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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ID : humorbest_6250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타뇽이★
추천 : 23
조회수 : 1351회
댓글수 : 0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4/10/02 22:25:22
원본글 작성시간 : 2004/08/27 15:09:45
고구려인들 대부분이 발해와 신라로 가다.
고구려인들 대부분이 발해와 신라로 가다.
-펀-
당나라는 고구려인 20만을 포로로 데려갔다.
(나중에 발해 시조 대조영이 많은 수를 이끌고 탈출.)
고구려의 인구는?
삼국사기 보장왕 27년 기사에 "고구려는 69만여 호(집)" 라는 기록이 있다.
69만호를 1호(집)당 5인으로만 계산해도 약 350만으로 집계할 수 있다.
( 당시 가족수는 1호(집)당 5인 이상일 것으로 추정.
그러므로 당시 고구려 인구는 350만 이상일 것으로 추정.)
350만이라 해도 20만은 적은 수이며
그 20만 중에서도 많은 수가 탈출하여 고구려 땅으로 돌아온 것이니
그리하여 발해의 국민이 된 것이니
당나라로 들어간 고구려인은 거의 얼마 없다 할 것이다.
( 고구려의 정식 국호(나라이름)는 고구려가 아니라 '고려' 이다.
발해의 정식 국호(나라이름)도 발해가 아니라 고구려와 똑 같은 '고려'이다.
기록에 보면 발해의 임금들은 '고려국왕 대무예' , ' 고려국왕 대흠무' 등으로 자신을 '고려국왕'으로 칭한다.
즉 발해는 고구려의 부활을 뜻함.
훗날 태조 왕건의 '고려'도 '고구려의 부활'을 뜻함.
즉
제1 고려 = 고구려 (정식 국호 고려)
제2 고려 = 발해 (정식 국호 고려)
제3 고려 = 고려 (정식 국호 고려)
이렇게 된다.)
그러므로
고구려인중에 당나라로 간 사람들은 아주 적고
신라로 간 사람들을 빼면 발해(후고구려)에 남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해멸망 이후 많은 고구려인들이 신라로 갔다는 것은 다음을 보면 알 수 있다.
신라 47대 헌안왕의 아들로 알려진 궁예.
"신라 왕족" 출신의 그가 내건 정치적 구호는 어처구니 없게도 "고구려(고려)"다.
(발해 멸망이후 고구려(발해) 인들이 신라에 많이 들어와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가 도읍을 정한 곳 역시 고구려 유민들이 모인 철원 이다.
그 뿐인가.
견훤 역시 "신라 장군" 출신이다.
그런 그가 내세운 구호도 "백제"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것은 옛 신라 땅의 울타리만 벗어나면 만나느니 고구려 유민이여 백제 유민 이었단 얘기다.
신라 패망의 요인은 실정(정치 실패)과 더불어 신라 인구 보다 훨씬 많은 유민들의 숫자가 신라 정치의 최대 불안요소였던 것이다.
궁예가 '고려'의 국호를 버리고 '마진' '태봉'으로 국호를 고쳐 부르자
고구려 광복을 꿈꾸던 고구려 유민들의 민심은 궁예를 떠나고
송악 출신의 왕건과 신숭겸 복지겸 등이 주동이 되어 나라를 세우니 '고려'다.
(송악도 고구려 유민이 많이 모인 곳 중의 하나.)
무슨 말인가 하면 그당시 신라 인구의 많은 수가 고구려 유민이었고
그러한 고구려 유민들의 염원이 '고려(고구려)'란 나라가 태동된 동기이며 결과란 의미다.
한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는데
그것은 현재 한국 최대 성씨를 이루는 김(金)씨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런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삼국사기에 나타나는데
신라는 갑자기 넘쳐 나는 고구려 유민들에게 정치적 불안감을 느끼고
유화책(달래는 방법)으로 많은 수의 고구려 유민들에게 김씨의 성을 하사하고 집과 토지를 나누어 주며
683년 금마저(金馬渚)에 살게 했다 란 기록이 있다.
신문왕 3년의 일이다.
출처
카페 이름 : 韓民族! 옛 제국을 찾아서...
카페 주소 : http://cafe.daum.net/hankookhistory
카페 소개 : 잃어버린 반만년 대륙영광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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