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하면 늘 떠오르는 작전이며
우리나라가 불리했던 전세를 한번에 역전시킨 작전이 있으니
바로 인천상륙 작전임
우리나라 보수에서 늘 칭송하는
맥아더장군의 작품으로
맥아더 하면 인천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하면 당연히 맥아더장군이 떠오르면서
인천월미도에는 맥아더장군 동상도 있다고 들었음
왜 인천상륙작전 하면 맥아더가 되느냐 하면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이었기도 했지만
딩시 대부분의 미군 지휘부 장교들이 반대한 인천상륙작전을 결행해서 성공시켰기 때문임
당시 중국이나 북한도 유엔군이 상륙작전을 벌일거라고 생각했고
그 대상지의 1순위는 군산 아니면 원산.평택으로 상륙작전 가능성을 높게 보며
인천도 생각은 하고 있었음
연합군 지휘부나 중국이나 북한이 인천을 처음 염두에 두지 않은 이유는
인천은 한국에서 조수간만에 차이가 2번째로 높음
조수간만에 차이가 높다는 말은
상륙작전시 병력이 밀물때만 작전이 가능한데 이 가능 시간이 대충 8-9시간 이었음
썰물이 되면 장비나 인원의 이동이 불가능해지고 보급물자 하역은 말할수도 없게 됨
2차대전을 치뤄낸 미국이나 소련은 경험상 전쟁때 가장 중요한걸 배웠는데 그건
보급 보급 보급 보급
백번 천번말해도 보급임
중국 위.촉.오 삼국지에서부터 무수히 나오는게 보급에 관한 이야기인데
당시 인천상륙작전 당시 동원된 10군단은 미해병1사단.한국해병 1연대.미7사단.한국군 17연대
대충 이정도의 병력과 장비가 동원되었음
지휘부가 반대한건 이 병력만의 보급이 아니였음
당시 미8군 사령관인 월튼 해리스 워커 장군 (맥아더가 한국전쟁내내 한국에 머문건 일주일 정도라고 함)
실직적으로 인천상륙작전전에는 한반도에서 실질적인 총사력관이었음
보통 워커불독으로 많이 불렸던 워커장군은 인천이 아닌 군산으로 상륙작전 하기를 원했음
지금과 달리 당시 서울에서 부산간은 도로가 있는게 아닌 철도선 하나만이 보급선이었음
임진왜란때 왜구가 부산에서 육로로 가다보니 보급에 애먹었듯이
미10군단이 인천으로 상륙하면 부산에서 치고 올라가야할 미8군은 보급을 임진왜란때와 같은
방식으로 해야 할 상황에 처해지고
보급이 원할하지 않으면 빠른 진격이 힘들어 지게 되며
군산에 상륙시 미10군단과 미8군의 보급이 다 가능하다고 편제 조율만 잘하면 반격에 무리가 없다고 봤음
다만 군산에 상륙시 북한군 포위가 힘들어진다고 반대가 있었음
맥아더의 주장은 인천이 상륙하기 힘든 장소라서 적들도 방어가 소홀하고
인천으로 상륙하면 수도 서울까지 거리도 가까워 빠른 수복이 가능하고
부산방어선에 북한군 주력의 퇴로도 끊기 쉬우니 인천으로 밀어 부침
인천 상륙작전은 성공했음
당시 북한군은 부산에 주력을 밀어 넣어서 서해안은 병력이 대부분 없었고
군산과 원산에 기뢰가 깔리는 정도 였음
인천상륙작전성공으로 북한군은 빠르게 후퇴하거나 산으로 숨고
10군단은 서울을 수복함
문제는
여기서부터 일어남
미8군사령관 워커장군은 인천에 상륙한 미10군단의 지휘권을 미8군하에 두기를 원함
그래서 미10군단 병력은 서해를 따라 평양.신의주쪽으로 진격시키고
미8군 휘하에 미1군단을 동해쪽으로 보내 원산 함흥쪽을 계획했음
그러나
우리의 맥아더장군은 미10군단의 군단장 앨맨드에게 따로 독자적인 지휘권을 주고
원산으로 공격 하게함
원산????
인천.서울에 있던 미10군단을 반대편인 원산으로 공격 어떻게 하냐면(위에 지도를 참조)
상륙작전임
인천상륙작전에 명성을 얻은 맥아더가 이번에는 원산상륙작전을 시도함
그래서 서울과 평양,원산 사이에 적군을 포위할 생각을 하는데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 되는데
인천.서울에 집결한 미10군단은 거기서 위로 바로 쳐들어가면 되는데
이 병력이 다시 인천에서 배를 타고 서해를 지나 동해로 가서 원산으로 상륙해야 했음
에 휴.....................
