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72385.html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은
박정희의 영남대에 어떻게 무너졌나
▶부동산 투기를 하고, 동네 빵집에 진출하고, 권력 앞에 비겁하고, 시류에 영합하는 부자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서라벌’에 정의로운 부자가 살았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300년 넘게 민중의 사랑을 받던 경주 최부자는 일제에 저항하고 해방 뒤 대학에 전 재산을 기부했다가 박정희 정권과의 악연으로 끝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금은 남의 땅에서 조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최부잣집의 기구한 사연을 들어보시죠.1970년 서울 무교동의 한 주점. 당시 서른일곱이던 그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고교 동창생 두 명과 회포를 풀러 평소 다니던 단골집에 온 터였다. 셋은 학교생활을 추억하며 왁자지껄 술을 마셨다. 그러던 중 최씨의 무슨 말 때문이었을까? 어느 순간 친구 둘의 안색이 굳어졌다. 차례로 화장실에 간다면서 자리를 떴다. 최씨는 그래도 남은 술을 다 먹고 가겠다며 혼자 남았다. 얼마나 지나지 않아 경찰관이 들어왔다.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하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죠? “친구들이 물었죠. 너희 가족 전재산을 넣은 대구대학교를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에게 넘겼는데, 그 이병철이 박정희한테 상납을 했으니까 굉장한 보상을 받았을 거 아니냐? 나는 이병철한테 돈 한 푼 받은 거 없고 우리 할아버지도 그럴 분 아니라고. 화가 나서 큰 소리로 말했죠. 박정희, 이병철이 정경유착해서 남의 것 빼앗고 나라 팔아먹은 사람들 아니냐…” 신고한 사람이 종업원이었는지 친구들이었는지 아직도 그는 모른다.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마친 뒤 유신체제를 준비하고 있던 시절, 종로의 술집 종업원들을 정보과 형사들이 모아두고 수상한 사람은 즉각 신고하라고 교육하던 시절이었다. -경찰에 끌려가서는요? “구둣발로 차이고 실신하고… 밤새 조사를 받았습니다. 조서를 보니까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이 쓰여 있더라고요. 내가 종업원들한테 ‘이북 가면 대접받는데 왜 여기서 술 심부름이나 하고 있냐’고 했다는 겁니다. 게다가 내가 이북에 갔다 왔다고 조서에 써있었습니다. 완력으로 지장을 찍었어요. 80일 구치소에 있다가 1심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풀려났습니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여섯가지 가훈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마지막 ‘경주 최부자’ 고 최준 선생의 손자 최염(80)씨다.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인 경주 최부자의 정신을 유일하게 이어온 종손이자, 일제와 군부독재 시대 경주 최부자의 도전과 핍박 역사의 산 증인이다. 그가 회장을 맡고 있는 서울 종로구 운니동 경주최씨 중앙종친회 사무실에서 지난 1월14일과 22일 두 차례 인터뷰를 했다. -경주 최부자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됐나요? “할아버지(최준)는 생전에 어른들 얘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13대조 정무공 최진립(1568~1636) 어른이 중시조입니다. 공조참판에 기용됐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병자호란 때 종과 수하를 데리고 경기 용인에서 청군과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습니다. 우리 가문이 모두 13대까지 이어져왔는데 흔히 ‘9대(에 걸쳐) 진사, 12대 만석꾼’이라고 합니다. 다만 정무공은 청백리로 살았기 때문에 엄밀히 따져 부자는 아니었습니다.” -부자가 된 건 언제지요? “11대조인 최국선(1631~81) 할아버지 때부터입니다. 처음부터 부자는 아니었어요. 당시 지주는 소작인에게 소작을 주고 8할을 거둬가던 시절이었는데, 소작인들은 섣달이 되면 양식이 없어 장리를 썼어요. 장리는 양식을 빌려 두 배로 갚는 고리채였지요. 한번은 명화적(조선시대 횃불을 들고 약탈하던 강도집단)이 국선 할아버지댁에 쳐들어왔습니다. 할아버지네 소작농과 그 자식들도 들어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 패거리가 양식은 안 가져가고 장리의 증표인 채권서류만 가져간 거예요. 