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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매국노’ 이완용,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다.
게시물ID : humorbest_61426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44
조회수 : 2528회
댓글수 : 19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3/01/23 14:01:47
원본글 작성시간 : 2013/01/23 10:19:30



경기도 광주군에서 가난한 선비 이호석(李鎬奭)의 아들로 태어난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은 어려서 먼 친척뻘인 이호준(李鎬俊, 1821~1901)의 양자로 입양되었습니다. 


당시 예방승지(현 청와대 의전비서관)으로 있던 이호준에겐 서자(庶子) 이윤용(李允用, 1854~1939)과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완용이 당대의 세도가 집안으로 입양된 것은 어린 시절 그가 신동으로 소문이 났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참고로 이완용은 6세 때 천자문과 동몽선습, 7세 때 효경, 8세 때 소학을 뗐다고 합니다) 그는 4살 연상의 서형(庶兄) 이윤용과 별 마찰 없이 지냈는데, 이는 양자로 들어간 그가 평소 조신(操身)했기 때문으로 전해집니다.


이완용의 양부(養父) 이호준은 당대의 명필 이용희(李容熙)를 초빙하여 이완용에게 한학과 서예를 익히게 했는데, 그의 서예 솜씨는 이용희의 서법을 익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평소 이완용은 내성적인 성격에 글읽기와 시문 쓰기를 즐겼으며, 술도 즐기지 않고 여자도 밝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청년 시절 그는 유교의 근본인 충효사상에 입각한 조선 선비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고 언론인 출신 운덕한이 펴낸 <이완용평전>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당대의 세도가 집안으로 입양되었으니 그 무렵 그의 앞날은 탄탄대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882년 임오년, 25세이던 그는 증광문과(增廣文科) 별시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증광시(增廣試)’는 새 임금의 즉위 등 왕실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임시로 실시한 과거시험을 말하는데, 그 무렵 대체 무슨 경사가 있었을까요? 바로 이해 6월 초 개화정책과 밀린 급료에 불만을 가진 구식군인들이 소위 ‘임오군란’을 일으키자 조선 조정은 청나라 군대의 도움으로 겨우 난을 진압하였고, 또 신변에 위협을 느껴 충북 충주까지 피신했던 명성황후도 무사히 귀환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이를 기념해 임시과거를 실시했는데, 이완용은 바로 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그의 양부 이호준은 당시 이조판서로 재임 중이었습니다. 1886년(고종 23년) 규장각 대교(정7품)로 벼슬생활을 시작한 이완용은 홍문관 수찬(정6품), 홍문관 응교(정4품) 등을 거치면서 승승장구하였습니다. 이듬해 3월 그는 현직관리 신분으로 근대식 관립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했는데, 이것이 그의 인생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그는 헐버트 등 미국인 교사에게서 영어, 역사, 자연과학, 국제법, 경제학 등 신학문을 배웠습니다. 당시 이곳 교사들은 전부 영어로만 강의했는데, 요즘으로 치면 ‘영어몰입교육’을 한 셈입니다. 입학한지 4개월만인 그해 7월 그는 미국 주재 참찬관(參贊官)으로 임명돼 도미했는데, 병으로 이듬해(1888년) 음력 5월에 귀국하였습니다.


한편 그해(1888년) 12월에 다시 주미 공사관 참찬관으로 임명돼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12월에 대리공사(代理公使)로 승진하였습니다. 주미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그는 처음으로 미국의 선진문명에 접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그는 소위 ‘친미파’가 되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3권이 분립된 민주공화제, 신분차별이 없는 평등사회 등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특히 근대적 교육제도에 깊이 매료됐었습니다. 후일 학부대신 시절 그가 초등학교 의무교육제 등 근대식 교육제도를 도입한 것은 이 때의 경험이 바탕이 됐다고 합니다. 미국서 2년간 근무한 후 그는 1890년(고종 27년) 10월 귀국하였습니다. 


귀국 직후인 그해 11월 내부 참의(현 차관보)를 거쳐 2년 뒤인 1892년엔 이조참판(현 행안부 차관), 1893년엔 한성부 좌윤(현 서울시 부시장), 공조참판(건설부 차관)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는데, <고종실록>에 따르면, 당시 그는 고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바로 그 이듬해 1894년, 동북아를 소용돌이치게 만든 사건이 하나 터졌습니다. 


