행정 또한 백성의 삶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학봉은 백서으이 삶이 보장되지 못할 때 군사 행정 및 군사 운용에 심각한 해를 끼치며
결국 나라를 방비하는 일마저도 망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군대의 방비 능력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앞서서 해야 할 일은 병사들의 원천이 되는
백성들의 삶을 넉넉하게 해야 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가 이처럼 매우 자세하게 군사 행정과 병역의 문제, 백성들 삶의 실정을 살피고
정확하게 그 실태를 파악한 것은 백성에 대해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함경도 순무어사로 활동하면서 변방의 방비 태세 등을 점검한 일이 있었고,
또 병조에 근무하면서 군사에 관한 지식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모여
나라의 병역과 군사 행정에 관한 정확한 견해를 제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왜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1591년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여러 차례 임금에게 소를 올렸습니다. 그 대부분의 내용은, 모두 당시 말할 수 없이
고단한 백성의 삶과 흐트러진 병역의 문제였습니다. 그는 두 문제에 대하여
조목조목 그 실상과 폐단의 근본원인을 제시하고 그것을 해결할 방안 또한 제시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위의 병적행에 보이는 것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는 외적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먼저 과감하게 내정을 개혁하여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가 보이게 현실적으로 가장 급한 문제는 성을 쌓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백성을 동원하여 성을 쌓는 일에 대하야 부정적인 견해를 밝힙니다.
성을 쌓고 못을 파서 적의 침략에 대해 방비한다고 여러 해 동안 봄부터 겨울까지
사시사철 백성을 동원하여 공사를 하니 남자들은 농사지을 시간이 없고,
여자들은 길쌈을 할 여지가 없으니 굶주리고 헐벗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백성의 삶의 기반을 망쳐서 그렇지 않아도 세금과 병역 때문에 지쳐 있는
각 지방의 마을을 비게 만들어 그렇게 되면 백성의 마음이 떠나게 되어
외적이 오기도 전에 이미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왜적이 침입해오자 적을 만나기도 전에 백성은 물론이거니와 백성없이
성을 지킬 수 없어 달아난 관리들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이를 방증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어 임난시에 학봉의 활동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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