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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1.
대선 레이스가 한창일 무렵인 지난 2012년 12월 11일 역삼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국정원 여직원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야권의 대선후보였던 문재인 후보를 비난하는 댓글을 무더기로 게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문재인 민주당 후보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간의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고, 야권과 시민단체, 일반시민들은 국정원의 불법 대선개입을 맹렬하게 성토했다. 그러나 그는 국정원이 대선에 불법개입하는 엄청난 사건에도 불구하고 "혼탁선거를 중단하라"며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 양쪽을 모두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범야권이 주장했던 국정원의 불법대선개입과 박근혜 후보 측이 주장했던 국정원 여직원 감금사건을 그는 동등한 것으로 인식했다.
장면 2.
국정원이 자행한 불법대선개입의 천인공노할 실체가 하나씩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던 2013년 여름, 범야권과 시민단체, 일반시민들은 거리에서 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와 명확한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대규모의 촛불집회를 열었다. 집회는 여름 내내 이어졌고, 전국 각지에서 교수들과 대학생, 중•고등학생들의 시국선언이 줄을 이었다. 무너진 민주주의와 법치를 위해 수많은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있을 때 그는 그 자리에 단 한번도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다. 민주당이 촛불집회의 뜨거움을 이어받아 장외투쟁을 선언했을 때에도 그는 "촛불집회에 참여할 계획이 없다"며 선을 그었고, 오히려 장외투쟁에 나선 민주당을 향해 "슬기롭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는 훈수까지 두었다.
장면 3.
2013년 말 교학사 교과서로 촉발된 역사왜곡 논란이 정국을 뜨겁게 달구었다. 당시 교학사 교과서는 거의 책 한권을 다시 쓸 정도로 부실힌 내용과 오류로 가득차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는 뉴라이트의 역사관으로 각계각층의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그런데 그는 교학사 교과서 파동을 "정파나 좌우 진영 간의 이념전쟁으로 변질돼 깊이 우려하고 있다"며 "양쪽 다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그는 역사적 팩트 자체를 견해와 인식의 문제로 치부하며 양비론을 들이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인식대로라면 나치가 저지른 끔찍한 만행인 홀로코스트도 양비론의 잣대로 봐야 할지도 모른다. 교학사 교과서 파동의 본질이 이념문제나 역사해석의 문제가 아닌 역사적 팩트에 대한 악의적인 왜곡이자 도전이라는 것을 그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눈치챘겠지만 위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동일인으로 그는 다름아닌 새정치민주연합의 안철수 의원이다. 필자가 위의 세 가지 경우를 환기시킨 것은 안철수 의원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저보다 명징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각의 사안에 대응하는 안철수 의원의 태도야말로 그에게 향하는 국민적 의혹을 덜어내지 못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나같이 정국을 뒤흔드는 엄중한 사안들임에도 그는 철저히 제3자적 위치에서 현상을 재단하거나, 기계적인 양비론을 내세워 본질에서 멀찌감치 비켜나 있다. 이는 그가 정치에 입문한 이후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첨예한 논쟁과 치열한 공방이 오가는 민감한 이슈에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없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간 후 관찰자적 견지에서 사안을 평가하는 것이 그가 보여온 공통된 흐름이었다.
정치인은 민감한 정치적 사안에 자신의 명확한 입장과 소신을 밝혀야 할 의무가 있다. 대한민국 정치판에서 '어정쩜함'의 다른 표현인 '중도'가 아무리 대유행하고 있다 한들, '생각없음'이나 '입장없음'이 자신의 정치적 소신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구나 현 시국은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인권이 위협받는 권위주의 시대다. 스스로가 범야권에 머물고 있으면서 뜨거운 정치적 사안에 방관자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비겁할 뿐더러 무책임하다.
신드롬을 일으키며 화려하게 정치판에 나타난 안철수 의원에게 국민이 원했던 모습은 이와 같은 두리뭉실함도 의뭉스러움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양비론에 입각해 사안을 동등하게 파악하고 평가했다. 그런 까닭으로 국정원의 불법대선개입과 국정원녀 감금사건이 같은 질감으로 인식되고, 교과서 역사왜곡 논란이 좌우의 이념논쟁으로 치부되는 것이다. 이는 그가 코끼리와 개미가 토해내는 하품 소리의 데시벨을 동일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나 마찬가지다.
