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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하이데거의 슈피겔 인터뷰-3
게시물ID : phil_619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에티카의정신
추천 : 4
조회수 : 1058회
댓글수 : 28개
등록시간 : 2013/07/16 00:09:12

슈피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1933년에 좁은 의미에서는 비정치적인 인간으로서 당신은 소위 새시대의 여명임을 내세우는 정치운동에 빠져들었다.

하이데거
대학의 문제를 다루는 도중에...

슈피겔
... 대학의 문제를 다루는 도중에 소위 새시대의 여명이라는 것에 빠져들었다. 약 일년 후에 당신은 거기서 주어진 역할을 포기했다. 그러나 1935년의 한 강의에서, 이 강의는 그 후 1953년에 <형이상학 입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당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 국가사회주의의 철학이라는 이름 아래 시장에 판매되고 있는 것들은 이 움직임의 내적 진리와 거대함(다시 말해서 지구전체를 지배하는 기술이라는 것과 근대적 인간의 상봉이라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며, 그와 같은 것은 이 <가치>, 그리고 <전체성>이라는 흙탕물 속에서 그물질을 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형이상학 입문, 박휘근 옮김, 서광사, 1994, 318쪽). 이 부분은 1953년에, 즉 책을 출간할 때에 추가한 것인가? 즉 1953년의 독자들에게 1935년에 그 운동, 즉 국가 사회주의의 내적 진리와 위대성을 당신이 어떻게 보았는가를 설명(변명)하기 위해서. 아니면 그 부분이 1935년에 이미 처음부터 들어있었는가?


코페르니쿠스의 우주

하이데거
그 구절은 처음부터 나의 수고(手稿)에 들어 있었으며, 그 당시 기술(Technik)에 대한 나의 생각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물론 기술의 본질을 "Ge-Stell"(닦달, 몰아세움)로 파악하는 그 이후의 해석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 구절을 소리내어 읽지 않은 것은 청강자들이 나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우둔한 자나, 스파이, 염탐꾼들만이 나를 다른 식으로 이해하려고 했고 그렇게 했다.

슈피겔
공산주의 운동 역시 그런 식으로 분류될 수 있었을까?

하이데거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공산주의 운동 역시 전(全)지구적인 기술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슈피겔
아메리카니즘(Amerikanismus)도?

하이데거
역 시 그렇다고 말했을 것이다. 지난 30년간 현대 기술의 전지구적인 운동은 그것의 역사 규정력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만큼 강력한 것임이 더욱 분명해 졌다. 내가 볼 때 오늘날 결정적인 물음은 정치적 체제가 어떻게 그러한 기술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가? 어떤 정치 체제가 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물음들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나는 민주주의가 그 대안이라고 확신하지 않는다.

슈피겔
" 민주주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생각들을 의미할 수 있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문제는 민주주의라는 그러한 정치 구조의 변형이 여전히 가능하냐는 것이다. 1945년 이후 당신은 서구 세계의 정치적 지향에 대해 언급했는데 거기서 민주주의와 정치적으로 표출된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 그리고 입헌국가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러한 모든 지향들을 당신은 <불완전한 것>이라고 불렀다.

하이데거
우 선 내가 어디에서 민주주의와 당신이 언급한 것들에 대해 그렇게 말했었는지 알려달라. 그러한 지향들에서 기술적 세계와의 참된 대결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불완전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나의 관점에서 볼 때, 그 것들은 기술이란 본질적으로 인간이 통제하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기술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혼자 힘으로는 지배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슈피겔
당신이 보기에 방금 묘사한 것들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시기 적절한가?

하이데거
모 르겠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결정적인 물음을 본다. 우선 당신이 <시기 적절한>이라는 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혀져야 한다, 즉 <시간>이란 무엇인가가 해명되어야 한다. 거기에 더해서 시기 적절성이 인간 행위의 <내적 진리>를 평가하는 기준인지, 또는 모든 오해에도 불구하고 사유(思惟)와 시작(詩作)이 그러한 기준을 부여하는 행위가 아닌지 물어야 한다.

 


달에 도달한 인간

슈피겔
인 간이 영원히 자신의 도구를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괴테의 시(詩)에 등장하는 <마법사의 제자>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현대 기술의 도구가 확실히 거대하긴 하지만 우리가 제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 비관적인 것 아닌가?

하이데거
비 관주의라고. 아니다. 비관주의(Pessimismus)와 낙관주의(Optimismus)는 지금 논의되는 영역에서는 매우 불충분한 입장이다. 그러고 무엇보다도 현대 기술은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도구와는 더 이상 상관없는 것이다.

슈피겔
왜 우리가 그처럼 철저하게 기술에 정복당해야 하는가?