이튿날 친척과 가복들은 ‘우리 덕분에 먹고 살았는데 이럴 수 있느냐’며 배은망덕한 소작놈들을 경주 부윤에 일러 처벌해야 한다고 어르신에게 일렀죠. 한참 말이 없던 국선 어르신은 드디어 입을 열었답니다. ‘그만 둬라. 남은 채권 문서도 모두 돌려주어라. 그리고 앞으로 소작료도 5할만 받도록 하겠다.’” 1923년 경남 진주에서 열린 소작노동자대회에서 나온 요구사항이 ‘소작료를 5할로 낮춰달라’는 것이었으니, 최국선의 결정은 자그마치 300년을 앞선 ‘진보적인’ 조처였다. 최부자를 연구하는 학계에서도 사회적 나눔이 오히려 부를 불러온다는 선순환의 사례로 이 사건을 지목한다. -어떻게 부를 쌓았습니까? “이앙법을 빨리 도입해 소출량을 늘렸어요. 땅도 많이 사들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정보가 잘 유통되지 않던 시대잖아요. 경주 일대에서 논 매물이 나오면 소작농들은 경쟁하듯이 달려와 최부잣집에게 알렸어요. 소작농들은 자신의 지주가 최부자에게 땅을 팔면 소출의 절반을 가져갈 수 있었으니까요. 어르신들은 그렇게 논을 사들여 만석꾼이 됐습니다.” 경주 최부잣집은 조선 중기부터 경주 지역에서 존경받는 유력 가문이 되어간다. 특히 ‘벼슬은 하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등 최씨 집안의 육훈은 정경유착을 멀리 하면서도 서당을 짓는 등 교육사업에 매진하고 농업과 잠업 등 실용에 집중하는 가풍을 만들어왔다. 마지막 최부자로 꼽히는 최준(1884~1970)은 독립운동가 안희제와 함께 백산무역을 운영하며 임시정부 재정부장을 맡아 독립운동 자금줄 역할을 했다. 경북 경주시 교동의 최부잣집은 구한말 의병과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의 은신처가 되었다. 최익현, 신돌석, 박상진, 최시형, 손병희 등 이 집을 거쳐 간 인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1월29일 최염씨와 함께 경북 경주의 최부잣집 교동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27호)을 방문했다. 최씨는 서울에서 살지만, 이곳에 세간살이를 두고 가끔 묵는다. 최준이 묵던 사랑채 안에 들어가니 최준의 아호인 ‘문파’가 걸려 있었다. -지금 이 집은 가문의 소유가 아니지요? “네. 학교법인 영남학원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1967년 영남대에 넘어갔지만 식솔을 내쫓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1959년 상경했고, 10년 전까지 어머니가 사셨지요.” -어렸을 적 집안을 드나들던 독립운동 인사에 대한 기억이 있으신가요? “어렸을 적 최준 할아버지와 바로 이 방(사랑채)에서 함께 잤습니다. 워낙 드나드는 과객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돈을 달라고 온 사람들인데, 아무나 줄 수는 없었죠. 진짜로 임시정부에서 보낸 사람인지 확인했어야 했으니까요. 일제의 첩자에게 쉽게 돈을 줬다가는 당신도 잡혀가실 터이니까요. 할아버지는 사랑채에서 열흘 보름 동안 과객과 술을 먹으며 이 사람이 진짜인지 따져봤습니다. 내가 아랫목에서 잠을 잘 때 할아버지가 과객과 나누는 통음소리와 담배연기가 흘러들어왔습니다.” -할아버지가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동학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1827~98) 선생이 우리 집에 한참 숨어 살았습니다. 홍길동이나 옛날이야기를 많이 해줬답니다. 부잣집 맏아들로 컸던 할아버지는 그때 독립정신을 깨우쳤습니다. 동학 3대 교주인 손병희(1861~1922)도 경찰을 피해 자주 오셔서 오래 묵고 갔습니다. 독립운동 하신 분들로 울타리가 쳐진 셈이었어요. 사촌누나 남편이 박상진(대한광복회 총사령관)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결혼을 해보니, 장인도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고 처삼촌은 김응섭(임시정부 법무장관. 해방 뒤 김구와 남북협상파에 속했다)이었을 정도였으니까요.” 할아버지 최준이 대구대를 세운 이유 최준은 임시정부에 자금을 댔다. 조선국권회복단과 광복회에 참여하고 경주 광명리에서 우편마차를 습격해 탈취한 자금을 관리하는 등 위험한 일에도 나섰지만, <동아일보>·경성방직과 대구은행 등의 발기인으로 참가하는 등 민족자본을 키우는 데도 힘썼다. 짧은 옥고도 치렀다. 하지만 일제는 경주의 거부를 쉽게 건드릴 수 없었다. 해방 뒤 할아버지 최준은 민립대학인 대구대학교를 설립한다. -대구대를 설립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1910년 손병희 선생이 교주로 있는 천도교가 보성전문(고려대의 전신)을 운영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3.1운동에 나서기 전 손 선생이 할아버지를 찾아와 보성전문을 맡아달라고 했습니다. 