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에 대한 근원적 동경 상서로운 징조 ‘하얀 동물’
2004-04-20 주간동아
“길조(吉兆)를 알리는 흰까치 한 마리가 경북 군위에 나타나 마을의 들판과 산을 날아다녀 신비감을 더해주고 있다.”
4월4일, 각 언론에서는 온통 흰색으로 물든 신기한 까치를 길조로 소개했다. 흰색 동물을 상서로운 징조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시아 문화권의 유구한 전통이다. 우리 역사에도 비슷한 기록이 많이 전해온다. 이는 비단 흰까치에 국한되지 않는다. 흰꿩 흰까마귀 흰노루 흰사슴 흰뱀 등등. 오래 전부터 특히 피부나 털이 하얀 동물을 나라에 상서롭고 길한 조짐으로 여겼다.
과학적으로 보자면 어떤 동물이 흰 피부나 흰 털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에게 이롭다는 증거나 근거는 없다. 이는 단지 생물학적인 돌연변이의 일종으로 피부나 털에 있어야 할 색소가 빠져서 생긴 특이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같은 색소 돌연변이는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채 일어나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방사선이나 화학약품의 영향으로도 생길 수 있다고 하니 어쩌면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과학적 근거가 부족했던 선조들에게는 이런 신기한 동물이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는 이유만으로 길조로 받아들였는지 모른다. 우리 역사에 처음으로 기록된 흰색 동물은 기원전 18년, 고구려 제2대 임금인 유리왕이 사냥에서 잡았다는 흰노루다. ‘삼국사기’에는 이것말고도 상당수의 흰색 동물들이 등장한다. 기원 213년 백제 초고왕은 흰사슴을 잡아 바친 사람에게 곡식 100석을 하사했고, 441년 신라 눌지왕은 흰꿩을 잡아 바친 관리에게 역시 큰 상을 내렸다.
남의 나라 얘기로는 ‘일본서기’에 남아 있는 기록을 들 수 있다. 650년 2월 어느 농부가 흰꿩을 잡아 바치자 대궐에서는 그 의미를 두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마침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백제 귀족(기록은 그를 백제군(君) ‘부여풍’으로 전한다)이 “그것은 중국 한나라 때도 있었던 상서로운 징조로 태평성대를 의미한다”고 설명하자, 천황은 그 꿩을 날려보내고 이를 잡아 바친 농부에게 커다란 상을 하사했음은 물론 연호(年號)를 흰꿩이란 뜻의 ‘백치(白雉)’로 고치기도 했다.
연호로 눈길을 돌리자면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 연호 가운데 상당수가 흰색 동물을 기념하고 있다. 일본에는 흰꿩 ‘백치(650~654년)’ 이외에도 흰사슴(白鹿ㆍ1345~1346년) 흰봉황(白鳳ㆍ673년)이 있고, 중국에는 흰용(白龍ㆍ925~926년)과 흰참새(白雀ㆍ384~386년)가 있다. 그렇다고 반드시 하얗게 돌연변이한 동물만을 상서로운 일로 여긴 것은 아니다. 때로는 붉은 새, 다리 셋 달린 까마귀 역시 길조로 여겼고, 이밖에도 거북 용 사슴 기린 봉황 등의 특색 있거나 상상 속의 동물도 길조로 여겨져 연호로 채택됐다.
하지만 그것이 동물인 이상 어찌 인간세계의 흥망성쇠를 예측할 수 있겠는가. 이미 세종대왕은 1432년 3월 흰꿩이 출현하여 신하들이 축하하자 이런 말로 사양한 일이 있다.
“나같이 덕이 부족한 사람이 어찌 상서를 응하게 할 수 있겠는가. 요행으로 그런 일이 생긴 것일 뿐이니 과인의 덕에 상응함이 아니로다.”
오늘날까지도 세종의 덕이 전해져 내려오는 이유도 이 같은 겸손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한국에서 흰뱀이 특별나게 값나가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본 셈이다. 흰색 동물 숭배 사상은 돌연변이에 의한 해프닝으로 폄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학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순백에 대한 근원적 동경이 그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것쯤은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백의민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