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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본질에 대한 생각
게시물ID : phil_625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iidyn
추천 : 1
조회수 : 34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7/22 13:18:54
악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은 그것은 '나쁜 것'이고
그래서 해서는 않되는 것이며
만약 하게되면 죄를 짓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벌을 받게 되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념의 시작이 되는 '그것이 왜 나쁜것이냐?'에 대한 논의는 재쳐두더라도
어떤 것이 나쁜것이냐 조차도 보편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기란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나쁜것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랐기 때문이다.
어느 지역에서는 나쁜것이 다른 지역에서는 그렇지가 않고
어느 시대에서는 괜찮았지만 다른 시대에서는 아닌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가능했었다.
 
우선 단도직입적으로 나의 악의 본질에 대한 잠정적 결론으로
악은 '자신에게 관대한 모순된 내적관념'이다.
즉, 자신이 남한테 (자신에게 싫은 것을)하는것은 되지만
남이 자신한테 (자신에게 싫은 것을)하는것은 않된다는 관념이고
자신은 남에의해 그렇게 (싫게)되는것은 않되지만
남은 나로인해 그렇게 (싫게)되는것은 된다는 관념이다.
예를들어 나는 남을 때려도 되지만
같은 상황에서 남이 자신을 때리는 것은 않되며
남은 자신에게 맞을수 있지만
같은 상황에서 자신이 남에게 맞는 것은 참을수 없다는 식의 관념인 것이다.
다시 쉽게 말하면 악의 본질은 역지사지하지 않겠다는 마음이다.
 
악에 대한 이 정의에서 볼때 악은 타인이 아닌 오직 진실한 자신만이 규정할수 있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악을 '자신에게' 관대한 모순된 내적관념으로 정의한다면
제 3자가 보았을 때는 같은 행동이라 할지라도
당사자의 관념에 따라 그것이 악이 될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이 정의에 따르면 살인을 저질럿다 할지라도 악이 아닐수가 있고
기부를 했다 할지라도 악일수가 있다.
즉, 내가 살인을 저질렀다 할지라도
같은 상황에서 남이 나와같은 행위로 내가 그 살인의 피해자가 되더라도 받아들인다는 관념이라면 그것은 악이 아니다.
반면, 내가 기부를 했다 할지라도
같은 상황에서 남이 나와 같은 행위로 내가 그 기부에 불쾌하게 생각할 것이란 마음이라면 그것은 악이 되는 것이다.
죄가 자신으로 인한 타인의 피해를 근거로 정의되는 것이라면
악은 당사자의 진실한 관념과 행동의 괴리로부터 정의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한 범법자가 생길수 있으며, 악한준법자가 생길수도 있게 된다.
악이 가해자의 입장에서 정의되는 것이라면 죄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정의되는 것이며
법이 처벌할수 있는 대상은 죄이지 악은 아닌듯 하기 때문이다.
 
악에 대한 이같은 정의는 또한 악의 대상에는 어떤 조건이 있음을 알수 있다.
직관적으로도 돌이 굴러서 사람을 다치게 했거나
모기가 사람의 피를 빨아 먹는다거나
아기가 생떼를 써서 사람을 힘들게 하는등으로 부터
돌이나 모기나 아기에게 악을 논하지지도 처벌하지도 않는다.
아마도 악은 다른 대상의 좋고 나쁨에 대한 주관을 인식할수 있는 대상에서 정의할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악으로 정의한 '자신에게 관대한 모순된 내적관념'에서의
'관대함'은 자기 자신의 좋고 나쁨과 다른대상의 좋고 나쁨의 정도를 비교 가늠할수 있는 대상에게나 가능한 관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하는 아기나 짐승의 행동에게서 악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인듯 하다.

성선설이 있고 성악설이 있다.
인간은 본디 선하다거나 악하다거나 한다는 소리다.
그러나 악을 '자신에게 관대한 모순된 내적관념'으로 본다면
이런 판단은 접근 자체에서 이미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다른 대상의 불편함에 대한 인식이 없는 아기는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판단할 대상의 조건에 들지도 않기 때문이다.
 