안철수 의원을 향한 또 다른 의혹의 중심에는 그가 비판하는 대상과 시기의 문제가 놓여있다. 문재인 대표와 혁신위를 향한 그의 비판은 적나라하다 못해 노골적이다. 그는 어제도 출입기자들과의 오찬 자리에서도 "혁신위가 해당행위를 했다"며 혁신위는 몇 달째 시간만 낭비했고 100% 실패했다고 규정했다. 이와 함께 재신임 국면을 이끌며 당의 혁신에 실패한 문재인 대표를 향해서도 거센 비판을 내뱉었다.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안철수 의원의 성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다 너희들 때문이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는 이번에도 전지적 시점에서 사안을 재단하고 평가하고 있다. 필자는 문재인 대표와 혁신위를 향한 안철수 의원의 비판을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의 비판은 (좋은 의미에서) 선결과제인 당의 혁신과 당의 미래를 위한 충정에서 나온 고언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비판은 때와 장소, 시기가 맞아 떨어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문제는 안철수 의원의 비판이 지나치게 정략적이며 정치공학적이라는 데에 있다.
새누리당이 극심한 당내 패권주의와 계파갈등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강력함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본능에 가까운 '피아구별법'에 있다. 그들은 외부의 적과 싸워야 할 때 적어도 아군을 향해 총질을 해대지는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새누리당이 '친이'와 '친박', '친박'과 '비박'간의 골육상잔에도 불구하고 원내 1당을 놓치지 않는 주된 요인의 하나다. 이전투구 양상으로 치닫던 당내 갈등을 뒤로 하고, 한몸으로 국정교과서를 밀어붙이고 있는 새누리당의 모습은 이 정당이 지역주의에만 의존하는 집단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런데 모든 면에서 열세인 새정치민주연합은 오히려 이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전쟁을 앞둔 중차대한 시점에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순간에도 파벌싸움과 계파싸움으로 날을 지새우고 있다. 이같은 흐름은 지난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하나의 현상으로 굳어져 버렸다. '친노'와 '비노'는 그렇게 결정적인 순간마다 갈등과 분열을 거듭했고, 안철수 의원 역시 이 대열의 선봉에 있었다. 그는 지난 대선무렵부터 민주당의 '친노'를 겨냥한 지리한 싸움을 계속 해오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나 때와 장소, 그리고 시기다. 안철수 의원이 문재인 대표와 혁신위를 비판하는 것은 당원으로서 지극히 정당한 의사표현이다. 그러나 지금은 정부와 새누리당이 국정체제를 밀어붙이기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는 국면이다. 이런 상황에서 안철수 의원은 지난 9월에 이어 다시금 문재인 대표와 혁신위를 강력하게 성토하고 있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치열한 교전을 벌이는 와중에 아군의 지휘부를 향해 오발탄을 쏜 셈이다. 혁신위가 해당행위를 한 것이면 안철수 의원은 이적행위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동안 안철수 의원이 보여준 모습은 신기루같은 불확정성의 정치이며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제3자적 위치에서 바라보는 관찰자의 정치였다. 게다가 그는 국정원 사건, 촛불집회, 교과서 역사왜곡 같은 시시비비를 명확히 가려야 하는 정치적 사안에조차 무의미한 양비론으로 일관하며 수많은 지지자들의 어이를 상실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모습은 평론가의 몫이지 개혁과 혁신을 꿈꾸는 현실 정치인의 몫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수많은 국민들이 반대하고 있는 교과서 국정화를 정부 여당이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즈음에 나온 안철수 의원의 혁신위 비판은 정치인 안철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판단의 근거로 대단히 유효하다. 안타깝게도 안철수 의원의 모습은 자신이 그토록 혐오했던, 정치공학에 투철한 기성 정치인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국민이 간절히 원했던 것은 정치 개혁가로서의 '안철수'의 모습이지, 중도개혁가로 포장된 정치공학도 '안철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 기본적인 사실을 망각한 채 계속 정치를 할 요량이라면 차라리 그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다. 대한민국 정치를 위해서도, 그 자신을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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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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