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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계약 한건 (from.DC)
게시물ID : baseball_6833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진지드세여
추천 : 4
조회수 : 457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09/12 17:53:39
내가 LA에서 본 일이다.

뚱뚱한 야구선수 하나가 스캇 보라스를 찾아가 

떨리는 손으로 좆크보 스탯을 내놓으면서



"황송하지만 이 스탯으로 다저스 선발이나 뛸 수 있는지 좀 보아 주십시오."

하고 그는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과 같이 보라스의 입을 쳐다본다.

보라스는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스탯을 대충 훑어보고



"좋소" 하고 내어 준다. 

그는 "좋소" 라는 말에 기쁜 얼굴로 스탯을 받아서 가슴 깊이 

집어 넣고 절을 몇 번이나 하며 간다. 






그는 뒤를 자꾸 돌아다 보며 얼마를 가더니, 다저스 구단을 찾아 들어갔다. 

품 속에 손을 넣고 한참을 꾸물거리다가 그 스탯을 내어 놓으며,

"이 스탯으로 다저스 선발로 뛸 수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 



다저스 구단주도 호기심 있는 눈으로 바라다보더니,

"이 스탯을 어디서 고쳤어?"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닙니다. 아니예요."



"선발이 방어율 2점대에 9승 9패? 중간계투로 뛴 거 아니야?"

"계투가 어떻게 180이닝을 던집니까? 탈삼진 210개는 안 보이시나요? 어서 평가해 주십시오."



다저스 구단주는 웃으면서 "좋소" 하고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는 얼른 사인해서 돌려주고 사본을 받아 황망히 달아난다.

뒤를 흘끔 흘끔 돌아다보며 얼마를 허덕이며 달아나더니 별안간 우뚝 선다.

서서 그 계약서가 빠지지나 않았나 만져보는 것이다. 



잉크 묻은 손가락이 LA 맛집 소개서 사이로 그 계약서를 쥘 때 

그는 다시 웃는다. 

그리고 또 얼마를 걸어가다가 어떤 골목 으슥한 곳으로 찾아 

들어가더니, 벽돌담 밑에 쭈그리고 앉아서 계약서 사본을 손바닥에 들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얼마나 열중해 있었는지 내가 가까이 간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유격수가 누구길래 그렇게 많이 실책을 합디까?"

하고 나는 물었다. 



그는 내 말소리에 움칠하면서 계약서를 가슴에 숨겼다. 

그리고는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서 달아나려고 했다.



"염려 마십시오. 나는 지명타자요."

하고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였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그는 나를 쳐다보고 이야기를 하였다. 



"이것은 조작한 것이 아닙니다. 졸렬하게 관리해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누가 한화에서 방어율 2점대를 찍습니까? 풀타임 선발 중에는 3점대 찍은 놈도 없습니다. 

득점지원도 제대로 받아 본 기억이 없습니다. 뒤를 제대로 막아주는 마무리도 없습니다.



나는 한 타자 한 타자를 상대하며 완급조절을 했습니다. 이렇게 아낀 체력으로 8이닝을 던졌습니다.

득점지원 없는 날은 1실점이라도 하면 승이 날아갑니다. 

무실점을 해도 노디시전입니다.

수비실책이 나오면 그날은 패전투수가 됩니다.



이렇게 190경기 1269이닝을 던져 겨우 이 스탯을 만들었습니다. 

이 스탯을 얻느라 한화에서 칠 년을 뛰었습니다."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그 스탯을 만들었단 말이오?

적당히 뛰다가 FA자격이 생기면 다른 팀으로 옮기면 되지 않소?
 
굳이 고생하면서 미국까지 온 이유가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 




그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냥, 한화를 빨리 탈출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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