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 음악의 매력은 무엇보다 랩퍼의 실력과 그 진솔한 (혹은 그렇게 느껴지는) 가사, 그리고 랩퍼의 카리스마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하지만 3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비슷비슷한 환경에서 자랐거나 그렇게 자란 것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뮤지션들이 일련의 공통된 주제를 바탕으로 가사를써오다 보니 그에 따른 수많은 과장과 허풍, 거짓말과 변덕이 어느 정도 용인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고발을...... 하고자 하는 건 아니고 그저 재미 삼아 랩퍼들의 흔한 거짓말과 허풍들을 집대성해보았다. 이른바 힙합 속 찬란한 구라의 역사라고나 할까.
'이번 앨범은 클래식이 될 거야!'
기대하는 아티스트가 새 앨범을 작업하는 와중에 하는 인터뷰는 팬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정보가 된다. 보통 팬들의 기대감을 고조시키는 발언이 주를 이루는데, 당시 랩퍼의 감정이 자신감으로 충만하다면, 어김없이 ‘클래식 예언’ 멘트가 작렬한다.
어, 잠깐? 나 이런 거 본 적이 있어.
http://board.rhythmer.net/src/go.php?n=11332&m=view&c=20&s=news
얼레? 또 있어.
http://www.sohh.com/2009/05/fabolous_offers_rap_chall.html
그러고 보니 꽤 많구나....
말을 말던가....
'그 곡은 특정한 누굴 겨냥했던 건 아니야.'
누군가의 신보에 불특정인을 지칭하는 듯하지만, 구체적인 상황이나 행동을 디스하는 구절이 수록된 경우, 싸움구경에 목마른 팬들과 매체는 피 냄새를 맡은 피라냐처럼 몰려든다. 그후, 얼마 뒤면 ‘덕중의 덕은 양덕’이란 진리 어린 옛말대로 각종 정보를 대차비교한 팬들에 의해 정황상 거의 확실한 대상이 도출된다. 그리고 해당 곡을 발표한 뮤지션은 처음에는 능청을 떨지만, 결국에는 인정하고 대판 싸우는 길로 접어든다. 나스(Nas)와 제이지(Jay-Z)의 역사적인 배틀도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했고, 티아이(T.I)의 “Addresses”는 구찌 메인(Gucci Mane), 혹은 앨리 보이(Alley Boy)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릴 웨인(Lil Wayne)도 “Gossip”에서 피프티 센트(50 Cent)를 염두에 둔 듯한 라인을 쓰기도 했다. 근래 가장 인상적이었던 경우는 커먼(common)이“Sweet”을 발표했을 때였다. 최근 활발한 연기활동을 펼치고 있는 커먼은 “Sweet”의 공개 후, 처음에는 특정한 누군가를 겨냥한 곡이 아니라고 했다가 곧 자신의 타깃이 드레이크(Drake)임을 인정했고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아직 아카데미상을 노려볼 연기력은 아닌 듯.
'여자들은 나만 보면 옷을 벗으며 달려들어.'
물론, 무대 위에서나 뮤직비디오에서 그들은 멋지다. 그루피(Groupie) 문화가 자연스럽다는 것도 대충 알겠다. 그런데......그런데......솔직히 말해서 앨범 커버에 인쇄된 그들의 얼굴을 볼 때면 가끔은 믿기 어려울 때도 있다.
'이번 앨범이 내 마지막 앨범이야. 랩 게임에서 은퇴할 거야.'
제이지는 세 번 은퇴했고 더 게임(The Game)은 뻔뻔하게도 두 번 은퇴선언을 하면서 복귀한다는 말도 없이 그냥 넘어갔다. 나스는 [God Son] 발매 이후 앞으로 석장의 앨범을 더 발매하고 은퇴할 것이라고 했으나 이후로도 정규작만 4장, 콜라보 앨범 한 장을 발표했다. 루페 피아스코(Lupe Fiasco)는 자신은 앨범을 딱 세 장만 발표하고 은퇴하여 꽃가게를 열고 정원사를 하겠다고 했으나 지금 다섯 번째 앨범을 작업 중이다. 기나긴 커리어만큼 기나긴 디스코그래피를 가진 투 숏(Too $hort)도 빼놓을 수 없다. 릴 웨인(Lil Wayne), 피프티 센트, 스카페이스(Scarface)등도 한두 번쯤 은퇴해봤다. 사실 더 웃긴 경우는 등장하자마자 은퇴한다고 말하는 경우다. 니키 미나즈(Nikki Minaj)나 솔자 보이(Soulja Boy), 키드 커디(Kid Cudi) 등과 같이 이제 막 메인스트림에서 꽃을 피운 뮤지션의 경우는 은퇴한다고 말해도 별로 신뢰성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승자는 사이공(Saigon)이다. 그는 데뷔앨범을 정식으로 발매하기도 전인 2007년, 블로그를 통해 랩 게임에 지쳤기 때문에 은퇴하겠다는 글을 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퇴를 번복한 그는 지금까지 두 장의 정규 앨범과 스태틱 셀렉타(Static Selektah)와 함께한 한 장의 독립 앨범,한 장의 공식 믹스테잎을 내놓았다.
'나 예전에 완전 잘나가던 갱스터였어. / 랩 하기 전엔 약장수였어.'
