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앞에만 서면 무한히 약해진 노무현
´패가망신´ 운운 참여정부 도덕성 자신감, 자괴감으로 전락
형에 대한 도리 언급, 국민에 대한 도리 실종…정치 동면기
2008-12-08 01:39:51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입을 닫았다.
농협의 세종증권 인수 비리와 관련 형 건평 씨의 구속으로 노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 유일한 ‘소일거리’였던 ‘방문객 맞이 행사’도 5일부터 중단했다.
일주일에 하루를 빼고 매일 두 차례 이상 방문객들과 대화하고 사진을 찍는 일정이었다.
이에 따라 노 전 대통령을 보기 위해 봉하마을을 찾던 관광객들의 발길도 뚝 끊겼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 5일 오후 2시 방문객들을 만나 “오늘로 금년 인사를 마감하겠다”며 “금년에는 오늘로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내년에 날씨가 따뜻해지면 다시 인사드리러 나오겠다”고 밝혔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얼굴에는 곤혹스러움과 착잡함, 그리고 침통함이 묻어났다. ‘친인척 게이트는 없다’며 참여정부의 도덕성만큼은 자신하던 그였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이날 형 건평씨 사건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지금쯤 국민들한테 사과를 해야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전직 대통령으로서 도리도 있겠지만 형님의 동생으로서 도리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형님이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는데 내가 여기서 사과를 해버리면 피의사실을 인정해버리는 결과가 될 수 있어서 국민들에게 그런 말씀도 드리기 어렵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민에게 해야 할 도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 사람의 가족으로서, 동생으로서 도리도 있는 것 아니냐”며 “모든 사실이 다 확정될 때까지는 형님의 말을 부정하는, 앞지른 판단을 말하거나 할 수는 없는 처지”라고 이해를 구했다.
“청탁하다 걸리면 패가망신 시키겠다”고 했던 참여정부 초기 발언과는 사뭇 차이가 난다.
노 전 대통령은 임기 때부터 유독 측근들의 비리에 대해서는 사과를 주저하는 경향을 보였다.
‘대선자금 10분의 1’ 발언이 그렇고, ‘바다이야기 파문’ 때는 “도둑맞으려니까 개도 안 짖는다”고 상황을 탓했다.
최도술, 안희정 등 ‘측근비리’가 터져 나올 때 노 전 대통령은 “내가 감독하고 관리해야 할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면서도 “그러나 이 사람들이 대선 이후에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실수에 대해 저도 마음이 아프고 용서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치부나 축재를 하기 위해 돈을 모은 게 아니라 대통령의 체면치레를 위해 앞으로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해 알아서 관리했던 것으로 본다”고 애써 두둔했다.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이 형 건평 씨에게 수천만원을 주고 청탁을 했을 때도 화살은 남 전 사장을 향했다. 사실상 건평 씨에게 ‘면죄부’를 준 셈이다. 남 전 사장은 끝내 자살을 택했다.
세무공무원 재직 당시 뇌물수수로 구속수감, 파면당한 전력이 있던 형 건평 씨지만 노 전 대통령은 ‘형’이라는 천륜 앞에 무한히 약한 모습을 보였다.
형을 너무나 잘 알았지만, 형에 대해 독한 마음을 품지 못했다. 결국 정권이 바뀌고서야 비리의 뿌리는 드러났다.
건평 씨가 동생을 등에 업고 ‘거간꾼’ 노릇을 하면서 수십억을 만졌다는 검찰의 발표를 듣고 노 전 대통령의 심경은 어땠을까?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었을’ 노 전 대통령은 그의 심정을 이렇게 간접 표현했다.
5일 방문객과의 대화에서 ‘형과 얘기를 나눴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노 전 대통령은 “사적인 문제로 덮어주시면 좋겠다”는 한마디를 남겼다.
만감이 교차했을 형과의 대화를 짐작케 한다.
노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봉하마을 접견객들을 만나던 날 아침부터 눈발이 흩날렸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노 전 대통령은 어떤 모습으로 봉하마을 연단에 설 것인가? 그리고 또 무슨 말을 쏟아낼 것인가. 그때쯤 그는 형에 대한 사과를 할까?
노 전 대통령이 긴 동면기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