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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프롬은 사랑의 기술을 봐도 안 생기는 게 정상이랜다.
게시물ID : lovestory_6243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쳐우는캔디
추천 : 1
조회수 : 107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12/24 16:18:46

사랑은 주는 것이다. 다만 주고 있음을 지가 평가할수는읍다. 그렇다고 니가 한들 그건 결국 받는 사랑의ㅡ셈을 하는 거자나. 시발 그럼 사랑은 걍 운명과 졸라 눈치에 맡겨야하나? 

이러니 안 생기는 게 맞다. 생겨도 없어지는 게 맞다
에릭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안 생기는 게 맞다는 말을 숨겨놓았다. 



..............아래는 쓰잘데기읍는 분석
본질은 일단 관심, 존경, 이해, 책임, 주는것 이랜다. 

<문제제기>
우선 그가 말하는 관심과 존중은 당연한 사랑의 덕목이라 여겨지지만 실상은 다들 여기서부터 삐걱거리는 것을 자주 본다. 너나만 해도 관심 방식과 존중 방식이 많이 다른 걸 봐도 그렇고, 누구나 상대에게 관심주고, 상대를 존중하고 있다는 생각은 대체로 입장을 바꾸어 보면, 인정받지 못하는 자기만의 생각인 경우가 많다. 너나 나도 지금 그것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저자는 이해와 책임이라는 다소 고리타분한 이성적 덕목을 개입시키는 건가? 만일 그렇다면 권위있는 심리학자, 철학자인 그가 사랑이 지닌 애초의 뜨거움을 초장부터 배반하는 거잖아. 나이먹고 호르몬이 부족해서 그런건감? 그렇지만, 아무래도 에릭프롬보다는 내가 모자랄테니 일단은 책을 더 읽으면서 바짝 촉을 세우고 의심해 봤다. 일단 권위에 기대어보았다...

<본질이 여러 개라는 것.>
게다가 이 표면적인 모순의 느낌 때문인지 몰라도, 저자가 설명하는 사랑의 본질을 읽을 때, 자꾸 사랑하는 방법으로만 읽혔다. 아마 이건 책 제목, 사랑의 '기술' 때문에 그런가보다. 누구나 각각의 덕목을 실천덕목으로 쪼개서 처세로 읽기가 쉬울 것 같다. 물론 오래된 처세는 오래된 사회적 성찰에 기반을 둔 경우가 많으니, 그 본질적 요소들이 오늘날 당연히 여겨지는 것도 따지자면 근대 이 후 가문의 계약이 아닌 '개인의 사랑'이 허용된 시대의식의 덕이려니...

하지만  본질이 여러 단어로 설명된다는 것은 하나로 말 할 수 없는, 개념어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응당 그것을 아울러 전체로서 본질을 이해해야한다는 뜻이다. 그럼 한 번에 드래곤볼을 다 구해야 하나?

<주는 게 옳다 여기지만, 실상은 이상이라 치부하고 만다. >
마지막 본질인 '사랑은 주는 것'이란 금언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에 동의하는 것은 우리가 지내온 시절이나, 사회 상식에 비추어도 그리 낯설지는 않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그 말은 실제 행하고 있는 습속이기보다는 이데아에 가깝게 치부되고 있다.  

실상 '사랑은 주는 것' 이란 말은 자기 사랑의 실패 이유를 설명하는 자조적 합리화로 쓰일 뿐이고, 현실은 그러지 않아도 적당히 살 수 있다고 여길 정도로, 내재된 위선을 제어하지는 못한다. 이렇듯 오늘날, 최대한 합리적으로 정의된 사랑의 본질은 대다수를 끄덕이는 권위를 지녔으되. 감히 하기 어려운, 그저 위인의 능력으로 여겨지고 만다. 

그래서 더욱 우리는 사로 사랑한다면 주는 데 관심이 가야하고, 받고 있는 것을 측량하는 버릇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못하고 받는 것을 재고 평가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리 기대치가 낮다 치더라도, 그 짓은 점점 사랑하기보다 끝없이 상대를 평가하며, 고작 소유의 부족에서 오는 고통과 불행을 자초하는 셈이 된다고..... 생각했다. 

사랑의 판별식을 만들자!!!>
문제는 우리가 사랑의 본질을 방식이나 절차로 오해하는 것이니, 본질로 되돌려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말은 진짜 사랑에서 뿜어나오는 빛을 굳이 분석했을 때 나오는 스펙트럼이 본질의 요소라고 했을 때, 반대로 그 분광에 해당하는 빛을 작위적으로 덧댄다고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 된다. 그러니 사랑을 만들어가려는 절차적 노력은 험한 도로에서 할 수 있는 방어운전처럼 위험을 줄이고. 사고책임을 최소화하는 일이지, 그것이 차를 고급스럽게 바꾸어주지는 못한다.   

결국 사랑의 본질을 논하는 저자와 우리 처지를 빗대어 공감한다는 것은, 그가 말하는 사랑의 본질을 힘들게 하나씩 실천하면 무조건 사랑이 완성되리라 기대할 것이 아니라,  애초 사랑에서 뿜어 나오는 빛이 얼마나 그 본질을 원하고 있는지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아니...
사랑이 뭔지 몰라도, 진짜 사랑이라면 알 수 있다니...
진짜 사랑인지 알려면 사랑을 하고 있어야 하고, 사랑은 덕목을 하나씩 실천한다고 되는 게 아니니 그럼...

안 생기는 게 정상이라는 이야기를 숨겨놓은 게다. 
고맙다

애초 나는 그 덕목들이 있다고 판정 받으면 '주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사랑은 고작 되돌려 받기위해 잠정기간 주고 있는 일시적 욕망이거나, 줬다는 합리화를 통해  자기정당화를 꾀하는 것에 불과하다. 라고 이해했건만. 기준이 공정하다 여겼지만, 누가봐도 옳은 상식이라 말할 수 있는 이 죽일 놈의 '주는 사랑'은, 내가 판단하면 오만과 독선이 되고, 상대가 판단하면 그 자체로 받는 사랑의 계산법이 되어버린다. ㅠ
 
에릭프롬의 사랑의 연구는 애초 사랑을 잘 하기 위하여 시작되지 않았고, 사랑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근본은 분명 그러하니, 진짜 사랑이라면, 혹은 진짜 사랑이 있다면 이러하다! 식의 이야기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세상에 희망을 걸어보았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랑을 계산하는 것이 오히려 어른스러운 사회화로 여겨지고 있다. '뻔한 비극'이 판치고 있는 셈이다. 우리 사회의 그런 가짜 상식은 곧, 우리 사회의 자기분열을 상징한다. 이런 사회에서 너와 내가 사랑을 기대할 수는 없다...사랑은 멸종했다

그렇게 결론이 났다. 

미안하다. 
그냥 주면 받을란다 -_-

슬퍼서 크리스마스솔로를 위해 폰으로, 녹음기와 유투브를 뒤적거려서 음방을 만들었다. 
이거나 듣고 포기하자. 

크리스마스솔로 헌정 음방입니다. 
오늘 자정 사랑하지말자스터디 →아프리카방송
http://t.co/F5xfWwFb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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