국내에서는 동학농민전쟁이,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서는 청일전쟁이 발발한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두 전쟁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서로 얽혀 있었으며, 이 전쟁을 통해 조선은 본격적으로 외세를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청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일본은 조선에 간섭의 강도를 높여 나갔습니다. 


이에 조선정부가 새로운 연대세력을 모색하였는데, 이때 떠오른 대상이 바로 러시아와 미국이었습니다. 우선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이른바 ‘3국 간섭’의 사례에서처럼 일본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점, 또 미국은 땅도 넓은데다 조선과는 거리가 멀어 침략 가능성이 적은 점이 고려됐었습니다. 특히 고종은 선교사 알렌, 육영공원 교사 헐버트 등과 각별한 친분을 쌓으며 미국에 대해 친근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 예로 고종은 알렌에게 “미국은 조선의 우방이므로 우리가 곤경에 빠지면 강력하고도 사심없는 말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국가”라며 미국에 대해 호의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고종은 친일성향의 김홍집 내각을 해체하고 초대 주미 전권공사를 지낸 친미파 박정양(朴定陽, 1841~1904)을 수반으로 하는 새 내각을 구성(1896년)하였습니다. 박정양이 부상하면서 그와 미국에서 같이 근무했던 이완용, 이채연 등도 중용됐는데, 이완용은 그 때 약관 38세의 나이로 학부대신(현 교육부장관)이 되었습니다. 이 내각에서 주목을 끈 사람이 단연 이완용이었습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2년가량 주미공사관에 근무한 적이 있어 당시로선 드문 ‘미국통’이었기 때문입니다. 독립협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시절 이완용은 독립문 건립 기념식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 바 있습니다.


 “조선이 독립을 하면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만일 조선 인민이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해치려고 하면 구라파의 폴란드라는 나라처럼 남의 종이 될 것이다. 세계사에서 두 본보기가 있는데, 미국처럼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나 폴란드 같이 망하는 것 모두가 사람 하기에 달려 있다. 조선 사람들은 미국같이 되기를 바란다.” 


한편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서 무리하게 내정개혁(소위 ‘갑오개혁’)을 강요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조선정부는 1895년 9월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손잡고 친일세력 제거 차원에서 친일파의 거두 박영효를 축출하였습니다. 그에 앞서 8월에는 민영환을 주미 전권공사로 등용하는 동시에 친일계인 어윤중·김가진 등을 면직시키고 이범진·이완용 등 친러파를 기용하였습니다. 


이로써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는데 조정은 친미·친러파가 주축이 되었고 이들은 명성황후 민씨와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이로써 조정에서 친일파들이 몰락하자 위협을 느낀 일본은 급기야 그해 10월 8일 명성황후 살해사건, 즉 ‘을미사변’을 강행하였고 이를 계기로 친일파들이 다시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이 공포되자 유림들이 주축이 돼 전국에서 의병(‘을미의병’)들이 궐기하면서 전국은 다시 소란스러워졌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중앙군을 내려 보내 의병 진압에 나섰는데 왕실 친위대도 이에 가담했습니다. 친위대가 지방으로 이동한 틈을 타 이범진·이완용 등 친러파들은 세력 만회는 물론 당시 일본세력에 신변 불안을 느끼고 있던 고종을 위해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협의하여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관으로 고종의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위 ‘아관파천(俄館播遷)’인데, 이를 계기로 다시 친러내각이 출범하였습니다. 


아관파천을 주도하면서 친미파에서 친러파로 변신한 이완용은 이후 외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서리 등 요직을 맡으면서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일제와 친일세력들에게 맞서 반일노선을 걷고 있었습니다.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는 고종과 친러파들에게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러시아는 친러파들에게 부담스런 존재로 변하였습니다. 


러시아는 아관파천의 대가로 함경도 영흥·길주·삼수·단천의 금광 및 석탄채굴권 등의 이권을 요구하였으며, 또 러시아 군사교관을 보내 영향력 확대를 꾀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독립협회와 함께 당시 외부대신으로 있던 이완용은 러시아측의 그같은 요구를 반대 혹은 묵살하였고, 이 일로 이완용은 러시아를 점차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완용이 호의를 보인 세력은 바로 미국이었습니다. 당시 주미공사 알렌과 친분이 두터웠던 그는 미국에 대해서는 많은 이권을 챙겨주었습니다.


