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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 김성일 3 - 통신사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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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늙은국삵도
추천 : 10
조회수 : 951회
댓글수 : 16개
등록시간 : 2013/08/17 17:58:35
서서히 정체성론에 입각한 당파성론이 고개를 드는 게 보이기도 하네요.
학봉의 생전 붕당은 이미 간략하게 말한 듯 하네요.
앞의 두 글과 이어서 보시면 되겠습니다.
 
당시 조선 조정을 비롯하여 지배층의 왜에 대한 생각은 대체로 긍정적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역사적으로나 당시에 있어서나 왜구의 잦은 침입에 따른 피해 때문이었습니다.
조선 초기에 밖으로부터 오는 가장 큰 위협은 북쪽 국경 지방을 침입하는 여진과
남서 해안으로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 문제였습니다. 여진을 억제하기 위하여
세종 대에는 김종서를 보내 육진을 개척하여 북쪽 국경지방의 방비를 튼튼히 하였고,
세종은 또 왜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종무를 시켜 대마도를 정벌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조선은 초기부터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는 왜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외교활동을 벌여 왜구를 막으려고도 하였습니다.
조선은 일본에 여러 차례 통신사를 보내서 일본의 실정을 살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 통신사들의 보고를 통하여 조선 조정은 일본의 권력구조와 일본에 있어서 대마도의 위상,
일본과의 무역을 위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조선에 오고 가는 일본 사람들이 어떤 지위에 있는지,
어떤 입장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아내서 그들을 적절하게 대할 수 있었습니다.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일이 있는 신숙주는 『해동제국기』에서
“일본은 습성이 사납고 검술과 항해에 익숙하며 우리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그들을 도리대로 잘 어루만져주면 그들도 예의를 갖추어 조공을 바칠 것이오,
그들을 대하는 것이 도리에 벗어나게 되면 함부로 침략을 할 것”이라고 경계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충돌이 없는 평화시대라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며,
그들을 대할 때에는 중한 일과 가벼운 일을 따지고 그들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넉넉하게 하기도 하고
좀 까다롭게 하기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그러면서도 “우선 중요한 것은
외적을 쳐서 물리치는 일이 아니라 나라 안의 정치를 잘하여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나라가 선지 얼마 되지 않은 실정을 잘 헤아려 나라의 체통과 명분보다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나라의 기틀을 튼튼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까 하는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종 이후 조선이 주로 접촉한 것은 일본 본토보다는
일본에 속해있으면서도 우리나라와 매우 가까웠던 대마도였습니다.
일본은 당시로서는 너무 먼 거리에 있었던 것이죠.
대마도는 우리나라를 오가며 괴롭히는 왜구의 중요한 기지이기도 하였습니다.
대마도는 대마도대로 일본 본토와 조선 사이에서 어떤 때는 일본에 조선의 정보를 전해주고,
때로는 조선에 일본과 왜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등 줄타기를 하며 자신들의 생존과 이익을 꾀하였습니다.
조선 조정도 이미 그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이용하여 왜구를 막아보려고도 노력하였습니다.
조선 초기 삼포를 개항한 것도 그들의 무역을 모르는 체하여 왜구의 침입을 막아보려고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삼포에 거주하는 왜인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그에 따라 조선에서는 그들을 통제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1510년에 일어난 삼포왜란은 삼포에 거주하고 있던 왜인들이 조선이 좀 까다롭게 그들을 통제하자
그에 불만을 품고 관청을 습격한 것이었습니다. 그 뒤에도 1544년에 사량진왜변,
1555년에 을묘왜변이 일어나 조선의 왜구에 대한 감정은 극도로 나빠졌고
드디어 대마도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맙니다.
 
중종 명종대에 걸쳐 대마도와의 관계회복에 대한 조정의 논의는
교역을 금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이 우세했다. 다수의 신하들은
왜인들은 오직 이익만을 탐하는 악한 무리이므로 그들과 관계를 끊어 나라의 위엄을 지키고
더 이상의 피해를 미리 막아야 한다는 논리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수이지만 온건한 신하들은 애초에 교역을 끊어버린 것은 영영 그러려는 것이 아니므로
그들이 간청할 때 허용해주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1544년 퇴계는 ‘일본의 사신을 물리치지 말 것을 바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죠.
 
