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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용 문사철
게시물ID : freeboard_62552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workday
추천 : 0
조회수 : 20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10/08 01:58:41


문-사-철은 하나죠 ㅋ 이게 가장 절실하고 구체적으로 작용한 사례가 있으니 바로 19세기 러시아입니다. 전제정권의 탄압속에서 당시 청년 지식인들은 사회의 폭압과 지적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서구의 철학을 공격적으로 흡수했습니다만 이들이 받아들인 서구의 사상이과 철학이 곧 전제정의 근간을 흔단다고 판단한 제정의 탄압으로 대학에서 철학과는 폐지되었고 이런 강좌를 수강하는 것 논하는 것 역시 불법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때 러시아의 지식인들이 도피처로 택한 분야가 문학이었죠. 19세기 당대 러시아아 인들은 문학을 통해 그들이 이해한 철학을 논하였고 문학을 통해 당대 러시아의 역사를 비판하고 또 서술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역사의 물줄기에서 근대 러시아의 현실을 세밀하고 비판적으로 묘사하며 이른바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이 탄생하였고 또한 이 안에 그들이 이해한 철학, 정신분석학등을 담아 그려내며 후세의 프로이트가 극찬한 정신분석학의 선구자적인 분석이라 평가되고 또 실존주의를 처음 담아냈다 평가되는 도스또예프키 같은 작가가 나오며 (철학과시니 아시겠지만 애초 실존주의는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학적감정을 기반으로 하기에 이후 실존주의 철학자들 카뮈나 사르트르 등도 문학을 통해 이것을 표현했지요)  이른바 세계문학사의 꽃으로 불리워 지는 19세기 러시아문학이 탄생하였죠. 지금도 문학을 통해 모든 것을 담아내고자 했던 당시 러시아 문학을 보면 그 깊이가 어느정도인 가늠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문사철 모두 인문학에서 인간을 담아내는 그릇인 것이고 이는 동서양을 가르지 않는 듯합니다.




말씀 하신 원효의 사례만 하여도 그렇습니다. 철학적인 입장에서 원효의 사상을 미시적으로 들어가는 것과 사학적인 입장에서 거시적으로 보는것 그리고 이 원효의 일화를 기록한 삼국유사처럼 설화이자 훌률한 서사 텍스트로 문학으로 표현하는 것도 당대 원효를 알아가는 길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한 다양한 길인것이죠.

원효의 개방적인 여성관이란 주제를 두고  그 평가를 할 때 작성자님께서 보신 불교의 일심론과 사학과 학생들이 본 계급의 문제 모두 다름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불교라는 것이 후한 말 중국에 처음 들와 민간에 퍼지기 전에는 이타적인 외국의 종교로 이는 불교가 가진 형이상학적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그 원전인 불경에 대한 학습이 선행되야 하는 어려운 학문이었습니다. 때문에 처음 인도승려가 가져온 불경에 대한 연구를 통해 교종이라는 학문적 차원의 불교종파가 탄생하였고 나아가 당나라 시절 삼장법사와 같은 이들을 통해 텍스트의 보충을 위한 적극적인 원정도 이뤄지며 기존 원전과 당삼장의 경전을 교차검증하는 단계에 이르며 불경연구의 성과가 한층 성숙해진 시기이기도 하였죠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기존 불교가 가진 한계란 그것이 지식인의 학습에 근거한 것으로 이를 위해선 권력의 지원 학습을 위한 엘리트 계급의 존재가 필수 불가분한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원효가 배운 선종은 당나라 연간을 거치며 융성한 중국의 민중종교인 도교사상이 교리의 완성을 이룬 불교와 접목되며 도교-불교가 융합된 이른바 중국식 불교인 선불교가 탄생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선불교는 도교의 오랜 관념인 진리는 자신 스스로에게 있음을 근거로 참선과 깨달음을 중시하며 기존불교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한층 심회시킨 신흥불교였죠 선불교의 장점은 이른바 기존 교종이 필요로 했던 권력과 엘리트 계급이 불필요한 순수한 개인주의 사상이었다는 점입니다. 그 정점에 선 인물인 6대조사 혜능의 출신이 글자 조차 모르는 평민이었단느 점을 생각해 보면 그리고 그가 설파한 것이 달을 보는데 손가락이 필요하지 않다는 깨달음이었음을 생각하면 이후의 중국불교는 과거의 귀족불교와 그 성격을 달리하는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종교였던 것이죠. 원효는 당나라에서 이러한 선불교를 받아들인 인물이고 선불교의 한 종파인 화엄사상을 통해 일심론을 제창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가 받아들인 철학적 가치에서도 여성의 존재란 마조선사가 여성을 보듯 그저 아무런 꺼리낌이 없는 하나의 사람이었을 뿐이고 또한 그가 받아들인 선불교의 성격상 평민이든 거지든 깨달음을 향한 길에는 이미 신분의 구애가 없는데 신라의 골품제와 같은 계급이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요 사회적으로 보자면 신라는 골품제에 근거해 진골이 아닌자는 중앙의 권력을 쥘수도 없는 강력한 계급사회였으나 이러한 선불교의 도입을 통해 이른바 평민 지식인에 속하는 5~6두품 출신들의 입문과 지원으로 사회의 계급구조가 일대 변혁을 맞이하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호족이 되어 이후 신라를 쓰러트린 후삼국의 주역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말이죠. 다시 돌아아 원효를 보면 이런 연유입니다. 평민이자 선불교를 받아들인 원효가 여성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는건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결과의 도출인 것이죠. 그리고 이런 모든 이야기는 다시 삼국유사에서 도끼자루를 들고 아내를 구하던 모습으로 민중들의 택스트가 되어 소중한 문학으로 또 전승되었습니다.

문-사-철은 결국 하나입니다. 모두 인간이 살아온 길을 인간이 이해해 가는 방식이고 보다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인문학 그자체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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