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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바로 알기
게시물ID : sisa_61965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넥스트
추천 : 5
조회수 : 90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10/27 01:15:32
1.김재규의 출생지
아이러니 하게도 지금 박씨 가문 종교화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경북 구미 출생
즉 박정희의 고향 후배
 
2.김재규는 5.16 쿠데타에 참여했나?
아님, 오히려 군의 정치 개입을 반대하던 이종찬 장군 계열의 인물이었고 이로인해 5.16 쿠데타 직후에는
반혁명분자로 분류되어 연금당하기도 했으나 박정희와 동향 출신에 육사동기라는 이유로 풀려나서 군에 복귀했음
(박정희도 김재규도 모두 해방이후 육사의 전신인 조선국방경비산관학교 2기생임)
 
3.언제부터 박정희 정권에 참여했나
유신 직후인 73년 초 3군단장으로 지내던중 사실상 강제예편 했음. 이건 당시 쿠데타를 병적으로 두려워하던 박정희가
군내에 명망높은 장성들을 조기예편 시키는 방법을 자주 썼는데 그 일환이었던 것으로 추정됨.
그후 유신정우회의 국회의원을 거쳐서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등을 지내다가 76년 12월 중앙정보부장이 됨
 
4.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온건주의 노선으로 중앙정보부를 개혁하려는 시도를 많이 했음.
남산의 고문실을 없애거나 강압수사를 금지시키고 중앙정보부를 대외정보 활동에 주력하는 부서로 개편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음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김재규의 온건주의 노선이 권력의 중심을 차지철과 경호실로 옮겨가게 만들었음.
즉 박정희의 명령이라면 미친개 마냥 따르던 차지철과 독재자 박정희의 눈에 차지않던 김재규의 다툼에서 김재규가 밀려난 것
만약 김재규가 전임 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이나 이후락 같은 인물이었다면 권력다툼에서 차지철에게 밀려날 일도 없었을듯
 
5.김재규와 박정희
-71년 대선당시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이번이 마지막임을 국민들에게 약속하라고 건의했고 그걸 믿었는데 유신이 발표되자
박정희가 다 망쳐놨다며 부하들 앞에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는 증언이 다수 있음.
-김재규가 3군단장으로 있던 당시 휘하 연대의 작전참모였던 오춘근은 김재규가 박정희가 3군단 순시를 올때 그를 강제연금하고
하야성명을 받아낸다는 계획을 수립한적이 있었음을 증언했음.
-고 김수환 추기경의 생전 증언에 따르면 유신시절 당시 정보부장이던 김재규가 자신을 찾아와 박정희를 환자에 비교하며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걸 듣고 굉장히 놀랐다고 했음. 김재규는 당시 김수환 추기경에게 청와대로 들어가 박정희에게 충고를 해달라고 부탁까지
했다고 함.
-또한 의외의 사실은 의문사 당한 고 장준하 선생과도 상당한 친분이 있었다고 함.
장준하 선생의 아들인 장호권씨는 75년 김재규가 건설부 장관 시절 중앙일보사 근처의 냉면집에서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가졌을때
자신이 직접 수행했으나 둘이서 무슨 밀담을 나눴는지는 듣지 못했다고 증언했음.
둘은 이미 75년 이전부터 꽤 친분이 있었고 장준하 선생이 의문사 당한 뒤에도 그 가족들을 도왔다고 함.
또 장호권씨의 증언에 따르면 76년에 중앙정보부장이 된 김재규가 자신을 찾아와 장선생은 사고로 돌아가신게 아니라 정권 차원에서
제거되신거다 라는 말을 했다는 증언도 있음
-장준하 선생의 측근들 증언에 따르면 장준하 선생은 돌아가시기 전 은밀히 거사를 준비했고, 거사의 협조자이자 군에 명망있는 인사중에
자신을 도울 사람이 있음을 말했다고 하는데 이 사람이 김재규일 거라고 추정하는 사람이 많음.
 
이와 관련된 오마이뉴스 기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64511
 
6. 79년 10월 26일
 
이날의 사건이 어떻게 진행 되었는지는 워낙 다양한 매체에서 다뤄졌으니 넘어가고
중요한건 이날 거사가 과연 계획적인 것이냐 우발적인 것이냐에 대한 견해만 밝히고 마무리 하겠음.
이날의 거사 직후 김재규가 벌인 이해 할수 없는 행동들을 미루어 보건데 사전에 철저히 준비된 계획은 절대 아니었다고 봄
단지 이전의 증언들을 미루어 보아 김재규는 처음부터 유신체제에 대해서 상당히 노골적일 정도로 불만을 가진 사람이었고
때마침 격화되던 부마 항쟁의 현장을 직접 보고온 김재규는 이 시점에서 무언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큰 사단이 날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을거라고 봄.
그러나 하필이면 현장에서 박정희와 차지철이 캄보디아,폴포트 등을 언급하며 대규모 학살을 벌일수도 있음을 시사하자
더이상 참지 못했을거라 추측됨.
왜냐 학살이 벌어진다면 그순간 부터 자신이 유신에 어떤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떻게든 피해를 막아보려 했다는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고
똑같은 학살의 공모자가 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임
김재규가 직접 보고온 부마항쟁의 열기는 대규모 유혈 사태로 진압되던지 아니면 박정희가 물러나던지 말고는 해결책이 없어 보였을거라
생각됨. 그러니 학살의 공모자가 되느니 차라리 이 시점에서 박정희를 죽여야 되겠다는 순간적인 판단이 섰을거라 봄.
그러나 짧은 시간 생각해서 벌인 일이다 보니 차후의 대책에 대한 준비는 전혀 없었고 어쨌거나 자신도 대통령을 죽였다는 정신적인 충격에서
판단력이 흐려진채 적절한 사후대책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육본으로 가면서 결국 뒷일을 망쳐 버린것이 아닐까 생각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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