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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같은 이야기
게시물ID : sisa_4312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릴케
추천 : 2
조회수 : 60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8/24 23:04:21

[토요판/르포] 정수장학회 보도, 1년의 기록

▶ ‘정수장학회 보도 사건’에 대한 1심 재판이 모두 끝났습니다.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정수장학회와 <문화방송>관계자들이 모여 정수장학회의 언론사 지분매각 논의 사실을 고발한 최성진 <한겨레> 기자에 대해 법원은 ‘이들의 대화를 녹음해 보도한 것은 무죄, 대화를 청취한 것은 유죄’라고 판결했습니다. 정수장학회 보도 이후 1심 판결에 이르기까지 약 1년간 이어진 최성진 기자의 분투기를 소개합니다.

일어나자마자 책상 앞에 앉아 창문을 연 것이 11월13일 아침 7시께였다. 바람이 살짝 차가웠지만 그래서 더욱 상쾌했다. 하루 전, 5시간이 넘는 검찰 조사를 마친 뒤 서울 서초동 검찰청사를 빠져나올 때 느꼈던 서늘한 해방감이 남아 있었다.

낯선 방문자의 등장을 알리는 초인종 소리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나는 화들짝 놀라 뒤로 젖힌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속옷 차림으로 현관을 향해 몇 걸음 옮기는 동안 온몸의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런 이른 시각, 나를 찾아온 불청객은 누구일까.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아침의 압수수색, 휴대폰을 빼앗기다

“누구세요.”

“….”

“누구시냐고요.”

“최성진씨. 문 여세요.”

내 이름을 알고 있다. 정확히 나를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남의 집을 찾아와 다짜고짜 문을 열라고 요구할 사람은 많지 않다. 그제야 상황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검찰이 들이닥친 게 분명했다. 검찰 압수수색이 한번쯤 이뤄질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정작 눈앞의 현실이 되자 당황스러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문을 열 때 열더라도 낯선 불청객의 무례한 요구에 호락호락 응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어디서 오셨냐고요.”

“아, 밑에서 왔어요.”

‘밑에서 왔다’니, 지상 17층에 자리잡고 있는 내 오피스텔을 찾아오려면 누구나 ‘밑에서’ 올라올 수밖에 없다. 아예 밑도 끝도 없는 불청객의 태도로 인해 밑에서 짜증이 올라왔다.

“누구신지 신분을 밝히세요.”

“검찰에서 압수수색 나왔어요. 빨리 문 여세요.”

검찰 관계자는 모두 3명이었다. 압수수색이란 수사기관이 주거지 등 특정 장소나 사람의 신체를 ‘수색’해, 증거물 따위를 ‘압수’하는 강제처분을 가리킨다. 평생 죄짓고 살 일이 별로 없는 일반인은 압수수색 상황에 맞닥뜨리면 허둥대게 마련이다. 수사기관은 일반인의 이런 처지를 이용해 남의 집을 함부로 들쑤시는 경우가 있다.

14년차 기자인 나는 달랐다. 취재 현장에서 경찰과 검찰을 겪을 만큼 겪었고, 압수수색의 요건과 절차를 규정해놓은 형사소송법도 적당히 꿰뚫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부끄러운 짓을 저지른 적이 없으니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자, 와라.

여기까지는 압수수색이 이뤄지기 전, 내가 머릿속에 그려본 여러 가상의 흐름도 가운데 하나였다. 실제로는 어림없었다. 문을 열어준 뒤 압수수색이 이뤄진 약 2시간 동안 내 오피스텔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그들인 것 같았다.

