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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문관 시절 이야기.
게시물ID : military_2993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eio
추천 : 76
조회수 : 10083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3/09/06 13:47:13
 
군대를 다녀왔거나 이제 군대를 갈 사람이라면 군생활 중 누구나 거치는 과정이 있다.
 
바로 고문관 시절이다. 자기는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겠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되새겨 보면 분명 누구나 그런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군인이 100프로 그렇다고 확신할 순 없지만 적어도 나나 내 선임들 내가 군생활의 시작을 지켜보았던 후임들의 경우는
그 누구도 예외는 없었다. 다만 그 기간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누구나 한번쯤은 거쳐가는 시기가 있을 것이다.
 
고문관이 되는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사회에서의 습관이나 버릇. 개념 유무. 눈치의 정도 등등. 가끔씩 아무리 노력해도
갱생이 불가능한 선천적인 요인을 타고난 사람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 극복이 가능하다.
자신의 노력이 중요하지만 상급병들의 조언과 격려도 고문관 갱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물론 그 조언과 격려가
항상 따뜻하지 많은 않다. 사실 조언과 격려가 쌍시옷과 된소리들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가 태반인데다 물리적인 고통이 동반되는
경우가 왕왕 있기는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어느새 한사람 분의 몫을 할 수 있는 군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나도 물론 그 시기를 겪었다. 초반에 겪었던 문제는 잠버릇과 건망증이었다. 처음엔 좋게 넘어가던 고참들도 시간이 지나니 슬슬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군생활의 첫번째 암흑기가 도래했다. 눈치가 없는편은 아니라 내무생활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잠버릇이나 깜빡깜빡 하는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가 않았고 난 그렇게 조금씩 고문관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의 군생활 첫 전술훈련이 시작되었다. 처음 받아보는 훈련이기에 긴장한 상태에서 훈련을 받았고 다행히 아무사고
없이 첫날이 지나갔다. 그리고 둘째날은 전술훈련의 하일라이트인 준비태세 훈련이 있는 날이었다. 전날 자기전 머릿속으로 내가
해야할일을 생각하고 긴장하며 잠이 들었지만 막상 아침이 되니 정신이 없었다. 내가 맡은 임무는 물자분류 였는데 전날 고참들에게
내무실 밖을 나설 때 내무실 안에 10원짜리 하나 있어서는 안된다는 당부의 말을 들었기에 열심히 내무실 물건들을 박스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박스를 봉하고 내무실에서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안을 둘러보다 나는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내무실 구석에서
미처 치우지 못한 박스 하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황급히 뛰어가서 확인해 보니 박스 안에는 보급용 가루비누가 가득 차 있었다.
주기적으로 세탁용 가루비누가 나오는데 우리 소대에서는 사제세제를 사서 썻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아 쌓인 가루비누가 이미 박스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정신이 아득해 짐을 느꼇다. 이미 박스는 봉해져 있었고 이걸 빨리 처리하지 못하면 아마 내가 가루가 될것이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아마 평소상태 였다면 박스채로 들고나가 안보이는 곳에 치우던지 했겠지만 그때의 나는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어찌저찌 처리를 하고 훈련을 마쳤지만 문제는 훈련이 끝나고 몇일이 지나서 발생했다. 처음받는 훈련에
정신이 없던 나는 가루비누를 치웠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제정신이 아니었던 내가 선택한 장소는
참으로 애매한 곳이었다.
 
몇일이 지나고 갑자기 한 고참이 씩씩대며 내무실로 들어와 몇일 전 훈련에서 가루비누를 치운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아차 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슬며시 앞으로 나가자 고참이 나를 끌고 데려간 곳은 화장실이었다. 그리곤 화장실
칸으로 나를 데려갔다. 화장실 변기에선 터지기 전의 화산처럼 거품이 보글보글 피어나고 있었다. 그랬다. 내가 가루비누를 치운곳은
바로 좌변기의 물받는 곳이었다. 그것도 모든 좌변기에.. 그 중에 터진게 있었는지 비누가 다 녹아 물을 내릴때마다 거품이 피어나는
것이었다. 나는 할말이 없어졌고 그 고참은 니가 나의 항문위생에 이렇게 신경써주는지 미처 몰랐다며 된소리로 감사의 말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머지 가루비누들은 어디다 치웠는지 물었고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 나머지 비누들을 치운 장소를 기억해
냈다. 그리고 나는 울고 싶어졌다. 내가 도대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나머지 비누들을 들고 뛰어다니다 문이 열린 방에
무작정 들어가 야전침대 밑에 나머지 비누를 밀어넣고 나왔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방은 중대장 실이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대장실 야전침대 밑에두고 나온것 같습니다.. 라고 말했고 그 고참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가루비누를 회수하기 위해 나는 야간에 몰래 중대장실에 침입해야 했고 그 이후 그 고참은 부드러운 전투화로 나의 정강이를 어루
만져주며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고문관은 보일러실로. 라는 교훈은 군생활 내내 간직하며
지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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