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731부대는 60%는 중국인 15%는 조선인, 나머지는 몽고인과 러시아인 등 여러 국적의 사람들을 데려다가 생체실험, 생화학실험을 저질렀습니다.
만주 지역, 지금의 중국 하얼빈에서 시행되었으며, 만 명이 넘는 사람들과 동물들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노약자, 임산부, 어린이 등, 누구든 개의치 않고 모두에게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이시이 시로 (石井四郎 | いしいしろう | Ishii Shiro)
출생-사망 1892년 6월 25일 (일본) - 1959년 10월 9일
마루타 부대를 창설한 장본인입니다.
이 사람은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 난 후에도 전범으로 처리되지 않은 채(주일미군과 생체실험자료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거래를 했다고 알려져있다...) 계속 군복무를 하다가 한국 전쟁 때, 군의관 자격으로 참전하였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이후 제대를 하고, 녹십자 관련 활동, 도쿄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내며 천수를 누리다가 67세에 죽었다고 합니다.
죽을 때 동안 단 한번도 기소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마루타 731부대
> 1936년 만주 침공시 하얼빈 남쪽 20km 지점에 설립한 세균전 비밀연구소로 출발하였으며. 당시 방역급수부대로 위장하였다가 1941년 만주 731부대로 명칭을 바꾸었다. 설립 당시의 사령관은 1930년대 초 유럽 시찰을 통해 세균전의 효용을 깨닫고 이에 대비한 전략을 적극 주창한 사람은 세균학 박사 이시이 시로[石井] 중장(中將)이다. 부대 예하에는 바이러스·곤충·동상·페스트·콜레라 등 생물학 무기를 연구하는 17개 연구반이 있었고, 각각의 연구반마다 마루타라고 불리는 인간을 생체실험용으로 사용했다.
대표적인 실험 내용입니다.
> 생체 실험 (또는 생체 해부)
- 다양한 질병에 걸린 수용자를 생체 해부하였다. 과학자들은 수용자에 대한 침습적 수술을 하였다. 질병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보기 위해 장기를 제거하였다. 모두 살아있는 상태에서 시행했다. 왜냐하면 부패 과정은 결과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성인 남자, 성인 여자, 어린이, 영아 모두 대상이었다.
- 생체 실험은 임산부에게도 시행되었다. 어떤 때는 의사에 의해 수태되고 그 태아는 꺼내졌다.
- 출혈의 연구를 위해 수용자의 팔이나 다리를 절단하였다.
- 절단된 팔이나 다리는 가끔 수용자의 반대편에 다시 붙여졌다.
- 몇몇 수용자의 팔이나 다리는 얼려져 절단되었다. 어떤 때는 얼렸다가 녹여서 치료받지 않은 괴저와 부패의 영향을 연구했다.
- 일부 수용자의 위는 외과적으로 절제되고 식도와 장을 연결하였다.
- 일부 수용자에게서 뇌, 폐, 간의 일부가 제거되었다.
무기시험
- 수류탄을 시험하기 위해 인간 목표물을 다양한 거리의 다른 위치에 세웠다.
- 인간을 말뚝에 묶어 세균방출폭탄, 화학무기, 폭발성 폭탄을 시험하였다.
세균전 공격
- 수용자에게는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이 접종되어 그 효과를 연구했다. 예방접종이라고 위장하였다.
- 치료받지 않은 성병의 효과를 연구하기 위해, 남녀 수용자에게 일부러 매독, 임질을 강간에 의해 감염시키고 연구하였다.
- 질병 전파 벼룩을 대량으로 얻기 위하여 수용자에게 벼룩을 감염시키고 세균전의 유용성을 연구하였다.
- 전염성 벼룩, 감염된 의류와 물자가 폭탄 안에 포장되어 다양한 목표물에 투하되었다. 콜레라, 탄저병 등 전염병으로 약 40만 명의 중국인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기타 여러 실험
- 일부 수용자는 숨막혀 죽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알아보기 위하여 목매달렸다.
- 일부 수용자는 색전이 생기는 시간을 결정하기 위하여 동맥에 공기가 주입되었다.
- 일부 수용자는 신장에 말의 소변이 주입되었다.
- 일부 수용자는 죽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결정하기 위하여 물과 음식을 전혀 주지 않았다.
- 일부 수용자는 죽을 때까지 고압의 방에 놓여졌다.
- 일부 수용자는 극저의 온도에 놓이어 동상이 걸리게 하였다. 그런 조건에서 얼마나 생존하는지, 인체 살의 부패와 괴저가 어떤 효과를 일으키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 일부 실험은 온도와 화상, 인간 생존의 관계를 알기 위한 것이었다.
- 일부 수용자는 원심분리기에 넣어져 죽을 때까지 돌려졌다.
- 동물의 혈액이 일부 수용자에게 주입되어 그 효과가 연구되었다.
- 일부 수용자를 가스실에 넣어 다양한 종류의 화학 무기를 시험했다.
- 바닷물이 몇몇 수용자에게 주사되었다. 바닷물이 생리식염수를 대치할 수 있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731부대의 희생자들은 여전히 그들의 만행을 인정하는 사죄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뉘른베르크에서 독일 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아시아에서 벌어진 사건"은 철저하게 무시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일본 전범들은 불기소 처분되었던 것입니다.
다소 의아스러운 것은, 그 후 미국정부는 일본의 세균폭탄에 대해 더 이상 비난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수십 명의 독일 전범은 사형당하거나 투옥되었지만, 1960년 이후 투옥되거나 사형이 실행된 일본인 과학자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731부대의 대다수 박사들과 이시이 시로는 생물학자로서의 명예를 계속 유지하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