 
왜인을 모두 오랑캐요 짐승같은 자들이라 하지만 이들을 짐승과 같이 대우하면
 짐승과 같은 본성이 나오고, 오랑캐로 대접해주면 작디 분수에 편안해 할 것입니다.
오랑캐를 대하는 방법은 오는 자는 막지 말고 가는 자는 붙잡지 않는 것입니다.
즉 다스리지 않는 것처럼 다스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으로
그들이 평화와 화해를 원하면 들어주어 그들이 잘못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순임금이 오랑캐인 묘족을 다스리던 방법으로, 조선의 의리와 이익에도 알맞을 것입니다.
 
 
이런 퇴계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신숙주가 『해동제국기』에서 밝힌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에도 강경론이 우세하여 교역을 허락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유학적 사고에서 보면, 오랑캐 무리를 대하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불쌍히 여겨 보살펴 주어야 하는 대상으로 보고 너그럽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르침의 대상으로 예의로써 가르치고 깨우쳐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퇴계는 전자의 경우, 학봉은 후자, 즉 그들을 교화의 대상,
가르쳐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 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강경한 입장은 짐승과 같은 오랑캐라는 선조대까지 변화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일본은 예의가 없는 미개한 오랑캐라고 생각하였던 것이지요.
 
일본은 15세기 후반에 이미 무로마치막부가 무너지고 봉건영주가 나라를 나누어 지배하는
전국시대에 접어들었고 혼란을 거듭하다 1573년 오다노부나가가 패권을 장악,
1582년 그의 부장인 도요토미히데요시가 권력을 이어받습니다.
1590년에는 무력으로 전국을 통일하는데 그간의 약 30년간 조선은 대마도와의
교역 관계가 끊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일본의 국내사정을 거의 모르고 있었던 것이죠.
좀 더 정확하게는 조선조정은 일본의 사정을 애써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표현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도요토미는 일본통일 전인 1586년에 이미 조선을 침략하겠다는 ‘고려출병’의 뜻을
 대마도주 소요시시게에게 알린 바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듬해엔 조선국왕이 일본에 와서
신하로서의 예를 취하라는 요구도 하기에 이릅니다. 이에 대마도에서는 거짓 일본사신을 보내
통신사를 파견해줄 것을 조선조정에 요청합니다. 조선조정에서는 이러한 통신사 요청을 거부합니다.
1589년에 도요토미는 다시 조선국왕을 신하로서의 예를 취하라고 대마도주에게 전달합니다.
소요시시게가 죽은 뒤라 그의 양자인 소요시토시는 재차 거짓으로 꾸민 일본사신을 조선에 파견합니다.
 
대마도는 조선국왕이 일본에 와서 신하로서의 예를 취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다는 것과,
그대로 내버려두어 도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함으로 인해 손실되는 교역권과
도요토미의 조선침략의 뒷바라지에 엄청난 힘을 소모해야 할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 두 나라를 속이는 ‘속임수 외교’를 감행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통신사에 대한 파견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였지만,
마침내 일본이 사신을 보낸(대마도의 거짓 사신임을 모른채) 것에 대한 답례의 형식으로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속뜻을 알아보자는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그런데 곧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 모든 것이 이에 집중되었고 통신사로 갈 사람들을
뽑지 못하다가 11월 중순이 넘어서야 비로소 통신사 일행을 가려 뽑게 되었습니다.
 
사실 도요토미는 조선을 일본의 영향 아래에 있는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국왕에게 일본에 와서 신하로서의 예를 취하라고 요구하였던 것이죠.
그에 반해 앞에서 말한 대로 조선은 일본을 해외의 미개한 나라로 업신여기고 있었습니다.
특히 도요토미는 그들의 왕을 죽인 역적으로 보고 그의 사신을 접대하는 것조차 꺼리는 형편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국가운영이데올로기는 성리학이었고 그러한 이념적 기반에 의한
일본은 힘으로 억제하고 그 다음 가르침을 베풀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힘으로 누르기에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그의 중간적 위치인 대마도에 대해서만
그러한 정책적 기조를 유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왕조는 그들의 노략질과 침략을 막기 위해
그들을 구슬리는 방안으로 어느 정도 무역을 허용하여 살아갈 거리를 만들어 주는 수준에서 대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비단 일본에만 해당하는 내용이 아니라 여진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현실 상황과 힘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죠.
일본의 현재 정세가 어떠한 지가 문제가 아니라 단지 왜구가 침략만 하지 않으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지 않았죠. 그들의 국가 통치이념은 조선의 그것과 다른 것이었고,
당시의 외교개념 또한 조선 조정의 그것과는 완벽한 괴리가 있던 상태였습니다.
 