나는 가장 먼저 그들에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가장 선임으로 보이는 40대 중반의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 소속 손아무개 수사관이 자신의 공무원증을 내밀었다. 그사이 각각 30대·40대 초반인 듯한 나머지 두 수사관은 허락도 없이 오피스텔 안으로 쑥 들어가버렸다. 그들이 나를 지나칠 때 슬쩍 내보인 게 신분증인지 식권이나 교통카드 따위인지도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다음으로 압수수색영장 제시를 요구했다. 손 수사관은 네쪽짜리 영장의 표지를 보여주며 금방이라도 도로 뺏을 것처럼 자신의 손으로 영장 끄트머리를 잡고 있었다. 영장을 확인해 압수수색의 대상과 범위를 확인한 뒤 ‘최소 침해의 원칙’(증거물의 압수는 불가피한 범위에 그쳐야 한다)에 따른 제한적 압수수색을 요구하려고 했으나, 현실적으로는 무리였다. 이미 디지털포렌식(휴대전화나 컴퓨터 등으로부터 수사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분석하는 수사 과정) 담당 수사관은 허락도 없이 내 맥북(애플사의 노트북 컴퓨터)을 열어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최필립 이사장에게 전화했다가 
통화종료 안돼 계속 듣게 된 
정수장학회 지분 매각 논의가 
‘한겨레’에 단독 보도된 뒤 
문화방송은 나를 고발했다

‘뉴스데스크’는 허위 보도라는 
기사를 10여차례 내보냈고 
검찰은 휴대전화·취재수첩 압수 
기사 단어 꼬투리 잡는 검사 맞서 
보도의 공익성을 지켜야 했다

손발을 착착 맞춰 좁은 오피스텔을 휘젓는 성인 남자 세명을 혼자 상대하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담당 변호사에게 ‘과잉 압수수색’ 상황을 알리고 법률적 조언을 구하고자 했으나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하긴, 아침 7시께에 전화를 받을 사람은 많지 않다. 검찰의 이른 시각 압수수색은 ‘피의자 최성진’의 심리적 고립을 노린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 전화 안 받는 거 같은데, 그 휴대전화도 주세요. 저희가 가져가겠습니다.”

아니, 이 사람들이 진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법원이 검찰에 내준 압수수색영장을 보면 압수 대상은 분명 휴대전화 자체가 아니라 ‘피의자의 휴대전화 중 최필립(정수장학회 이사장)과 이진숙(문화방송 기획홍보본부장), 이상옥(문화방송 전략기획부장)의 회의 내용을 녹음하거나 기록할 수 있는 음성파일 및 음성메모’였다. 휴대전화를 움켜쥔 채 버텼다.

“영장 어디에 휴대전화를 통째로 가져가라고 했습니까. 휴대전화 가운데 해당 부분만 복사해 가세요.”

“음성파일을 압수하려면 휴대전화를 일단 검찰로 가져가야 할 거 아닙니까. 그래도 저희가 기자라 이만큼 편의 봐드리는 건데, 계속 이러시면 물리력을 행사하겠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사이에도 디지털포렌식 수사관은 맥북에 고개를 처박고 뭔가를 열심히 내려받고 있었다. ‘물리력’이라는 단어를 속으로 되뇌며 결국 휴대전화를 내줬다. 검찰은 이밖에도 2011년까지 사용했던 휴대전화와 취재 및 개인 일정이 담긴 수첩, 맥북 하드디스크에서 추출한 취재 파일의 일부 등을 압수했다. 사실 그들이 가져간 압수물은 ‘정수장학회 보도 사건’과는 크게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다만 한때 취재원들과 주고받은 문자메시지, 과거 ‘인연’과 나눈 사적 대화의 기록을 그들이 엿볼 것이라는 사실에 속이 쓰렸다.

침대 바닥과 휴지통까지 탈탈 턴 검찰의 압수수색은 두시간 남짓 이어졌다. 휴대전화를 뺏긴 뒤에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소파에 앉아 그들이 하는 짓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중에는 조금 지루해져 담배를 한대 피워 물었다. 손 수사관이 옆으로 슬쩍 다가와 한층 누그러진 어투로 말을 건넸다. “저도 한대 피워도 되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재떨이를 내줬다. 그가 뜬금없이 고백했다. “저도 사실 <한겨레> 독자입니다.”

“기다려주시면 최 국장에게만 알려줄게요”

‘정수장학회 보도 사건’의 시작은 지난해 9월27일 최필립 당시 정수장학회 이사장과의 전화인터뷰였다. 추석 연휴의 시작(9월29일)을 이틀 앞두고 있던 그날, 평소 꾸준히 연락해왔던 최 이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추석 인사로 시작된 전화통화는 자연스레 정수장학회 문제에 관한 인터뷰로 이어졌다. 8월20일 박근혜 후보, 9월16일 문재인 후보가 각각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 대통령선거 후보로 최종 확정된 뒤 정치권은 대선 분위기로 달아올랐다. 정수장학회 문제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는 횟수도 잦아졌다.