악에 대한 이같은 정의로 부터 또다른 놀라운 관념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되는데
악이 지양되는 이유는 악은 원래 하면 않되는 '나쁜 것'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악은 스스로를 '불편하게 하는 것' 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일반적인 직관처럼 '악은 나쁜 것'이 아니라 '악은 불편한 것'으로 생각하려는 이유는
'악은 나쁜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더 많은 가정과 해석이 필요한듯 하기 때문이다.
'해서는 않된다' 라는 관념은 대상에게 주어진 목적에서 시작하는듯 하다.
왜냐하면 '해서는 않된다'라는 것은 본디의 어떤 목적이 정의된 대상의 상황이
그 목적에 위배되는 상태나 행동에 대한 표현인듯 하기 때문이다.
즉, 해(되)서는 않되는 상태란 대상의 주어진 특정 목적에 부합하지 않거나 반하는 상태다.
그리하여 '악은 불편한 것'에서 불편함의 주체는 악의 주체인 반면
'악은 나쁜 것'에서 나쁜것의 주체는 악의 주체가 아니다.
'나쁜 것'은 사실은 '다른 존재가 불편한 것' 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듯 하다.
그래서 어떤 대상에게서 '나쁜것' 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 '다른 존재'를 가정하여야 한다.
도구에게서의 인간이 그러하다.
도구의 경우 그 목적이자 본질은 인간에게 편이를 제공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인간에게 유용할수 없는 상태는 인간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나쁜 것이 된다.
구성원에게서의 조직도 그러하다.
개인을 떠나 조직을 생각해 본다면
조직에 어떤 목적을 가정할수가 있게 되는데
구성원의 그 목적에 위배되는 행동을 '조직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나쁜 것'으로 규정할수 있다.
다만, 그 어떤 조직 또는 조직의 목적이란 것이 본디 그래야 만하는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이나 임의로 간주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파생된 '나쁨' 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서 본질적으로 해서는 않되는 나쁜것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인간존재의 목적에서, 도구에게서의 인간과 같은, 다른 존재를 가정하여야 하며
이는 인간은 어떤 다른 대상(도구에게서의 인간과 같은)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적인 존재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렇게 되면 신같은 초월적 존재가 나와야 하고 이야기는 복잡해지고 가능성에서 멀어진다.
그래서 악이 지양되는 이유를 원래부터 그래야만 하는 나쁜 것이기 때문에가 아닌 다른데서 찾아야 할듯 하다.
 
그러면 악이 나쁜것이 아니라면, 왜 악은 지양되고 있는가?
인간의 모든 행동은 누군가의 지시나 당위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결국에는 좋고 싫음에 의해 설명이 되고 결정이 된다고 생각한다.
즉, 인간은 좋으면 하고 싫으면 않하며 좋은것을 피하는 행동은 않하고 싫은것을 피하는 행동은 한다.
약간의 무리가 있을지언정 악도 이것의 예외가 될수 없다고 생각한다.
역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악을 지양하는 이유는 악이 내적모순을 일으키며 그런 모순에 대한 자각이 주체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싫은 상태를 지양하며 악은 인간에게 내적 모순을 일으키며
내적 모순은 인간을 불편하게 하기에 인간은 악을 지양한다.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서 2가지 가정이 필요하다.
하나는 인간은 내적 완전성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내적 완전성이란 인간의 세상에 대한 해석이나 관념이나 이해들이 서로 충돌이나 모순없는 상태를 말한다.
인간은 내적 관념이 완전해 지는 것을 좋아하고
내적 관념들이 서로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싫어해서 모순은 없애거나 또는 최소화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좀더 의도하는데로 살아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미래의 세상을 좀더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세상을 좀더 정확히 예측하려면 현재의 세상을 가능한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한 어떤 일관된 규칙을 발견해야 한다. 
세상에 관해 확립된 어떤 일관된 현상이나 원칙이 없다는 것은 미래를 예측할수 있는 직관이 없다는 것이며
이것은 세상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은 합목적적인 행동을 어렵게 한다.
그렇기때문에 인간은 가능한 주변대상에게 관심을 가지고 관찰을 하여 일관된 현상이나 원칙을 찾아서
적어도 자기의 행동권 내에서만이라도 가능한 완전한 내적 관념을 완성하려고 한다는 해석은 가능할수도 있다.
그리하여 이 내적 완전성을 확립하는 것은 생존과 번식같은 인간 근원적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게 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일수 있음을 말하고 싶다.
 
