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四一九革命)은 1960년 4월 대한민국에서 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이 이승만을 대통령에 당선시키고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을 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된 혁명이다.
3·15 부정 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던 시위는 시위대 중의 한 사람으로서 3월 18일경에 실종되었다가 시신에 최루탄이 박힌 채 경상남도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이 4월 11일 부산일보 허종 기자가 작성한 기사를 통해 공개되면서 더욱 격화되었다.[1] 4월 19일 경찰은 경무대에 몰려든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발포 이후 시위대는 무장을 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맞서기도 했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책임을 지고 하야했으며 부통령 당선자였던 이기붕의 일가족은 사퇴 후 동반 자살했다.
2007년 대선 당시 구 민주노동당에서 학생 당원을 동원해 불법 선거운동을 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동원된 학생들은 경기동부연합 성향으로 분류되는 당 청소년위원회 소속으로 영등포의 한 모텔에서 단체로 숙식하며 일명 '댓글 아르바이트'를 했다.
통합진보당 부정 경선 사건은 2012년 3월 14일에서 3월 18일 사이에 치루어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자 경선에 관련된 부정 경선이 발생했다는 의혹으로부터 시작됐다. 3월 17일 ARS 조작 의혹이 제기되었다가 나중에는 컴퓨터를 이용한 부정 경선 의혹으로 확산되었고 일부 ID와 IP가 동일한 것으로 나타나는 등의 부정 경선 의혹이 확산되었다.
3월 17일 야권 단일 후보 선출 과정 부정 경선 의혹을 시작으로 이어 4월의 통합진보당 비례대표자 선출 과정에서도 부정 경선 의혹이 제기되어 논란이 확산되었다.
대통령 선거 직전의 국가정보원의 주장과 다르게 정치 비방활동을 한것이 확인되었고 서울지방경찰청이 국정원 직원의 여론 조작 활동을 발견하였음에도 김용판 서울지방경찰청장의 지시에 따라 대선 3일 전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허위 발표하였다.[1] 국가 기관이 여론 조작에 앞장선 것에 대한 비판과 경찰이 사건을 은폐하는 허위의 발표를 한 것 등이 논란이 되고 있다.
그리고 현재 국정원......쓰레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