“이래저래 마음이 편치 않으시죠. 정수장학회 문제가 박근혜 후보의 지지율을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있고요.”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거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요. 내 생각에는 ‘너희들도 사람인데 남을 돕고 지켜줄 줄도 알아야지, 너희들은 단것만 찾아 먹고 쓴건 나 혼자 먹으라고 하면 되느냐’ 이렇게 치받고 싶은데 그러면 전쟁이 되잖우. 가급적이면 그쪽으로 말려들어가지 않으려고 하고 있는데….”

‘너희들’이란 새누리당 내부에서 ‘정수장학회 털고 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상돈 정치쇄신특위 위원 등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그보다는 그 뒤 이어진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그는 “10월 말쯤 되면 결승의 날이 다가오는 건데, 나도 한몫을 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뭔가 있다는 뜻이었다. 한번 더 파고들었다.

“최 이사장님의 거취와 관련한 이야기입니까.”

“아니죠. 우리 이사회에서 내 임기를 2014년까지로 정해놨는데, 임기는 채워야 할 거 아니에요.”

정수장학회 이사장직에서 물러나지는 않는다, 대신 ‘10월 말’ 직접 ‘한몫’을 하겠다. 최 이사장의 이야기 가운데 특히 한몫이라는 단어가 귓바퀴에서 맴돌았다. 침을 꿀꺽 삼키며 그 실체를 캐물었다. 최 이사장은 이날 자신의 계획을 끝내 속시원히 말해주지 않았다.

“지금은 좀 기다려주세요. 그리고 이건 내가 지금 최 국장에게만 말하는 건데, 아직 기사에 내면 안 돼요. 대신 조금 기다려주시면 그때 가서 최 국장에게만 알려줄게요.”

그 이상 밀어붙이면 결례였다. 일단 물러서기로 했다. 나는 “최 이사장님, 그러면 추석 연휴 지난 뒤 다시 연락드리고 찾아뵙겠습니다. 차 한잔 주십시오”라며 전화를 끊었다. 최 이사장의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 요구는 받아들였다. 한겨레 토요판 고경태 에디터에게도 10월 초 정수장학회 관련 커버스토리 보도를 준비하겠다고만 보고했다.

최필립 이사장을 처음 만난 건 지난해 1월4일 오후였다.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건물에 있는 정수장학회 이사장실로 찾아간 그날, 최 이사장은 <조선일보>를 읽고 있었다. 이날치 조선일보는 마침 정수장학회 문제와 관련해 ‘박근혜 위원장, 정수장학회 문제부터 단호하게 자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보수 성향의 조선일보가 정수장학회 문제를 박근혜 후보의 아킬레스건으로 진단했다는 뜻이었다. 조선일보를 소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치 조선일보 사설이 꽤 화제였습니다. 이사장님도 보셨지요.”

“조선일보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거든. 이걸 사설이라고 써놓으니 자꾸 망해가는 거 아니에요.”

“사실 저도 그 문제에 대해 이사장님 말씀을 듣고 싶어서 왔습니다. 보수든 진보든, 박근혜 후보를 향해 정수장학회 사회 환원을 한목소리로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최 이사장을 직접 만난 인터뷰는 이날부터 2월1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그사이 전화통화도 여러 차례 오갔다. 그때마다 그는 나를 ‘최 국장’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국장이라는 터무니없는 호칭이 민망해 “최 이사장님, 저는 그냥 기자예요”라고 손사래를 치면, 그는 “국장이 아니야? 그래도 신문사에 들어갔으면 편집국장 한번 해야지”라며 웃어넘겼다.

지난해 추석 연휴 약 1주일은 1년처럼 느껴졌다. 10월8일 추석 연휴가 끝난 첫번째 월요일이 되자마자 최 이사장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른 오전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이런저런 일이 겹쳐 조용한 장소를 찾아 전화통화를 시도한 시각은 오후 5시께였다. 최 이사장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심드렁했다. 당시 민주통합당은 국회 국정감사를 준비하며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한 공세를 준비중이었다. 최 이사장의 증인 채택 여부부터 논란이었다. 국정감사 증인 출석 문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국정감사 증인으로 나갈 생각이 있으신가요.”