이완용이 친미 반러(反露) 태도를 보이자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그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베베르는 고종에게 압력을 가하여 1897년 7월 20일 외부대신 이완용을 학부대신으로 자리를 옮기도록 하였습니다. 이어 9월 1일자로 이완용을 평남 관찰사로 좌천시켜 마침내 중앙 정계에서 축출시켜 버렸습니다. 바로 그 다음날인 9월 2일자로 베베르의 후임으로 주한 러시아 공사에 취임한 스페에르는 고종에게 “말을 듣지 않으면 궁궐 경비병을 철수하겠다.” “제2의 아관파천을 실행하겠다” 등의 협박을 하면서 고종을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인 헤링튼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스페에르는 이완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오. 나는 그의 이름에 표를 해 두었소. 그는 내가 여기 있는 동안 결코 벼슬을 얻지 못할 것이외다. 그는 언제나 독립을 외치는 친미(親美)그룹의 우두머리지요. 나는 그 그룹을 조선에서 없애버릴 작정이니, 그들은 더 이상 세력을 쓰지 못할 것이외다.” 


한편 친미-친러를 오가며 권력중심에 서 있던 이완용이 친일파로 전신(轉身)한 계기는 그가 다시 중앙 정계에 복귀하면서 부터였습니다. 중앙무대에서 밀려난 그는 평남 관찰사를 거쳐 전남 관찰사로 임명되었는데, 그해(1898년) 양부 이호준이 죽자 고향으로 내려가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습니다. 


1901년 2월 그는 고종의 명으로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돼 중앙 무대로 되돌아 왔는데, 그 무렵 고종은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미국측의 거부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은 필리핀, 일본은 조선에 대해 각각의 지배권을 서로 인정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조선에서의 주도권이 일본으로 넘어간 사실을 간파한 이완용은 친일로 변신을 시도했고, 이듬해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그는 완전히 친일파로 전락하였습니다. 당시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밀착해 이듬해(1905년) 학부대신에 임명된 이완용은 이후부터 본격적인 친일노선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해 11월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한 후 마침내 내각 총리대신 자리를 꿰차게 되었습니다.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고종의 양위를 관철시켰으며, '한·일신협약’(정미7조약)'도 앞장서서 체결하였습니다. 급기야 1910년 8월 대한제국을 송두리째 일본에 넘기는 ’한일합방조약’, 즉 한일병탄을 주도하였고, 그같은 공로로 그는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와 거액의 재물을 보답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완용은 자신의 변신 행각을 대체 어떻게 자평했을까요? 그의 사후 이듬해인 1927년 그의 집안의 조카뻘이자 그가 내각총리대신 시절 비서관을 역임한 김명수(金明秀)는 그의 일생을 전기로 엮여 <일당기사(一堂紀事)>(‘一堂’은 이완용의 호)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이 책에서 이완용은 자신의 삶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당시 미국과의 교제가 점차 긴요한 까닭에 신설된 육영공원에 입학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갑오경장 후 을미년에는 아관파천 사건으로 노당(露黨, 친러파)의 호칭을 얻었고, 그 후 러일전쟁이 끝날 때 전환하여 현재의 일파(日波, 친일파) 칭호를 얻었다. 이는 때에 따라 적당함을 따르는 것일 뿐 다른 길이 없다. 


무릇 천도(天道)에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를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人事)에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 역시 변역이라 한다. 천도,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


친미파로 시작해 친러-친일로 이어진 그는 변신 행보는 한 마디로 말해 시류에 편승하여 철저한 대세순응주의에 입각한 것으로, 이는 제 죽을 줄 모르고 불을 좇아 달려드는 불나방과 같은 것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생전에 그는 한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세상에서 처신하기 힘든 일이 세 가지가 있다. 쇠약한 나라의 재상과 파산한 회사의 청산인, 빈궁한 가정의 주부가 그것이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뛰어난 재능과 식견을 겸비한 그였지만 그는 국운이 기울던 시기에 민족과 국가보다는 일신의 영달에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그의 친외세 반민족 행각은 결국 그를 매국노의 길로 이끌었고, 우리 5천년 역사에서 그는 가장 지탄받는 인물로 기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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