하이데거
나는 정복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기술의 본질에 응답할 수 있는 방법을 아직은 찾지 못했다고 말했을 뿐이다.

슈피겔
그 러나 모든 것이 이렇게 잘 기능 하는데 도대체 무엇이 극복되어야 하는가? 하는 매우 소박한 물음으로 당신에게 이의를 제기 할 수도 있다. 더 많은 발전소가 더 능숙하게 지어진다. 인간은 지구의 고도로 기술화된 지역에서 잘 부양되고 있다. 우리는 번영 속에 살고 있다. 여기서 정말로 결여되어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하이데거
모 든 것이 잘 기능하고 있다. 모든 것이 기능하고 있다는 그 것, 그리고 그러한 기능함이 점점 우리를 끊임없이 더 확장된 기능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 기술이 대지(大地, Erde)로부터 인간을 더욱 떼어놓고 뿌리 뽑는다는 바로 그 것이 섬뜩한 것이다. 달로부터 지구로 전송되어 온 사진을 보았을 때 당신은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정말 충격을 받았다. 핵 폭탄도 필요하지 않다. 인간의 뿌리뽑힘은 이미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순수하게 기술적인 관계만 남아있다. 오늘날 인간이 살고 있는 곳은 더 이상 대지라고 할 수 없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최근에 나는 시인이며 저항 운동가인 르네 샤르(Rene Char)와 프로방스에서 긴 대화를 나누었다. 미사일 기지가 프로방스에 건설되자 그 지방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감상적인 과장이나 목가적인 찬미와는 거리가 먼 이 시인은 만약 시와 사유가 다시 한번 힘(폭력적이지 않은)을 얻지 못한다면 그곳에서 벌어진 인간의 뿌리뽑힘은 결국 종말이 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슈피겔
우 리는 여기 이 지구에 살아야 하고, 일생동안 거기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지구에 존재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지 아닌지 누가 알겠는가? 인간에게 정해진 운명이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인간이 지구로부터 다른 행성으로 옮겨 갈 가능성도 어쨌든 볼 수 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의 터전이 여기라고 어디에 쓰여져 있단 말인가?

하이데거
내가 아는 한 인간의 경험과 역사에 따르면 모든 본질적이고 위대한 것들은 인간이 고향을 갖고 있고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데에서 기원한다. 예를 들어 현대 문학은 파괴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슈피겔
당 신의 철학으로 인해 <니힐리스틱(nihilistisch)>이라는 말이 매우 포괄적인 의미연관을 갖게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파괴적(destruktiv)>이라는 말은 의외의 개념이다. 니힐리즘의 일부로 볼 수 있고 또 보아야만 하는 문학과 관련해서 당신이 <파괴적>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우리에게는 놀랍다.

 


오두막에서의 하이데거

하이데거
내가 말한 문학은 내가 니힐리즘을 생각하는 방식에서는 니힐리스틱하다고 할 수 없다.

슈피겔
당신은 완벽하게 기술화된 상태로 이끌거나 이미 이끈 세계운동(Weltbewegung)을 분명하게 목격하였다. 이것은 앞에서 이미 말한 바이다.

하이데거
그렇다.

슈피겔
좋 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개별 인간이 어떤 식으로든 그러한 강제의 그물 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혹은 철학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또는 철학이 개인이나 여러 개인들을 특정한 행동으로 이끌어 양자가 함께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하이데거
짧 게 그러나 오랜 숙고를 통해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다. 철학은 세계의 현재 상태에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이 것은 철학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적인 사고와 노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유일하게 남은 가능성은 사유와 시작을 통해 신의 출현이나 몰락 속에서 신의 부재를 예비하는 것이다. 부재 하는 신 앞에서 우리는 몰락한다.

슈피겔
당신의 사유와 그러한 신의 도래(到來) 사이에 어떤 하나의 연관이 존재하는가? 당신이 보기에 일종의 인과관계가 거기에 놓였는가? 당신은 우리가 신을 다시 불러내 사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이데거
우리가 신을 다시 불러내 사유할 수는 없다. 기껏해야 기다림의 예비를 일깨울 수 있을 뿐이다.

슈피겔
그러나 도울 수는 있지 않은가?


철학자 칸트

하이데거
기 다림의 예비가 첫 번째 단계일 것이다. 인간에 의해, 지금 존재하는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세계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인간 없이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것은 내가 오랜 동안 전승되어왔고, 다의적이며 이제는 낡은 단어인 "존재"라는 말로 부르는 바로 그것이 자신의 개방과 보존, 형성을 위해 인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과 연관되는 것이다. 종종 조롱거리가 되고 얼마간은 부적당한 표현인 "Ge-Stell"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나는 기술의 본질을 본다. "Ge-Stell"의 지배는 이런 것이다. 인간은 기술의 본질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의해 내몰리고, 호출되고, 도전 받는다. 이러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사유가 필요하지 않다. 철학은 종말에 도달했다.