처음 인천에 상륙하기 힘들한 이유가 조수간만에 차이로 보급이 힘들다고 했는데
인천은 물자하역이 하루에 8-9시간 가능했음
보급에 능한 미군도 당시 물자하역능력은 10군단만 보급하기도 빠듯했는데
미10군단 병력이 다시 다 배를 타야 했고 병력만 타면 좋지만
각종 중장비 보급물품 원산상륙작전에 필요한거 다 실어야 했고
그게 힘들어져서 결국 일부 병력은 부산항에서 탑승해야 했음
이게 정말 지 랄 이었음
안그래도 인천항은 물자보급해주기도 모자란데
다시 병력과 물자를 실어 내보낸다는건 사실 이해가 안되는거였음
이러니 힘들게 올라오는 미8군도 보급받기가 더 힘들어지는 상황이 됨
이 모든 상황은 맥아더의 원산상륙작전을 위한 난리법석 이었음
하여간 난리를 치뤄 원산으로 상륙작전을 하러 가지만
원산에는 북한군이 기뢰를 깔았고 이 기뢰로 일부 함정이 피해를 입으니
미군은 부랴부랴 기뢰제거를 했는데
당시 일본해군이 기뢰를 제거하는 소해함을 많이 보유했기에
맥아더 명령으로
2차대전 당시 일본이 원산에 깔아둔 기뢰를 알아서 제거하라고 했고(공문은 이런식이었음)
이런 방식으로
일본이 비공식적으로 기뢰제거를 목적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고 생각함 (주관적인 생각이며 다른이들은 그냥 개입이라고 말함)
이렇게 기뢰를 다 제거 하는 동안은 미10군단은 동해 바다에서 배멀미 하면서 대기했고
원산상륙은 1950년 10월 25일에 상륙했지만
북한군은 예전에 다 가버렸고
한국군1군단이 먼저 보름전에 공격해서 원산을 점령했으니
미10군단이라는 대단한 병력이 20여일을 바다에서 오가느라 놀고 있었음
맥아더는 늘 인천상륙작전을 말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말하고 다녔지만
원산상륙작전은 언급을 회피했고 우리나라 정부도 당시 맥아더 치켜세우느라
원산은 그런 작전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게 유야뮤야 넘어감
원산상륙작전을 위해서 맥아더는 한반도의 부대체계를 워커장군의 미8군과 앨맨드의 미10군단으로 나뉘었는데
각각의 독립된 지휘권으로 분리시켜 버렸고 미10군단은 힌국군 1군단을 지휘했는대
미10군단은 미8군급의 권위가 부여되었는데 다른 전쟁사에 잘 없는 일이었음
38선을 넘어 평양을 지나면서 생기는 문제가
평양을 넘어서면 다 아시다시피 땅이 넓어지고 그래서 작전지역이 2배이상 늘어남
각각 분리된 지휘권을 가지다 보니 미8군과 미10군단의 유기적인 협조가 힘들어졌고
미8군과 미10군단이 경쟁을 벌이면서 압록강으로 진군하는 문제가 생김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맥아더가 이런 경쟁을 유도 했다고 생각함
중공군의 참전할 가능성이 높았고 그런 증거들이 보였기에 많은 이들이 경고 했으며
이런 위험때문에 전선의 축소 보급로 유지를 1순위에 두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유엔지휘부나 맥아더는 애써 무시했고
압록강을 항햔 무제한 레이스를 했고 그런 레이스를 하게만드는 명령이 계속 있었음
맥아더는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는데 압록강만 정렴하면 전쟁이 끝날거라 생각한게 아닌지
중공군이 개입해서 미8군과 전투가 벌어져 밀리는 상황이 되었지만
미10군단은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되고
부대간의 연결이 개판이 되니 중공군의 후방침투도 쉬워서 연합군이 포위되는 일이 생겼음
한국전쟁 당시 연합군이 늘 화력으로는 압도했으며
중공군이 생각보다 인원이 적은 30만에 북한군12만인 42만명이었고
유엔군은 국군22만 미군18만 기타유엔군 2-3만으로 42만명정도로
서로 병력면에서도 비슷했음
그런데도
유엔군이 밀린이유를 찾는다면
중공군의 전술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연합군이 전력이 둘로 갈라져서 상황판단이 안되는 상황에 경쟁적인 레이스를 펼쳐서 그랬다고 볼수밖에 없고
이런 상황이 된건 유엔군 총사령관인 맥아더의 책임일수밖에 없다고 봄
