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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향락을 누리는 곳 '한국'
게시물ID : sisa_62228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사닥호
추천 : 5
조회수 : 1606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11/08 00:33:35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향락을 누리는 곳 '한국'

 

일본인 관광 한국의 실상
1973. 7. 13 [동아일보] 5면


72년 일본교통공사가 발행한 관광안내서에 "한국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욕망을 충족시키는 나라"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관광회사들도 "한국에선 하루 30달러만 쓰면 최고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며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향락을 누리는 곳, 한국 유객작전을 폈다. 관광단 모집 명칭부터 아예 '기생파티 관광단 모집'이라고 한 곳이 많았다. 흥청망청 밤마다 섹스 파티를 벌인다는 노골적 표현만 안 했을 뿐 한국만 가면 바로 기생을 끼고 놀 수 있으며 매매춘도 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60년대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도쿄올림픽도 성공적으로 치른 일본은 일찌감치 자국민 해외여행을 자유화시켰다. 일본 관광단이 해외로 쏟아져 나오며 그 유별난 행태가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40-50명 대부대가 '깃발' 든 인솔자를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단체로 매매춘에 나서는 모습도 보도됐다. "돈만 아는 '경제 동물'이 돈을 좀 벌자 '섹스 동물'이 되었다"는 비난이 높아졌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침공피해를 입은 나라들은 그들의 새로운 '섹스 침공'에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던 1972년. 일본은 중국과 수교하며 대만과의 관계를 청산했다. 대만은 그동안 일본인들의 은밀한 섹스 여행지 노릇을 해왔던 곳. 지리적으로 가깝고 비용면에서도 별 부담이 없던 관광지 한 곳을 잃자 일본 여행사들은 그 대안으로 바로 한국을 점찍었다. 일본인들이 선망하는 '게이샤' 즉 기생을 한국관광 핵심 포인트로 잡아 선전을 시작했다. 5만 엔 정도를 들고 2박3일 한국여행에 나서는 일본 중년남자가 속속 모였다. 72년 한국을 찾은 일본 관광객의 80%는 아내나 가족동반이 아닌 나 홀로 중년남성들이었다.

 

일본의 한국 기생관광 러시는 많은 이의 분노를 자아냈다. 식민지배의 한이 가시지 않은데다 한일국교정상화마저 석연치 않게 이뤄졌다고 믿는 이들이 특히 분노했다. 언론도 비판에 앞장섰다. 관광수입이 주요 외화 획득원이 된 데에는 박수를 치면서도 "아무리 관광을 보이지 않는 무역이요, 달러 획득의 지름길이라 한들 일본인에게 우리 여인의 정조를 상품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관광망국의 우'를 범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미풍한국 흐리는 외빈접대
1971. 11. 25 [동아일보] 7면

 

 

 

한 푼의 외화가 더 중요했던 정부는 ‘수수방관’

 

접객여성 등록증의 허실
1972. 10. 5 [경향신문] 5면


72년 중반 무렵부터 신문들은 일본인들의 매춘관광 실태를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관광단 뒤를 쫓으며 르포기사를 쓴 신문도 있었다. "한국관광 첫날, 낮에 고궁 몇 군데를 대충 둘러본 뒤 바로 관광요정으로 향한다. 1부에선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인들이 나와 제비뽑기로 파트너를 정한다. 2부에선 서먹함을 감추려고 춤과 노래로 흥을 돋운다. 밤 9시쯤 3부가 시작된다. 바로 아가씨들과 호텔로 동행하는 것이다."

 

일본의 한 주간지는 자국민 섹스관광 실태를 이렇게 묘사했다. "50명 단체관광객이 모두 한 명씩 아가씨를 동반하고 희희낙락하며 호텔 엘리베이터에 몰려드는 꼴은 러시아워의 전철 정거장을 연상케 한다." 이 잡지는 "관광객은 원하는 대로 몇 번이고 즐길 수 있다. 기생은 결코 거부하지 않는다."는 낯 뜨거운 코멘트까지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당시 미국의 시사 잡지 타임도 특집기사를 통해 "한국이 일본 호색한들의 도락장이 되었다"고 개탄할 지경이었다.

 

일본인들은 매너도 엉망이었다. 고궁 담벼락에 오줌을 누는 사람, 호텔 로비를 맨발로 다니거나 욕실 옷을 입은 채 거리로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구두를 벗어드는가 하면 모든 층 단추를 눌러 엘리베이터가 설 때마다 시시덕거리는 등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인간이 갖가지 추태를 부렸다. 어느 칼럼니스트는 일단의 일본관광객이 술이 취해 목청껏 일본 군가를 부르는 걸 듣고는 "이런 걸 방관하는 한국이란 나라는 도대체 어떻게 된 나라냐?"며 울분을 터트리기도 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한국 정부는 손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방관하며 외화수입이 느는 것만 즐기고 있었다. 경제개발계획을 세우고 집행하는 정부에겐 당장 한 푼의 외화가 더 중요했다. 경제부처는 물론 모든 장관들은 "적극적 외화획득이 곧 애국"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여기에 고무되어서 일까, 기생관광에 종사하는 어느 여성이 외신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자신이나 가족,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경제발전을 위해 많은 외화가 필요합니다."고 말해 화제가 되었다.


관광지대의 섹스 오염
1981. 8. 14 [경향신문] 3면

 

정부가 기생관광을 국제매춘보다 외화획득의 발판쯤으로 생각하다보니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숫자도 늘었다. 73년 여름 로이터통신은 "한국관광공사엔 안내양이 1천5백 명으로 등록돼 있지만 8천 명이 더 일본인 접대 업무에 종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보도했다. 당시 신문에는 '요정 근무, 초보 우대, 옷 선불 제공' '관광호텔 근무, 초보 환영, 월수 25만 보장' 같은 광고가 심심치 않게 실렸다. 서울 풍속도 연재소설을 쓴 한 작가는 일본인을 상대로 매춘하는 여성을 '단순 매춘부' '콜 걸' '현지처' '고급 계약자'로 구분해 화제가 되었다.


당시 한국에 상주하는 일본인 1천 명 중 독신자가 7백 명이고 그 중 5백 명이 현지처와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경찰은 추산했다. 80년대 초에는 한국 상주 일본인은 약 3천 명이었고 그 중 가족을 동반한 경우는 2백40명에 불과했다. 79년 뉴욕타임스는 일본의 섹스관광이 동남아에서 주로 서울 타이페이 방콕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도하며 50만 명의 일본인이 서울을 찾는데 그 중 여성은 3만에 불과하다고 보도했다.

 

리영희는 70년대 중반에 낸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일본인 섹스관광에 대해 이렇게 개탄했다. "정부나 국가가 그 여성국민에게 통행금지 면책특권을 주면서까지 외국인 사나이들을 끌어들이는 정책은, 딸을 바치고 그 대가로 부자가 되는 아비와 얼마나 도덕적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 돈으로 국민이 얼마나 부해지며 국가가 얼마나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지…"


기생관광 다시활개 요정마다 100여명씩
1983. 3. 25 [동아일보] 7면


출처 조선일보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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