슈피겔
일 찍이, 그러나 옛날에만 국한하지 않고, 철학은 간접적으로, 드물게는 직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새로운 흐름의 출현을 촉진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 왔다. 독일의 경우 맑스를 제외한다하더라도 칸트, 헤겔에서 니체에 이르는 위대한 이름을 떠올려 본다면, 철학이 간접적인 방식이지만 엄청난 영향을 끼쳐왔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신은 정말로 철학의 영향력이 종말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전통적인 철학이 죽었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철학의 영향력 - 그것이 항상 거기에 존재해 왔다고 한다면 - 이 오늘날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주장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이데거
"다른 사유"를 통해 간접적인 영향이 가능하다. 그러나 직접적인 것은 불가능하다. 사유가 세계의 현재 상황을 말하자면 인과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다.

슈피겔
미 안하지만 우리는 지금 철학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지점에서 정치와 철학의 경계선에 이르렀다. 우리가 당신을 이런 대화로 이끈 것을 용서해 달라. 당신은 방금 철학과 개별적인 인간은 ... 이외에는 할 수 없다고...

하이데거
기 다림의 예비, 신의 도래나 부재에 열리 채로 있음. 부재의 경험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자들 사이에 빠져있음"이라고 부른 상태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오늘날 존재하는 것에 대한 숙고는 앞서 말한 기다림의 예비에 속한다.

슈피겔
그 렇다면 사실상 저 중요한 충격은 밖으로부터, 즉 신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와야만 한다. 따라서 사유는 오늘날 더 이상 스스로, 자율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인가?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앞선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이며, 내가 볼 때는 우리들의 생각이기도 하다.

하이데거
그러나 직접적인 방식은 아니다.

 


이론과 실천(맑스)

슈피겔
앞 에서 위대한 변혁가로 칸트와 헤겔, 맑스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의 발전과 현대적 세계 일반의 성립과 관련해 라이프니쯔로부터 온 충격도 있다. 당신은 이제 더 이상 그러한 영향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하이데거
철 학에서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 철학이 지금까지 해온 역할을 과학이 가져갔다. 사유의 <영향>을 적합하게 해명하기 위해서는 작용과 작용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더 철저하게 논의되어야만 한다. 충족 이유율(근거율)을 충분히 해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연, 동인, 촉진, 보조, 방해, 협력 등의 근본적인 구분이 필요하다. 철학은 심리학, 논리학, 정치학 같은 개별 과학들로 해소된다.

슈피겔
그렇다면 어떤 것이 철학의 지위를 넘겨 받게되는가?

하이데거
인공두뇌학(Kybernetik).

슈피겔
또는 자신을 열어두는 경건한 자?

하이데거
그러나 더 이상 철학은 아니다.

슈피겔
그렇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하이데거
나는 그것을 "다른 사유"라고 부른다.

슈피겔
당신이 다른 사유라고 부르는 것을 좀더 명확하게 정식화해줄 수 있는가?

 


철학자 니체

하이데거
내 강연 <기술에 대한 물음>을 끝맺는 마지막 문장, "물음은 사유의 경건함이다"하는 말을 기억하고 있는가?

슈피겔
우 리가 납득할 수 있는 한 문장을 당신의 니체 강연에서 발견했다. 당신은 "철학적 사유에는 가능한 최고의 구속이 지배하기 때문에 위대한 사상가들은 모두 동일한 것을 사유한다. 그럼에도 이 동일한 것은 너무도 본질적이고 풍부해서 결코 개별자가 그것을 모두 퍼낼 수 없다. 개별자는 단지 자신을 거기에 더 강하게 구속시킬 수 있을 뿐이다"하고 말했다. 그러나 당신의 의견에 따르면 이러한 철학적 노력들이 이제는 분명한 종말에 도달했다는 것이 된다.

하이데거
그 것들은 종말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것이 소멸되어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다. 바로 지금과 같은 대화 속에서 새롭게 현재화된다. 지난 30년간 강의와 연구를 통해 이루어진 나의 모든 작업은 핵심적으로는 서양 철학의 해석이었을 뿐이다. 사유의 역사적인 근원으로의 회귀나, 그리스 철학 이후 아직도 물어지지 않고 있는 물음의 숙고는 전통으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다. 니체가 무너뜨린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사유 방식은 이제 막 시작된 기술 시대의 근본 경향을 적절하게 사유하면서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더 이상 제공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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