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태양이 뜨고 지는 과정 - 도망치다(2)
게시물ID : readers_608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군청학사
추천 : 3
조회수 : 25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1/25 00:01:36

 말없이 걸어가는 그녀를 뒤따라 나는 걷고 있었다. 평소보다 무거워진 뒷모습에 나는 장난도 치지 못한 채 조용히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래도 나는 그 무거운 뒷모습에 조금이나마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가끔은 말없이 걷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까. 그래서 나는 하고 싶은 장난, 하고 싶은 말을 멈춘 채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집 앞에 나있는 돌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보니 어느새 시내 한복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내에 있는 찻집 근처에 다가가기 시작했을 때 그녀가 갑자기 말을 꺼내었다.


 “시험은 어떻게 됐어?”


 조금은 날이 선 그녀의 말투에 나는 나도 모르게 그만 움찔해버리고 말았다. 평소와는 매우 다른 그녀의 말투에 나는 한 줄기 불안함을 느끼며 그냥 침묵을 지켰다. 찻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그녀가 다시 말했다.


 “또 안됐나 보네?”


 반쯤 비웃음이 섞인 말투에 순간적으로 속에서 무언가가 나올 듯한 느낌과 현기증을 받았지만 그걸 꾹 참아내면서 나는 대답했다.


 “그렇게 됐어.”


 그 말을 들은 그녀는 아무 대꾸도 없이 그냥 자리를 찾아 찻집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무 말 없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무언가 말을 해서 이 분위기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녀가 그냥 침묵 속에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기, 우리 뭣 때문에 여기 온 거야?”


 용기와 함께 반쯤 억지미소를 지은 채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어느새 자리를 잡고 앉은 그녀는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응시하더니 피식 웃고는 내게 말했다.


 “찻집에 뭐 하러 오겠어? 왜 그렇게 웃긴 얼굴을 해, 일단 앉아.”


 실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본 나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이내 웃는 모습이 사라진 그녀의 얼굴을 바라 본 순간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했던 나의 불안감은 다시금 스멀스멀 마음 속 밑자락에서 기어 올라왔다.


 종업원이 다가와서 무엇을 시킬 것인가 묻기에 나는 메뉴판에 써져있는 가격을 먼저 확인했다. 분명 비싼 가격은 아니지만, 혼자서 부모님한테 용돈을 받아서 생활하는 나에게는 역시 부담되는 가격임엔 틀림없었다. 가장 싼 녹차를 내가 주문하자, 그녀는 가장 비싼 버독 바크 컷을 주문했다. 평소라면 내게 맞춰서 주문을 하던 그녀가 갑자기 비싼 차를 주문하자 나는 속으로 짐짓 놀라면서 물었다.

 

 “꽤나 비싼 걸 주문하네? 괜찮겠어?”


 그러자 그녀는 나를 노려본 채 다시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가 싸구려를 먹는 게 아니고?”


 ‘싸구려’라는 말에 은근히 힘을 줘서 말하는 것을 듣고 나는 기분이 조금 나빠졌다. 뭔가 화가 난 것은 같긴 한데, 도대체 그 이유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비웃어대는 말투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괜스럽게 열이 뻗치기 시작했다. 성미가 급해서일까, 나는 다시 그녀에게 말을 했다.


 “저기, 나한테 뭐 화난 거 있어?”


 그러자 그녀는 종업원이 가져다 준 차를 입에 가져간 뒤에 신경에 거슬릴 정도의 소리가 나게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말했다.


 “맞춰봐, 뭐 때문에 내가 이럴 것 같아? 10년이나 사귀고 있는데 그동안 아무 직업도 가지지 않고 나 고시생이요 하는 남자친구를 둬서? 너랑 결혼하지 말라고 말리는 우리 부모님하고 대판 싸우고 와서? 다른 친구들은 좋은 선물에 좋은 집 얻어서 잘 살고 있는데 나는 찻집에나 와서 비싼 차 마시는 게 내 사치의 전부라서? 아니면…”


 그렇게 쏘아붙이던 그녀는 숨을 잠시 들이쉬더니 이번엔 좀 더 큰 소리로 내게 소리쳤다.