그리고 두번째 가정인 '자신에게 관대한 모순된 내적관념'인 악이 내적 안정성을 붕괴킨다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자신은 싫은 것을 지양하며 피해야 한다.
자신은 다른 인간에게서 동질감을 느끼며
나의 내적 관념이 그들에게도  유사하게 작용할 것임을 안다.
그리고 본질이 동등한 존재 간에는 차등이 없다는 것을 안다.
결론적으로 내가 해도 되는 행동이라면 남도 해도 된다는 결론이 나와야 한다.
그리하여 남이 나에게 않했으면 하는 행동을 나는 해도 된다는 관념에는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그것이 모순없이 성립 되려면 자신게에만의 독보적으로 특별한 속성이 있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아마도 망상이 아닌 다음에야 그럴 가능성은 없다.
따라서, 나는 좋아야 하지만 남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관념을 내세우려면
그것은 자신의 관념은 엉터리라는 관념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자신의 관념적 완전성을 대놓고 부정하는 것이고 이것은 스스로를 불편하게 한다.
이런 내적 모순에 민감하고 무겁게 받아들이는 인간은 악을 행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말했듯이 그런 모순은 불편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런 내적모순에 주의를 주지 않아 그 내적모순을 인식하는 능력이 떨어지거나
인식은 하더라도 그 내적 모순에서 불편함을 덜 느끼기게 된다면 악을 행하기가 쉽게 된다.
극악무도한 생물학적 인간은 인간으로써 마땅히 해야할 의무를 저버렸기 때문에 인간의 자격이 없는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한 행동의 내적모순 수준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수준이 일반적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듯하다.
이런 세상에 대한 내적 관념의 부조리를 인식하는 능력이 떨어지거나 방관하는 사람의 정신세계는
그때 그때 바뀌는 일관성이 없는 것이기에 안정적일수가 없다.
그들은 생각을 포기하고 삶의 불안정성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것이 그렇게까지 특별히 이상한 것은 아니다.
종류가 다를뿐 지적 모순을 방관하는 경우도 이런 감성적 모순을 방관하는 것과 근본적으로는 같다.
즉, 사과는 땅에 떨어지는데 달은 그렇지 않은데서 오는 부조리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은 지적 모순을 방관한 수많은 인류가 이상하지 않듯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남을 불편하게 하는 행동에서 오는 부조리를 방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역시 그렇게까지 이상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내적 완정성이 떨어지는 사람이나 높은 내적 완전성을 구축할 능력이 않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내적모순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또는 원래 그런가 보다 하고 둔감하고 가볍게 받아들일수도 있는 것이다.
 
거의 모든 인간은 좋음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생활을 해야하고
구성원 중에는 수많은 감성적 모순에 둔감하고 이를 가볍게 여기는 악인이 있을수 있고
그런 악인은 분명 세상을 불안정하게 할수 있기 때문에
공동체 조직에는 공동체 생활을 원할히 하기 위해서 법이란것이 만들어 그런 악행을 억제하여 왔다.
법은 공동체에 속하는 모든 구성원의 동의하에 정해지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공통된 약속으로
감성적 내적 모순을 불편해 하지 않는 사람들도, 처벌받는 것이  불편해서라도, 악을 하지 않게끔 하는 것이다.
조직의 구성원에 속하고자 한다면 법은 지켜야 하며
심지어 법이 자신의 세상에 대한 내적관념과 모순이 되는 상황에서 조차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법을 지켜야 한다는것 자체가 내적 안정성을 확립하기 위한 하나의 중요하고 기본적인 관념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법이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고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법을 잘 준수해야만 한다는 마음은 자신도 법을 잘 지켜주는 상황에서만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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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하면,
악은 '자신에게 관대한 내적 모순 관념'이며
악은 주관적이기에 진실한 자신만이 판단할수 있고
악은 다른 대상의 내적 상태를 인식할수 있는 주체에게서 성립하며
악은 나쁜것이 아니라 불편한 것이기에 지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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