마침 할아버지는 안희제와 백산무역을 준비하고 있었고, 전 재산을 담보로 내놓고 은행에서 돈을 빌려야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보성전문을 인수할 여력이 없다며 인촌 김성수를 추천했지요. 이 일은 할아버지에게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는데, 해방 이후 대구대 설립에 전 재산을 쏟아부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집안의 반대는 없었습니까? “할아버지는 경주 최부자의 정신을 길이 남기는 길이라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대지주가 재산을 불리던 시대는 지났고, 후손이 재산을 팔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재산을 기부하면서 할아버지는 나에게 의견을 물어보셨어요.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사회 환원을 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할아버지와 지역유지들은 경북종합대학기성회를 발족했고, 대구대학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1952년 한국전쟁 때는 서울에서 피난 온 교수들이 교편을 잡으면서 계림학숙을 만드셨습니다. 계림학숙은 대구대로 들어갔고요. 최씨 집안의 고택, 논, 선산도 다 대구대학으로 넘겼습니다.” 대구대학은 그런대로 운영되어 갔다. 평지풍파가 몰아친 건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였다. 최염씨는 박정희 일가와 ‘악연’이 시작된 그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때 할아버지가 대구대 이사장이었고, 심계원(현재의 감사원)을 다니던 나는 4·19혁명 이후 할아버지를 모시러 대구대 사무주임으로 내려와 있었습니다. 갑자기 문희석 문교부 장관으로부터 올라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장관실에 들어가니까 군복을 입은 대령이 권총을 차고 거수경례를 합디다. 문 장관은 우리에게 ‘대구대 학장 사표를 받아라, 60살 이상 학장, 총장은 사표를 받기로 최고회의에서 결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이화여대 김활란, 중앙대 임영신도 사표를 냈다며 (관련 문서로 보이는) 서류뭉치를 가리키면서 말입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어떻게 사표를 받냐’고 할아버지가 대꾸하니까 ‘우리가 결정했으니까 당연히 해야 합니다’ 하는 거예요.” -자유당 때 부흥부(1955년 설치된 중앙행정기관)장관을 했던 신현확이 대구대 이사로 있었지요? “대구대에서 교수를 해서 잘 압니다. 당시 삼성이 시멘트산업을 시작하려고 신현확을 영입했었습니다. 신현확은 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해 대학을 운영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당시 삼성그룹의 총수였던 이병철에게 제안했고, 이병철은 ‘굿아이디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한테 찾아와 ‘정말 좋은 학교 만들려 하니까 할아버지에게 여쭤달라’고 했습니다.” 1964년 이병철 삼성그룹 대표는 차남 이창희와 함께 경주를 찾아와서 최준과 최염을 만난다. 최준은 대구대 운영권을 흔쾌히 삼성에 ‘구두로’ 넘긴다. “경주 사랑방으로 찾아왔습니다. ‘한수 이남 최고의 대학을 만들겠다’며 대구대를 운영하고 싶다고 할아버지에게 말하더군요. 할아버지는 손병희 선생이 아무 대가없이 보성전문을 맡아달라고 했던 것처럼, 자신도 이병철에게 흔쾌히 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할아버지는 ‘자네가 잘 하고 못 하고 내가 봐야 할 것 아닌가? 내가 이사로 남아 있어야겠네’ 하셨고, 이병철도 ‘당연한 말씀이다, 손자도 이사를 하셔라’고 했습니다.(최준은 손자 최염의 이사직 제안을 거절한다) 그리고 당시 이병철은 물론이고 제일모직 사장과 상무 등이 여러 번 찾아와 금전적 보상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손병희도 돈 한 푼 받지 않고 김성수에게 보성전문을 넘겼다. 대학에는 주인이 없는 것이다. 상거래처럼 계약서를 써선 안 된다’고 거부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대구대에 계속 애정을 보이셨습니다. 삼성이 대학 운영에 미온적인 것 같으니까, 한번은 이병철을 찾아가서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가보인 ‘단계연’(단계석으로 만든 벼루와 오동나무로 만든 벼루집)을 선물로 줬습니다. 그날 밤 할아버지는 나에게 ‘이제 편안하게 자게 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삼성은 대구대 운영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66년 삼성 소유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진다. 