“거기 가서 할 이야기도 없고, 내가 나가봐야 오히려 자기들 불리할 텐데.”

“하하, 오늘이나 내일 잠시 찾아가도 될까요. 이런저런 현안이 있는데요.”

“당분간 오지 마세요. 대선이 곧 오는데.”

“10월 말 (정수장학회 관련한) 입장을 정리하신다면서요.”

“나도 할 말은 많은데 지금은 하고 싶지 않다고요.”

최 이사장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심드렁했다. 당혹스러웠다. 어떤 이야기든 계속 건네야 한다. 설령 오늘이나 내일 만나지 못하더라도 조만간 다시 연락할 수 있는 명분이라도 만들어둔 채 전화통화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이사장님.”

“네, 네.”

“또 연락드릴게요.”

“네네, 네.”




그 순간 들린 특이한 억양의 목소리

추석 연휴 내내 손꼽아 기다렸던 전화통화가 그렇게 끝나자 일순에 맥이 빠졌다. 그렇다고 취재원이자 연장자인 최 이사장에 앞서 냉큼 전화를 끊어버릴 수는 없었다. 가만히 숨을 고르며 그가 먼저 통화종료 버튼을 누를 때까지 기다렸다. 그때였다. 최 이사장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정수장학회 지분매각 논의의 시작이었다. 최 이사장 목소리에 이어 들리는 특이한 억양의 여성 목소리, 그건 아주 낯익은 음성이었다. 이진숙 당시 <문화방송>(MBC) 기획홍보본부장이었다.

최필립 이사장과 이진숙 본부장의 만남, 그것은 그 자체로 뉴스였다. 최 이사장은 누가 뭐래도 박근혜 후보의 최측근 인사였고, 이 본부장이 몸담고 있던 문화방송은 박 후보에 대한 일방적인 편들기 보도로 종종 물의를 빚어왔다. 정수장학회는 이런 문화방송의 주식 30%를 갖고 있었다. 휴대전화 너머로 들리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 귀가 활짝 열릴 수밖에 없었다. 최 이사장과의 10월8일 전화 통화는 약 8분50초 동안 이어졌지만, 우리 두 사람의 휴대전화는 그 뒤로도 50분 남짓 계속 연결된 상태였다.

한겨레는 최필립·이진숙과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이상옥 문화방송 전략기획부장 등 세 사람의 대화 내용을 10월13·15일치에 주요하게 다뤘다. 정수장학회 보도, 좀더 구체적으로는 정수장학회 지분매각 관련 보도였다.

보도의 반향은 매우 컸다. 정치권과 언론은 정수장학회 지분매각 논의의 배경과 문제점 등을 여러 각도에서 다뤘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것은 문화방송의 반응이었다. 정수장학회 지분매각 논의에 참여해 문화방송의 민영화 계획 및 추진 방안을 설명하고, 심지어 대선을 꼭 두달 앞둔 10월19일 ‘정치적 임팩트’를 고려한 기자회견까지 직접 기획한 문화방송 쪽은 메인뉴스인 <뉴스데스크> 등을 활용해 정수장학회 지분매각 논의의 정당성을 강변했다. 한겨레 보도에 대한 도청 의혹 제기도 수차례 이어졌다. ‘도청’이라는 표현이 억울했지만, 여기까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가장 참기 힘들었던 것은 한겨레 기사에 대한 허위·왜곡 보도 공세였다.

<뉴스데스크>는 이런 내용의 보도를 10월13일부터 7일간 10여회에 걸쳐 반복적으로 내보냈다. 이 기간에 <뉴스데스크>를 보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이었다. 한겨레 보도에 대한 “교묘한 왜곡 보도”라고 주장하며 거꾸로 내 인터뷰 내용을 ‘짜깁기’해 방송에 활용한 사례도 있었다. 10월16일의 일이었다. 문화방송의 ㅇ기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묻는 질문은 대부분 ‘왜곡 보도 아니냐’, ‘정수장학회 보도에 정치적 의도가 개입된 것 아니냐’ 등이었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감정을 가라앉히고 대답했다.