 “오늘이 10주년인데 아무 얘기도 없이 방에 처박혀서 찌질하게 잠이나 퍼 자던 게 내 남자친구라서!?”


 큰 소리에 몇몇 사람이 우리를 돌아봤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시선을 이리 저리 돌려가면서 주변을 둘러보기에 바빴다. 수군거리는 주변 사람들을 애써 무시하면서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저기…내가 미안해. 일단 화 풀고 진정해, 응?”


 진정시키려 한 그 말에 그녀는 더욱 더 화가 난 듯 내게 말을 던져대기 시작했다.


 “뭐가 미안한데? 10년 내내 주구장창 백수라서 미안해? 시험도 떨어지고 집에 처박혀서 현실도피 해서 미안해? 우리 부모님 만족시킬만한 스펙이 못 되서 미안해? 다른 내 친구들처럼 호강시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도대체 뭐가 미안한 건데? 그리고, 미안하다고 하면 경관은 왜 있어? 그냥 이렇게 이번에도 상황 무마시켜서 또 어떻게든 지나가려고만 하잖아! 넌 도대체 아직도 내가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어?”


 이쯤 되자 나도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나도 언성을 높여서 그녀에게 말대꾸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 모르겠다. 모르겠어. 내가 뭘 그리 잘못했냐? 물론 10주년 챙기지 못 한건 잘못한 게 맞는데, 나도 오늘 시험 떨어져서 기분 나쁜데 그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잖아! 그리고, 도대체 이런 날까지 우리가 싸워야 하는 이유가 뭐야? 정말 지긋지긋하지도 않냐?”


 지긋지긋이란 단어를 들은 순간 그녀의 눈에는 눈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내가 그 눈물을 보고 잠시 말을 멈추자, 그녀가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 나도 정말 지긋지긋해. 다 개 같고, 짜증나고, 다 싫어 그냥. 나 오늘 우리 헤어지자고 말하려고 나왔어. 너가 해 지기 전에 나 찾아오면 그래도 참아보려고 했는데, 더는 못 참겠어. 나 너 정말 좋아했는데, 아니 좋아하는데, 이제는 더 못하겠어.”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는 울음을 터트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내 앞에서 울고 있는 그녀를 보니 미안한 마음이 매우 솟구치기 시작했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을 때, 그녀가 내 손을 거칠게 뿌리치면서 울부짖었다.


 “건들지 마! 다 싫어, 다 싫다고! 너, 다시는 내 얼굴 볼 생각 하지 마!”


 그 말과 함께 그녀는 찻집을 뛰쳐나가버렸다. 너무 갑작스럽게 나가버려서 따라잡을 엄두도 못낸 채, 나는 그저 멍하니 그녀가 나간 곳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눈물 한 방울이 맺힌 채 마지막 잎새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정신을 추스르지 못한 채 찻집을 나와서 텅 빈 거리를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아, 젠장. 뭐 이러냐. 뿌옇게 번져가는 밤하늘을 쳐다보다가, 쥐들이 달리기 시합을 하는 하수구 구멍을 한번 쳐다보다가, 그렇게 위아래를 쳐다보기를 반복하며 비틀비틀 거리를 독차지하며, 나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 채 그냥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다 문득, 눈물이 빗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아, 도망가고 싶다. 다 버리고, 그냥 도망가고 싶어. 그냥 아무도 없는 데로 도망가서, 혼자 조용히 지내고 싶어.


 굉장히 지쳐버린 심신에 나는 그저 휴식할 공간이 필요했다. 헤어져버린 여자친구, 떨어진 시험, 무시하는 가족, 괄시하는 친구. 그냥 이 모든 것을 버리고 한 줌의 먼지가 되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해졌다. 그냥 미헤일러스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그 찰나에,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이보게. 혹시 자네, 도망치고 싶은가?”






부끄럽고 덜덜 떨리는 마음으로 올리는 글입니다. 부끄럽긴 한데,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편은 제 글목록에 보시면 있습니다. 그런데 딱히 보지 않으셔도 지장이 없으리라 생각하여 따로 올리지는 않았습니다.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