곤경에 처한 삼성은 박정희 정권과 긴밀한 협의 속에서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한다고 발표했고 이어 대구대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대구지역의 또다른 사립대인 청구대는 이미 대학운영권이 박정희 정권의 주요 인사들에게 넘어가 있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67년 12월 박정희 정권은 대구대와 청구대를 합병해 영남대를 출범시킨다. ‘교주 박정희의 창학정신에 입각하여…’ -할아버지는 삼성과 정권 사이에서 대구대의 운명이 논의되는 걸 몰랐나요? “전혀 몰랐습니다. 청구대와 대구대의 합병 이사회 통보를 받고서야 알았습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여든이 넘었는데, 이병철 사무실에 쫓아가 소란을 피우니까, 신현확이 달려왔습니다. ‘이가보다 박가가 학교를 훨씬 크게 만들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하면서 노여움을 풀라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내가 이병철한테 돈 받고 팔았는가? 왜 제멋대로 박가한테 주느냐’고 진노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영남대 통합에 반대하신 거네요. “시간이 되어서 할아버지를 모시고 서울 반도호텔 924B호로 옮겼습니다. 대구대와 청구대 각각의 이사회를 마치고 양쪽의 이사들이 모여 최종 통합을 의결하는 자리였습니다. 대구대 이사회 때에 삼성 이사들은 할아버지를 초청 안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이사회에서 ‘이병철을 불러와야 회의가 되지, 안 불러오면 안 된다’고 고함을 지르셨어요. 끝까지 반대하다가 박차고 나오셨습니다. 이사회 자리에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됐습니다’ 하니까 비로소 안건이 처리가 됩디다. 알고보니 문교부 법무관이었습니다. 사립대 합병하는데 왜 문교부 법무관이 앉아있습니까?” 이로 인해 경주 최부자의 모든 재산은 영남대로 넘어갔다. 경주 교동고택도, 조상들이 묻힌 선산도 최부자의 역사가 깃든 유물은 영남대 소유다. 대구대와 청구대의 통합으로 만들어진 영남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퇴임 후 뒷자리로 봐둔 곳이라는 설이 파다했다. 통합 작업은 정부 주도로 이뤄졌다. 이병철 삼성 회장의 큰아들 이맹희의 회고록을 보면, 이후락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 삼성에게 대구대를 넘기라고 했다는 증언이 나온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숨지자, 퍼스트레이디였던 박근혜 현 대통령 당선인은 이듬해인 1980년 29살의 나이로 영남대 이사장에 추대된다. 학내 구성원들의 반발로 박 당선인은 이내 이사장직에서 사퇴하고 이사로 남지만, 1981년 대학정관 제1조에 ‘교주 박정희 선생의 창학정신에 입각해 교육을 실시한다’는 조항이 들어가 논란을 부른다. -박정희 정권이 대구대를 강탈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형식적인 논리로 봤을 때 불법으로 볼 수 없지 않습니까? “서류상으로 합법을 만들어놓고 강탈한 거지요. 학교를 아무한테나 줘도 된다고 맡긴 게 아닙니다. 이병철이 ‘한수 이남의 제일 가는 대학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는데, 3년 만에 대학을 넘겼으니 약속을 어긴 것이지요. 맨처음 이병철도 잘 해보려고 했던 거는 내가 믿습니다. 하지만 지역의 경쟁대학인 청구대를 이미 가져간 박정희 쪽에 밉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테고, 아무리 잘 해봤자 자기 대학이 아니라는 생각도 났을 테고…” -대구대가 영남대로 넘어간 뒤에는 어떻게 사셨나요? “나는 해운회사 등에서 일했습니다. 내가 정관계의 사람을 잘 알았기 때문에 자본이 있는 친구들이 동업을 하자고 했습니다. 최 부자 재산이 남은 건 없지만, 사업 덕분에 곤궁하게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동안 영남대와 연락은 없었나요? “1988년 영남대가 울주군 두동면의 선산(330만㎡·10만평)을 판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당시 조일문 재단이사장한테 달려가서 경주 최씨가 기부한 땅이면 선량하게 관리할 의무도 있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 헐값인 평당 760원에 판다길래 두 배 쳐줄 테니 나와 계약하자고 해도 안 된다고 합디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민간에 팔았습니다. 