이와같은 조선 조정의 분위기에 따라 학봉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 정도의 수준에서 일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직접만나본 대마도주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속임수로 보낸 일본의 거짓 사신의 모습에서
일본이 예의의 나라인 조선을 공경하는 것으로 오해했고 그것은 대마도에서 거짓 사신으로든 어떻든
조선조정의 마음에 들어 그들이 원하는 바를 얻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학봉은 예빈시 정으로 있으면서 업무상 일본 사신과 접촉한 그 인연으로 해서
통신사 부사로 발탁되어 정사 황윤길, 서장관 허성 등과 함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590년 3월에 출발하여 이듬해 2월까지 1년여에 걸쳐 사신으로서 일본을 겪고 돌아오게 됩니다.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1479년에 통신사 이형원을 파견하였다가,
일본 내의 사정과 대마도에서 얻은 병 때문에 임무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온 이후
110년 만에 처음 있는 통신사였습니다. 1491년과 1535년에 통신사를 보내달라는 요청이 있었으나
조선의 조정은 많은 논란 끝에 보내지 않았었구요.
통신사 자체만으로도 당시의 조선 안의 복잡한 사정이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꾸준히 계속되는 중소규모의 왜구의 노략질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해안가를 중심으로
말로 할 수 없이 황폐화시켰고 북쪽으로는 여진이 자주 변경지방을 노략질했으며 조정안에서는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동인을 중심으로 많은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는 등 내우외환의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왜구의 노략질을 해결하고자 통신사를 파견하기는 하였으나
이는 도요토미의 ‘조선이 일본의 신하가 되라’는 요구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죠.
 
그런데 이번 통신사절은 순전히 대마도 측의 속임수에 따라
거짓으로 꾸민 가짜 일본국왕 사신의 요청에 의하여 이뤄진 것이었으므로
사신단과 도요토미의 생각과 태도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봉은 사신으로서 예의를 지키는 모습을 잃지 않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절차와 규범에 따라 하고자 하였습니다.
조선정부는 일본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영접하는 관원인 선위사를 임명하여
부산까지 가서영접하는 정중한 예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쪽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마도주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도요토미는 조선이 사신을 보내
신하로서 예를 취하겠다는 사실을 전하러 온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때 정사 황윤길과 학봉의 의견이 갈립니다. 정사 황윤길은 선위사를 기다릴 필요 없이 일본 본토로 가자하고,
학봉을 선위사를 기다려야 한다며 반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학봉의 강경한 태도에
대마도주 소요시토시는 고니시유키나가를 거짓 선위사로 꾸며 대마도 근처의 이끼섬까지 오게 하였습니다.
 이 역시 대마도의 속임수였으나 사신 일행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죠.
 
대마도에서 있었던 연희 때에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사신이 대마도에 있을 때 두 번의 연희가 있었는데
한번은 대마도주가 말을 타고 바로 사신이 있는 장만 앞에 와서 내렸고,
한번은 가마를 탄 채 문을 들어와 뜰 아래서 내리는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학봉은 무례함에 격분하여 정사에게 퇴장할 것을 권하였으나 황윤길은 이를 거부,
서장관 허상만이 따라 일어섰습니다. 그는 즉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이때 대마도주는 가마꾼의 머리를 베어 사죄를 표했고
학봉은 중요한 것은 사신으로서의 체통을 지켜 나라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막부에 도착한 뒤에는 도요토미에게 국서(國書)를 전달해야 했는데
도요토미가 자꾸 그 일을 미루어 마냥 기다리는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개월을 기다리다 지친 황윤길은 도요토미의 측근에
예물을 주어 편법으로라도 빨리 임무를 마치려고 하였으나
학봉은 임금의 국서도 전하지 못한 상황에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라 하여 시행을 막았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은 또 있었습니다.
사신을 대접하는 직책을 맡은 소가 두 번이나 우리 악단을 빌려주기를 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악단을 도요토미에게 선보이고자 한다는 것을 안 학봉은
이번에 우리가 일본에 사신으로 온 것은 우리가 필요해서 온 것이 아니고,
그들의 정성에 답하여 예의를 차리려는 데 불과하니 어찌 우리가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나라의 체통을 잃게 하느냐 하며 반대하였습니다.
그는 “왕명을 받은 신하가 외국에 사신으로 가서 왕명을 전하지도 못하고
기생처럼 노래를 팔아 사람을 기쁘게 한다면 어찌 나라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조선의 사신들은 도요토미를 접견하게 되었습니다.
서장관 허성은 신하가 임금을 뵙는 예절에 따라 ‘뜰아래에서 예를 표하자’고 하였고
학봉은 도요토미는 일본의 왕이 아니므로 일본에서 관백에게 절하는 관례에 따라
‘마루에 올라 예를 표하자’고 주장하여 자신의 주장대로 하게 하였습니다.
실제 도요토미는 스스로 관백에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습니다.
 
