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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너는 시를 쓴다? - 유치환
게시물ID : readers_627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웃을래
추천 : 1
조회수 : 39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2/08 01:08:48

그래서 너는 시를 쓴다?                         

                                                                    - 유치환 

 

서울 상도동 산번지를 나는 안다
그 근처엔 내 딸년이 사는 곳

 

들은 대로 상도동행 버스를 타고 한강 인도교를 지나 영등포 가도를 곧장 가다가 왼편으로 꺾어지는 데서 세번째 정류소에 내려 그 정류소 바로 앞골목 언덕빼기 길을 길바닥에 가마니 거적을 깔고 옆에서 우는 갓난아기를 구박하고 앉아 있는 한 중년 사나이 곁을 지나 올라가니 막바지 상도동 K교회당 앞에 낡은 판자로 엉성히 둘러 가리운 뜰안에 몇 가구가 사는지 그 한 편 마루 앞 내 셋째 딸년의 되는 대로 걸쳐 입은 뒷모습

 

― 이 새끼 또 밥 달라고 성화할 테냐 죽여버린다
― 엄마 다시는 밥 안 달라께 살려줘

 

그 상도동 산번지 어디에서 한 굶주린 젊은 어미가 밥 달라고 보채는 어린 것을 독기에 받쳐 목을 졸라 죽였다고

 

― 이 새끼 또 밥달라고 성화할 테냐 죽여버린다
― 엄마 다시는 밥 안 달라께 살려줘

 

그러나 그것은 내 딸자식이요 손주가 아니라서 너는 오늘도 아무런 죄스럼이나 노여움 없이 삼시 세 끼를 챙겨 먹고서 양복바지에 줄을 세워 입고는 모자를 얹고 나설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는 어쩌면 네가 말할 수 없이 값지다고 믿는 예술이나 인생을 골똘히 생각하는 것인가

 

그러나 이 순간에도 굶주림에 개같이 지쳐 늘어진 무수한 인간들이 제 새끼를 목 졸라 죽일 만큼 독기에 질린 인간들이 그리고도 한마디 항변조차 있을 수 없이 꺼져가는 한겨레라는 이름의 인간들이 영락없이 무수히 무수히 있을 텐데도 그 숫자나마 너는 파적거리로라도 염두에 올려 본 적이 있는가

 

그러나 한편으로 끼니는 끼니대로 얼마나 배불리 먹고도 연회가 있어야 되고 사교가 있어야 되고 잔치가 있어야 되고 ― 그래서 진수성찬이 만판으로 남아 돌아가듯이 국가도 있어야 되고 대통령도 있어야 되고 반공도 있어야 되고 질서도 있어야 되고 그 우스운 자유 평등도 문화도 있어야만 되는 것

 

― 이 새끼 또 밥 달라고 성화할 테냐 죽여버린다
― 엄마 다시는 밥 안 달라께 살려줘

 

그러므로 사실은 엄숙하다 어떤 국가도 대통령도 그 무엇도 도시 너희들의 것은 아닌 것
그 국가가 그 대통령이 그 질서가 그 자유 평등 그 문화 그 밖에 그 무수한 어마스런 권위의 명칭들이 먼 후일 에덴 동산 같은 꽃밭 사회를 이룩해 놓을 그날까지 오직 너희들은 쓰레기로 자중해야 하느니

 

그래서 지금도 너의 귓속엔
― 이새끼 또 밥 달라고 성화할 테냐 죽여버린다
― 엄마 다시는 밥 안 달라께 살려줘, 고
저 가엾은 애걸과 발악의 비명들이 소리소리 울려 들리는데도 거룩하게도 너는 시랍시고 문학이랍시고 이 따위를 태연히 앉아 쓴다는 말인가

 

 

 

 

볼 때마다 뜨끔하게 만드는 시에요. 고민하게 만드는 시이기도 하구요.

여기에 나오는 '시'는 그 어떤 단어로도 대체할 수 있겠죠.

유치환 시인은 4.19 혁명 당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시 뿐만 아니라 서정적인 시도 쓰셨는데

많이 알려진 것으로는 행복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이 있지요.

청마 유치환 시그림집 <깃발, 나부끼는 그리움>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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