그때가 박근혜와 측근들이 재단이사로 재직하던 때입니다. 7대 조모가 계시는 경주시 구정동의 4만3000㎡도 온천지구로 고시돼 100억원 이상의 시세가 됐는데도, 단돈 4억원에 차아무개씨에게 매도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1970년입니다. 박정희와 이병철한테 당한 수모를 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풀지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잘 되도록 도우라고 하셨어요.”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지금으로 치면 농협조합장(당시 금융조합장)을 하셨는데, 마음이 좋은 분이셨습니다. 사람들 부탁을 다 들어주고 그랬죠. 6·25동란 직후에 인민군에 협력했다면서 보도연맹 가입자를 처형했는데, 사람들이 유력가문의 아들인 아버지한테 상의를 많이 했고, 중간에 가서 부탁을 해서 수십 명을 살렸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집안 재산을 관리할 수 없다고 보신 거 같아요. 저를 주로 데리고 다녔죠. ” -자제분들도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않으셨나요? “2남1녀인데요. 첫째가 공부를 잘 했습니다. 나는 중어중문학과를 가길 원했는데 법대를 갔지요. 사법고시 보는 걸 말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몇년째 아슬아슬하게 낙방합디다. 아내가 몰래 유명한 법사를 찾아갔대요. 법사가 이르기를 ‘증조할아버지가 잡고 계셔서 안 되는 거다’고 했다더군요. 법사가 써준 부적을 할아버지 무덤에 묻으니까 이듬해 합격했습니다.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지는 않지만요.(웃음)” 실질적인 운영 권한은 아직도 박근혜 ‘박근혜 체제’의 영남대는 순탄치 않았다. 부정입학 등 재단비리가 적발돼 1988년 사립대학으로선 초유의 국정감사를 받게 되고, 박근혜 당선인은 이사직에서마저 물러난다. 2009년까지 영남대는 교육부가 파견한 임시이사 체제로 운영되면서 박정희-박근혜 쪽의 인사들은 형사처벌을 받는 등 학교경영 일선에서 손을 뗀다. 일부 영남대 교수들은 임시이사들과 직선총장이 이끌던 이 기간을 정치적으로 가장 자유로웠던 시기로 꼽는다. 이 기간 최염씨도 재경영남대동창회장을 맡으면서 학교를 도왔다. -이사로 복귀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까? 임시이사 체제에선 가능했을 것 같은데. “할아버지는 항상 대학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사를 할 생각은 앞으로도 없습니다. 대신 동창회장으로 열심히 뛰었습니다. 유창우 총장 시절 국책공과대학에 선정되고 영남대학술진흥재단으로 일하면서 5년 동안 400억원의 국고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박근혜가 다시 나타나리라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2009년 영남대의 임시이사 체제가 끝나면서 사학분쟁조정위원회는 전직 이사에게 정이사 추천권을 부여했다. 박근혜 당선인은 당시 7명의 이사 가운데 4명을 추천했다. 2007년 박근혜 대선캠프 법률지원 특보단장을 맡은 강신욱 전 대법관 등 모두 측근이나 친박계로 분류되는 이들이었다. 그뒤 영남대는 ‘박정희의 대학’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박근혜 당선인의 최측근인 최외출 교수가 대외협력부총장으로 학교경영 일선에 나서고, 박정희리더십연구원, 박정희새마을정책대학원 등이 설립된다. -영남대가 박정희의 대학으로 생각하시나요? “지금 실질적인 운영 권한은 박근혜 당선인이 행사한다고 봅니다. (1988년 11월3일 <조선일보> 기사를 보여주며) 당시 박근혜는 영남대를 떠나면서 ‘차제에 학교 일에서 완전히 손떼겠다’고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2009년 이사 추천권을 행사했어요. 과거 했던 말과 다르지요. 대통령에 당선된 만큼 영남대가 정치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손을 떼야 합니다.” -어떤 방식이 있을까요? “먼저 박근혜의 측근으로 분류된 이사들이 사퇴해야 됩니다.” 지난 1월29일 최염씨는 조상 묘 3위가 있는 울산 울주군의 선산에 찾아가 절을 올렸다. 최씨 집안의 땅도 영남대의 땅도 아니다. 영남대가 민간에 팔았기 때문이다. 최염씨의 7대 조모의 산소가 있는 경북 경주 구정동의 선산도 팔았다. 두 산을 소유한 민간업체는 묘소를 이장하길 원하고 있다. 그는 “얼마 전까지 묘지 이장 촉구문이 붙어 있었다. 보기 흉해 인척들이 뽑아 버렸다”고 말했다. 경주 최부자의 종손 최염씨도 이제 여든이다. 산 오르는 데 힘이 부쳐 애먼 길을 헤매고 말았다. 7대조 할아버지 최언경 어른은 이날 찾아뵙지 못했다. 내려오는 길에 그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집안 땅에 자신을 모시지 않아서 할아버지께서 화나셨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