사실 오늘날 갱스터 랩은 이미지와 판타지에 의해 완성된다. 우리는 ‘리얼 갱스터’와 ‘리얼 갱스터 랩퍼’의 차이에 대해 분명히 이해하고 있고 또 이해해야만 한다. 그래도 가끔 실소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전직 교도관이었던 릭 로스(Rick Ross)가 자신을 마약왕으로 묘사할 때 가끔은 그 멋진 가사와 라임이 주는 무게감 있는 판타지에서 깨어나 현실의 부조리가 느껴져 작은 미소가 지어진다. 정말 궁금한 건 이거다. ‘가사 속의 그들은 리얼 갱스터고 마약왕인데 왜 랩을 하고 있는가?’ 만장을 파는 랩퍼건 백만 장을 파는 랩퍼건 가사 속의 그들 대부분은 토니 몬타나(Tony Montana)나 프랭크 루카스(Frank Lucas)처럼 그려진다. 그런데 백만 장을 팔아도 음반 수익 백만 달러가 조금 안 되는 랩 게임을 하고 있다고?
'저번 앨범은 레이블이 홍보를 안 해줘서 망했어.'
어이, 말은 똑바로 하자고. 당신의 앨범이 구렸기 때문에 망했던 거야. 아아아아아아아주 극소수의 경우에 좋은 앨범임에도 흥행에 참패할 수 있는데, 그땐 욕하고 원망하는 것을 허락한다.
'나 완전 부자임.'
크리스 락(Chris Rock)의 유명한 개그처럼, 미국 최고의 스탠딩 코미디언과 메리 제이 블라이지(Mary J Blige), 제이-지의 이웃사촌은 백인 치과의사나 금융회사의 중역이다. 대부분의 플래티넘 랩퍼에게도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으리으리한 저택과 ‘내가 가진 신발 켤레 수보다 많은 슈퍼카 콜렉션’을 모으는 취미는 그냥 꿈 드립 같은 거다. 물론, 계약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메인스트림 초년 차 신인의 경우 백만 장을 팔았을 때 해당 뮤지션에게 돌아가는 금액은 대략 96만 달러 정도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외에도 각종 수입이 있고 행사를 열심히 뛰거나 하면 실수령액은 더 많아지지만, 플래티넘 레코드를 선사받는 순간 구찌 셔츠를 입고 다이아몬드 그릴을 낀 채로 람보르기니 매장에 들어서려면 문 앞에서 3초 정도 고민은 할 거란 말이다. 아, 오해는 하지 마시라. 그들이 부자이긴 하다. 다만, 마당도 아닌 거실에 수영장을 설치하고 그 옆에 황금 도금된 AK-47으로 장식된 기둥에 묶인 호랑이를 기르기엔 플래티넘으로도 좀 모자란다는 말이다.
'우린 지금 역사를 만들고 있어!'
‘역사는 시대가 만든다....’라는 다큐적인 멘트를 날리기엔 이미 이 글의 분위기상 글러 먹었고,제목을 써놨으니 대충 드립을 때려 박아 보자. 역사를 만든다고 당당하게 선언했던 랩퍼 가운데90%는 30년 조금 넘은 랩 게임의 역사에서 별로 큰 비중이 없거나 아예 추억의 대상이 되지도 못했다. 그러니까 역사를 만들지 말고 좋은 앨범을 만들어야 한다.
'내가 이 거리를 지배해.'
그 거리는 시장님이 지배합니다.
'내가 최고야!'
다양한 단어와 표현을 통해 자기 잘났다는 걸 인증하는 것이 힙합의 매력이긴 하지만, 모두가 자신이 최고라고 외치니 난감할 때도 많다. 물론, 그중에는 넓은 지지기반과 각계각층의 인정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최고임을 자부하는 것이 암암리에 용인된 뮤지션들이 제법 존재한다. 하지만 분명히 자신도 ‘솔직히 내가 최고는 아니긴 한데....’ 최고가 ‘되고 싶고, 또 그렇게 될 거라서...’자신을 최고라고 부르는 이들이 너무 많다. 이런 게 딱히 잘못된 건 아니지만, 너무 몰개성하지 않은가? 차라리 ‘내가 최고는 아닌데 나처럼 독특한 놈은 없다.’나 ‘난 뭐 그럭저럭 인 데 걔보단 내가 잘해.’라던지, 이게 너무 약해 보인다면, ‘나 진짜 완전 킹왕짱 따봉 짱 잘하는데 허풍이 좀 심함’ 뭐 이런 반전을 준다든지. 아무튼, 좀 더 창의력 있는 자기 PR이 절실하다.
'연말에는 앨범을 발매할 것'
어느 순간부터 나는 ‘Release Date’라는 단어 자체에 깊은 불신과 의심을 품게 되었다. 나스의[Untitled]와 영 지지(Young Jeezy)의 [TM103], 릴 웨인의 [Tha Carter 4]는 여러 해에 걸쳐 수차례 연기를 거듭했다. 이건 정말 오랫동안 겪어온 것들이라 일일이 예를 드는 것도 불필요해 보인다. 2013년도 마찬가지다. 제이 콜(J. Cole)은 새해 인사를 앨범 발매연기로 대신했고, 릴 웨인도 [I’m Not Human Being 2]의 세 번째 발매 일자를 잡았다. 조 버든(Joe Budden), 루다크리스(Ludacris), 피프티 센트의 앨범도 연기되었다. 제발 좀! 물론, 마감일을 맞추느라 급하게 작업하다가 졸작이 나오는 것보다야 몇 번 연기하면서 클래식을 발표해주는 것도 좋다. 하지만 연기를 거듭한 앨범 가운데 클래식이 나왔던 경우는 내 경험상 1년 만에 꺼내 입은 외투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발견하는 확률과 비슷했다.
[Detox]
힙합계엔 슬픈 전설이 있지...... 난 전설 같은 건 믿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