“(정치적 의도라면) 어떤 정치적 의도를 말씀하시는 건지요.”

“그러니까, 지금 정치권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야당은 이걸 갖고 공세를 취하고, 여당은 방어하는 태도를 취하는 상황이다 보니 야권에 도움을 주기 위해 기사가 나온 건 아닌지, 그런 시선이 나올 수 있는 부분이잖아요.”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판단이 서면 보도하는 것이지, 어떤 기자가 여야 유불리를 따져 보도 여부를 판단합니까. 정치적 의도 없었습니다.”

그날 밤 <뉴스데스크>의 “정수장학회, 비밀회동 가능한가?…교묘한 왜곡 보도” 제목의 기사는 이렇게 끝났다. “해당 기사를 쓴 한겨레 신문 기자는 불법녹취인 줄 알면서 교묘히 왜곡 보도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정치적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10월18일치 “회동 직전 최필립 이사장 ‘개인수첩’ 사라졌다” 제목의 보도는 해당 기간 문화방송이 쏟아낸 기괴한 방송 리포트의 결정판이었다. 이날 방송에서 문화방송은 최필립 이사장의 개인수첩 분실 사실을 소개하며 “정수장학회 최필립 이사장과 엠비시 이진숙 본부장의 회동 이전에 수상한 분실 사건이 일어났고, 그리고 얼마 뒤 도청 의혹이 불거졌다. 최 이사장의 수첩 분실이 도난당한 것일 경우 여러 의혹을 푸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도청 의혹의 핵심으로 지목당하고, 기사 왜곡을 일삼는 어용 기자로 내몰린 뒤, 결국엔 좀도둑 비슷한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쓴웃음이 나왔다. 정수장학회 보도, 곧 나에 대한 검찰 수사도 문화방송의 고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5일치 한겨레를 통해 대화록 전문을 공개하자 문화방송은 10월16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나를 검찰에 고발했다.

“피고인, 검사와 싸우지 마세요!”

정수장학회 보도 사건은 내게 검찰이라는 조직의 수사 방식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사건 담당은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 소속 이봉창 검사였다. 이 검사의 첫번째 전화연락은 10월30일 오전에 찾아왔다. 그날 곧바로 검찰에 나와 조사를 받으라는 요구였다. 소환을 요구하는 것이 검사의 권한이라면, 소환에 불응하는 것은 피의자의 권리였다. 나갈 수 없다며 신문사로 정식 소환장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1차와 2차 소환요구에 모두 응하지 않았다. 내 신분은 어느새 피고발인이 아니라 피의자로 바뀌어 있었다. 소환에 불응할 때마다 이 검사는 ‘친절하게도’ 꼭 전화로 소환에 응하지 않는 이유와 언제 나올 수 있는지를 물었다. 나중에는 그냥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검찰의 소환독촉이 촘촘히 이어지는 사이 일부 언론을 통해 정수장학회 지분매각 논의 당시 최필립 이사장과 내 휴대전화가 ‘상당 시간’ 연결된 상태였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분명 그런 ‘피의 사실’을 흘린 사람은 해당 보도에서 “지금으로선 실체가 뭔지 알 수 없다”며 “극도로 말을 아꼈다”는 검찰 관계자의 말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피의 사실을 던져놓고 여론의 움직임을 탐지하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이 검사를 직접 맞닥뜨린 것은 3차 소환일이었던 11월12일이었다. 이날 소환에 앞서 한겨레를 통해 취재 경위에 대해 밝혔다. 정수장학회 지분매각 논의 내용에 대한 국민의 알 권리를 존중하는 것처럼, 취재 경위도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이라면 이 또한 투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검찰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겨레의 취재·보도 과정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진실을 보도해야 한다는 저널리즘의 원칙에서 어긋나지 않는다는 판단이 확고했기에, 굳이 검찰에 나아가 취재 경위를 밝힐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날 오전 10시에 시작된 검찰 조사는 오후 3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검찰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고, 그때마다 “진술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진술했다. 이 검사는 조사 막바지에 이렇게 물었다.

