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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환초의 일본군 식인사건
게시물ID : humorbest_62746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꿀꿀멍멍
추천 : 59
조회수 : 7234회
댓글수 : 2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3/02/11 14:58:17
원본글 작성시간 : 2013/02/11 07:24:50

베오베에 일본을 미워하지 말라느니 그런글 올라오던데.

다들 너무 착한거 같네요. 일본은 아직도 저런일들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내용은 공포게에 어울리는 거 같아서.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0051015341&code=940100&fid=&sort=sym

 

일본군, 조선인 인육 먹고 저항하자 학살!

 

 

 

최근 아프간 전쟁에서 민간인을 장난삼아 학살한 미군의 행동이 충격을 준 가운데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조선인을 무차별 살해하고 인육을 먹은 사실이 드러났다. 일본군의 식인 사건에 저항하며 집단행동에 나섰던 조선인들 또한 무차별 학살된 사실이 정부 조사로 처음 확인됐다.

 

수년 전 일본군 식인사건과 관련한 생존자 증언이 나온 적은 있지만 정부 차원에서 이번 사건의 진상을 규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위원장 오병주)는 2006년부터 3년여간 조사를 벌여 펴낸 ‘밀리환초 조선인 저항사건과 일본군의 탄압 진상조사 보고서’를 5일 공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1942년 초 조선인 군무원 800∼1000명은 비행장 등 군사시설을 짓는다는 명분아래 마셜제도 동남쪽 끝에 있는 밀리환초로 강제 동원됐다.

 

이 곳은 크고 작은 100여개 섬이 가늘고 둥근 띠 모양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태평양전쟁 당시 최전방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곳은 원래 원주민 500여명이 살던 작은 섬이었으나 일본군과 징용 조선인이 몰려오면서 1944년 초 거주 인원이 5천300여명을 넘어서는 등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토질, 기후가 좋지 않은 데다 미군 공격으로 1944년 6월 이후 식량 보급이 막히자 일본군은 어쩔 수 없이 섬에 흩어져 식량을 채집하거나 농경, 어로로 생존해야 했다.

 

당시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1945년 초 일본인이 숙소로 ‘고래고기’를 갖다 줘 허기진 조선인들이 이를 먹었는데, 며칠 뒤 근처 무인도에서 살점이 도려져 잔혹하게 살해된 조선인 사체가 발견됐다.

 

주변에 자꾸 사람이 없어지는 걸 이상하게 여겼던 조선인들은 일본군이 산 사람을 살해해 먹었고 조선인에게도 먹인 것을 눈치챘다.

 

결국 이 같은 ‘식인 사건’에 분노한 조선인 120여명이 1945년 2월28일 감시 목적으로 파견된 일본인 11명 중 7명을 숲속으로 유인해 흉기로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조선인들은 거사가 성공했다고 여기고 이튿날 미군에 투항하려 했지만 날이 밝자 이웃 루크노르섬에서 기관총으로 완전무장한 일본군 토벌대 15명 가량이 체르본섬을 공격해 결국 조선인 100여명이 학살 당했다.

 

이때 일부 조선인이 야자수 나무 위로 피신해 목숨을 건졌고 이들의 증언으로 사건은 역사 속으로 묻히지 않고 공개될 수 있었다.

보고서는 조선인의 집단 저항이 일본군의 식인사건 때문으로 보인다고 결론냈다.

 

연구를 진행한 조건 전문위원은 “저항사건의 발단이 된 ‘일본군 식인사건’은 실증에 어려움이 있으나 적지 않은 정황자료와 증언을 토대로 사실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밀리환초 식인사건은 독특한 정신주의와 결부된 일본군 내의 가혹한 풍토, 기아상황과 미군에 대한 공포, 전쟁 스트레스가 중첩돼 일어난 만행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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