접견이 끝난 뒤 도요토미는 조선의 사신들에게 백리 밖에 떨어진 포구에 가서
답서를 기다리라 하여 학봉은 반대하였으나 정사와 서장관이 미리 출발하여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도요토미가 보낸 답서는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받은 국서에는 조선 임금을 신하로 취급하는 ‘각하(閣下)’, ‘방물(方物)’이라는 용어가 있었고
게다가 ‘우리는 명나라를 칠 것이다. 조선이 앞장서서 일본의 신하가 되라’는 내용도 담고 있었습니다.
학봉의 격렬히 반대하여 ‘전하(殿下)’와 ‘예폐(禮幣)’로 이를 고치기는 하였으나 나머지 글귀는
일본의 거부로 결국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정사 황윤길은 “일본은 오랑캐이므로
그들과 자잘한 예를 가지고 다투다가는 얻는 것은 작고 잃는 것은 클 것이라”고 하면서
학봉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고, 서장관 허성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신단 그 누구도 일본의 정치상황이나 대마도의 속임수 때문에
이번 통신사절의 성격에 대한 조선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 전혀 다른 이해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오자마자 정사 황윤길은 정식으로 임금에게 보고 하기 전에
급히 임시보고서를 임금에게 올려 “일본이 반드시 침략해올 것입니다”고 아뢰었습니다.
임금 앞에서 정식으로 보고하는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서장관 허성도 같은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학봉은 “반드시 그러하리라는 정황은 보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고 이어
“인심이 흔들리게 하니 이는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방법이 아닙니다”라고 상반된 보고를 하였습니다.
 
『당후일기』에는 이항복이 선조임금의 질문에 “신묘년(1591) 봄에 신이 승지로 있으면서
김성일을 보고 일본의 일에 대해 물어보니 김성일은 도리어 깊이 걱정하면서도 단지
‘남방을 방어하는 일로 민심을 소란하게 하여 왜적이 이르기 전에 먼저 나라가 무너지게 생겼으므로
그렇게 말하여 민심을 진정시키고자 한 것뿐이었습니다’라 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한 구절이 나옵니다.
또한 유성룡은 임진왜란과 그 전후 사정을 기록한 『징비록』에서 김성일이 임금에게 보고를 마치고 나올 때
“‘그대 말씀이 황윤길과 다르니 만약 병화가 있으면 어찌하겠는가?’라고 물었더니 김성일이
‘나인들 왜가 장차 침략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다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지나쳐
온 나라의 백성들이 극도의 혼란에 빠졌기에 내가 본대로 의혹을 풀어 준 것뿐일세’라고 대답하였다.”
라 적었습니다. 학봉은 백성의 흐트러지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수습하는 것이 성을 쌓는 일보다
더 우선이라고 본 것이죠.
 
사실 1590년 일본에 갔던 조선통신사의 정사, 부사, 서장관의 세 사람의 사신 가운데
일본의 군사력을 살폈거나 또 일본의 국내정보를 수집했다는 기록은 조선과 일본
어느 쪽의 역사기록에도 없습니다. 조선의 사신은 일본에 머무르는 7개월간
늘 일본 측이 지정한 숙소에 머물렀을 뿐이었죠. 다시말해 세 사람의 보고 내용은
적은 정보와 얻어 들은 말에 자신의 생각을 보태어 말한 것에 불과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학봉은 원래 해당 부서에서 무관출신의 인물을 추천하였음에도 선조의 특별한(?) 명령으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습니다. 문관출신이 장수로 임명된 매우 보기 드문 일이었지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지로 향해 가고 있는 도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가 병마절도사에 임명된 것이 4월 11일, 왜적이 침략한 것은 4월 13일이었습니다.
학봉은 바로 경상우병영이 있는 창원으로 달려갔고 창원 근처에서 정찰나온 왜적을 만나 그들을 사살합니다.
이런 급박한 사항을 조정에 알리면서 “목숨을 바쳐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4월 17일 선조는 의금부도사를 시켜 학봉을 잡아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학봉의 보고로 인해 인심을 풀어지게 하고 나라의 일을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이후 전장에 관한 사항 및 활동 등을 차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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