“이미 신문에 취재 경위를 밝혀놓고 진술을 거부하는 이유는 뭔가요.”

“진술을 거부하겠습니다.”

조사를 마치고 검사실을 나올 때 이 검사는 말했다. “이렇게 묵비권을 행사할 줄은 몰랐는데, 아무 말도 안 하니 다시 부를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다. 이튿날 이른 오전 곧바로 압수수색이 이뤄졌으니, 그건 착각이었다. 압수수색이 끝나고 며칠 뒤, 나를 고발한 문화방송은 <뉴스데스크>를 통해 검찰이 나에 대한 기소 방침을 정했다고 보도했다.

그해 12월19일 대선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만나는 언론계 선후배마다 ‘최성진은 이제 감옥 가는 일만 남았다’며 놀렸다. 농담을 건네는 사람이나 놀림을 받는 사람이나 껄껄 웃고 말았다. 검찰이 1월18일 통비법 위반 혐의로 나를 불구속 기소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첫 공판은 지난 2월2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5단독 이성용 판사 심리로 열렸다. 이날 공판의 쟁점은 검찰이 재판부에 제출한 내 사적 통화 기록의 증거 채택 여부였다. 최필립·이진숙·이상옥 등 세명의 통신비밀을 침해했다며 나를 법정에 세운 검찰은 2012년 10월15일 이전 약 10개월 동안 내가 통화한 내역 6500여건을 법원에 증거로 제출했다. 게다가 검찰은 애초 더 많은 통화 기록을 들여다보려 한 사실도 공판 과정에서 확인됐다. 정수장학회 보도의 취재가 사실상 10월8일 하루에 이뤄졌는데, 검찰은 왜 그토록 오랜 기간의 내 통화 내역을 들여다봤을까. 그 이유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이봉창 검사는 수사는 물론 공소유지까지 직접 관할했다. 지난해 검찰 조사 때 나의 진술거부권 행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했던 이 검사는 지난 7월2일 피고인 심문을 벼르고 나온 듯했다. 별걸 다 물었다. 자신은 다른 사람과의 통화가 끊기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방이 제3자와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려 했지만 잘 안 들렸다는 질문까지 내게 했다. “그럼 에이에스를 받아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피고인 심문 과정에서 내가 가장 단호하게 맞서야 했던 부분은 이 검사의 기사 ‘왜곡 의혹’ 제기였다. 정수장학회 지분매각 계획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반드시 보도해야만 했다는 것이 내 사건을 맡은 김형태 변호사의 주장이었고, 곧 내 생각이기도 했다. 이 검사의 왜곡 보도 의혹은 보도의 공익성과 정당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 검사가 제기한 왜곡 의혹이란 게 이런 식이었다. 정수장학회 지분매각 논의에 관한 1보가 10월13일치 신문 발행에 앞서 12일 한겨레 누리집에 실렸을 때는 ‘녹취록’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게 왜 ‘대화록’으로 바뀌었는지, ‘만약에, ~라면’의 문장구조에서 ‘만약에’를 뺀 것은 의도적이었는지 등을 따지는 것이었다. 이 검사의 부질없는 꼬투리잡기에 맞서 어문규정과 문장의 호응관계 등에 대한 원론적 설명을 곁들여가며 일일이 맞받아쳤다. 10월13·15일치 한겨레에 실린 정수장학회 보도 1만9675자 가운데 진실에 부합하지 않는 내용은 단 한 글자도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검사의 피고인 심문만 1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보다 못한 김형태 변호사가 큰 소리로 뜯어말리기에 이르렀다.

“피고인, 검사와 싸우지 마세요!”

그날 이 검사는 나에게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을 구형했다. 통비법 위반이 명백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지난 2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5단독(이성용 판사) 재판부는 징역 4개월, 자격정지 1년의 선고를 유예한다고 결정했다. 1심 선고공판은 이렇게 끝났다. 재판을 마치고 신문사로 돌아온 뒤 곧바로 항소하기로 했다. 정수장학회 보도 사건의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00677.html


생생한 증언을 통한 스토리 하드보일드 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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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나실때 재미삼아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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