맥아더의 지위는 미군내에서 절대적인 거라서 그 누구도 거부할 수가 없었고
맥아더의 의도대로 부대가 움직일수 밖에 없었음
이러니 미10군단 예하 미해병1사단은 장진호전투당시
살아만 있으면 영웅이 되는 혹독한 대가를 치루기도 함
참고로 당시 미해병1사단만이 안전한 교두보확보와 중요지점에 통신소와 병참기지를 뒀고
수송기 이용이 가능한 비행장도 만들어 뒀기에 (다른 부대는 다 압록강.두만강으로 쳐들어 갈때)
좌측의 미8군이 중공군에 무너지고 미10군단이 포위되는 위험한 상황에
미10군단이 안전하게 후퇴가 가능하도록 만든건
미10군단장 앨맨드가 빠른진격을 하라고 종용해도
끝까지 개기면서 교두보 확보와 보급로를 위한 병참기지와 비행장을 건설했던
미해병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덕분이었고
사실상 유일하게 맥아더의 무제한 레이스에 동참하지 않은 이부대가
중공군 2개군단급 병력을 장진호전투에서 막아낸 덕분에
10만이 넘는 병력과 17000대의 차량 35만톤의 군수물자를 안전하게 철수시켰고
이게 1.4 후퇴후에 유엔군이 반격을 가할수 있는 밑거름이 됨
미해병1사단은 장진호 전투로 정말 극심한 피해를 입었고
태평양전쟁때부터 맥아더에 안좋은 감정을 갖고있던 해병대는
이 장진호전투이후로 맥아더라면 이를 갈만큼 악감정을 갖지게 됨
인천상륙작전 사진으로 잘못알려진 레이테만 상륙작전때 사진인데
이 당시 처음에 자기 바지 젖는다고 투덜거리다가 이렇게 직접 상륙한 사진이 일려져 국민들의 인기를 얻으니
다음날 영화카메라맨 데려다 다시 촬영할 정도로 자신의 공명심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 했음
2차대전 유럽연합군 총사령관이자 미국 34대 대통령인 아이젠하워는
맥아더와는 정치적으로 조금 갈리기는 했지만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비난 하는 일이 잘 없는 아이젠하워도
그의 자서전에 맥아더를 가리켜 저렇게 안되도록 노력했다고 했고
2차대전 당시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자 핵항공모함 니미츠호가 니미츠란 이름으로 명명될 정도로
태평양전투에서 해군과해병대로 수많은 전쟁을 이겨나간 이분의 전공은
남서태평양 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기자회견만 하면 자기의 전공으로 주장했고
맥아더는 태평양전쟁 초기 휘하 부대가 없는 명목상 남서태평양사령관이면서
부대나 지휘권이 다름에도 니미츠가 자기 부하인양 행동했고 부하로 두려고 노력했고
해군이나 다른 육군의 반발로 무산 되었음에도 니미츠의 부대가 자신의 것인양 행동했음
미군의 모든 부대는 자기가 지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듯하기도....
한국전쟁당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밀리니
중국과의 전면전을 벌여야 한다
대만에 국민당군을 동원해서 중공군을 전멸시켜야 하고
만주에 핵공격을 하자거 주장했음
3차대전이 벌어져서 수많은 사상자와피해가 발생할거라는 반대에는
그건 정치가들이 알아서 할일이고 우리는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기자회견을 했고
당시 트루먼 대통령의 함구령을 5-6번 거부하며 기자회견을 해서
당시 미국은 이러다 3차대전 일어날거 같아서 맥아더를 해임시킴
이사람은 누가 죽던지 전쟁이 얼마나 크게 벌어지던지 상관없이 자신이 이기고 명성을 얻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미국에서도 판단했음
그리고
태평양전쟁이 끝나서 맥아더가 일본점령 사령관으로 일본에 있다보니
태평양전쟁은 일본의 방위전쟁이라고 두둔하면서 미국의 잘못으로 일본이 희생된것처럼 말해서
많은 이들의 뒤통수를 치는 일도 있던 인물이었음
개인적으로 반공교육받고 자랐던 세대라서
맥아더 장군하면 한국을 구한 영웅으로 늘 알고있다가
나이들면서 이런저런 자료들을 보다보니
맥아더란 사람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