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도
어렸을 적엔 종이비행기 정말 많이 만들어보셨을 겁니다. 종이비행기 만드는 거 정말 쉽죠. 생각해보세요. 비행기.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인간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걸 꿈꾸다니요. 따지고 보면 세상 어떤 것보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데도 불구하고 가장 만들기 쉽다는 점에서 누구나 꿈꾸고 있는 인간 본연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나타내고 있는 듯도 하네요.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바람이 분다' 역시 이런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번 작품에서의 핵심은 오로지 '호리코시 지로'라는 주인공뿐입니다. 과거 하야오 작품에서 주인공과 끊임없이 부딫히는 건 거대하고 부조리한 사회이거나, 혹은 악당들이었습니다. 주인공들은 분명 옳은 선택을 했고, 우리는 그들의 시선에서 함께 부조리에 맞서며 성장하거나 사랑을 쟁취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다릅니다. 주인공과 부딫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인물도, 배경도. 심지어 모두가 문제삼는 2차대전도 절대 아니에요. 그건 철저하게 배경으로서 존재할 뿐이에요. 이 영화는 전쟁중의 일본이 얼마나 무자비했는가, 잘못을 저질렀는가를 조명하려는 게 아닙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문제삼는 것은 바로 주인공인 호리코시 지로 그 자신입니다. 여태까지 하야오의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선했죠. 용기있고, 모두들 자신이 발디디고 있는 조그마한 세계를 바꾸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고군분투했고, 끝내 그것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끝을 맺습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끝내 치히로는 자신의 이름을 되찾게 되었고, 나름의 성장을 이루게 되죠.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는 소피와 하울은 각자 지니고 있던 자괴감을 극복해내게 되고요.
호리코시 지로 역시 이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이토록 대단하고 끈기있는 열정을 지닌 인물은 처음입니다. 영화에서 시종 그는 눈을 반짝이며 자신이 만든 비행기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풍경을 꿈꾸고, 대부분의 장면에서 책상에 파묻혀 설계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멋지죠. 그가 만들어낸 종이비행기는 꿈이었죠. 가장 신속하고, 아름답게.
하지만 지로의 문제는 바로 그것입니다. 순수한 열정.
아이러니하죠.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꿈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다만 그것이 오로지 꿈을 이루는 것일 뿐, 어떤 방향일지는 아무래도 괜찮았던 것입니다. 거기서 그의 순수함은 그 무엇보다 추악하고 무자비한 폭력으로 돌변합니다. 제로센이라는 비행기는 아름다웠지만 결국 전투기였고, 그는 그것을 알면서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영화 중간에 ‘비행기는 전투보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면 될뿐인데’라며 중얼거리긴 하지만, 정말 그것은 의미없는 자기만의 독백이었죠. 스스로도 알고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길이라는 걸.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알아두셔야 할게, 영화에선 결코 지로에 대해 긍정한 적 없습니다.
몇몇 장면들이 있었죠. 지로는 밤거리에서, 늦게 퇴근하는 부모님을 기다리며 서있는 아이 셋을 봅니다. 그들에게 방금 산 카스테라를 내밀죠. 그러나 그들은 주저하다가 지로를 무시하고 도망가버립니다. 가로등 아래에서 지로는 망연하게 그들을 바라보게 되죠. 그의 순수한 호의는 분명히 겉으로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행동이 가져올 내밀한 문제같은 것은 캐치하지 못하죠. 방에 돌아와서는 친구에게 ‘그런 행동은 위선’이라는 말까지 듣고요.
또한 그는 두꺼운 안경을 끼고 있죠. 어릴적에 안경을 벗고 지붕에 올라가는 장면이 있죠. 그러나 그에겐 희미한 별들이 몇 개 보일 뿐, 아무리 눈을 가늘게 떠보아도 움직이는 유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머나먼, 형체만 보일뿐인 꿈을 쫒을 뿐, 막상 눈앞에서 생동하는 것들은 보이지 않아요.
담배를 핀다는 점은 ‘붉은 돼지’의 포르코와 대비됩니다. 군과 국가의 족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방황하는 포르코가 조용한 아지트에서 피는 담배는 진정한 자유를 나타내는 것이었지만, 꽉막힌 꿈에 대한 열망으로 사로잡혀있던 지로에게 담배는 꿈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고통을 잊기위한 것이겠죠.
더불어 마지막에는 끊임없이 아내의 병보다 비행기 설계를 우선시하는 지로를 보여줍니다. 몇 번이고 그의 이러한 무신경함에 대해 언급이 되는데, 커서 의사가 된 지로의 사촌 여동생의 입을 빌려 그를 직접적으로 비난하기까지 하죠.
제목에 대해 몇가지 써보자면, '바람이 분다'란 제목이 참으로 많은 것을 함의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영화가 시작하기 전 폴 발레리의 시구가 나오죠.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
작중에서도 음악보다 바람소리가 더 많이 들리는 것 같죠?
또 중간중간에 지로는 꿈을 꿉니다. 그 꿈 속에서 롤모델인 카프로니 백작과 몇번 대화하게 되는데, 반드시 '바람'에 대한 언급이 나오죠. 백작은 물어봅니다. 바람이 불고있는가. 그때마다 지로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죠. 네.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라는 건 비행기에 전념하고 있는 자신을 뒤흔드는 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일수도 있고, 그 자신의 변하지않는 비행기 설계라는 꿈일 수도 있겠네요.
곧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는 건
1. 나를 어지럽히는 외부의 세력이 있지만, 그래도 꿈을 향해 나아가겠다.
2. 내 꿈은 여전히 이글거리고 있다. 그것때문이라도 살아야한다. 라는 뜻으로도 볼수있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이루고있는 꿈이라는 것이 존재를 앞서나가게 되고, 결국 꿈에 메어 다른 중요한 것들은 일부로 잊어버리고 마는 거죠.
호리코시 지로라는 인물은 비행기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는 하야오 영화에 나오는 모든 주인공들처럼, 조금도 물질적인 욕망이 없는 소년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어요. 사상성도 없고요. 실제인물은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여기서의 그는 전쟁에 미쳐있는 학살자는 아닌것같네요. 하지만 그가 무관심하다고 해서 죄가 덜어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너무나 절실하고 끈기있는 열정과 무방향성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게 되었죠. 개인의 열망이라는 것이 단순히 전진하는 것에 대한 공포를 그 무엇보다 잘 보여준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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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의 예고편이 막 떴을 때 즈음, 지로라는 인물에 대한 추측을 한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어떻게 처음부터 제로센이 전투기인 줄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하야오는 비행기가 자유니 어쩌니 말을 할 수 있는 걸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본편을 보니 이해가 되는군요. 미야자키 하야오는 지로라는 인물을 애초부터 잘못된 길로 들어선 자로 설정하려고 정해놓았던 거라고 생각되네요.
아무튼 하야오의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환상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현실의 절절한 피의 내음이 풍기는 이야기였습니다. 이게 마지막 작품이라고 하시니 정말 안타깝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