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번째 이야기입니다. 네 편이어서 금요일까지 올리면 끝입니다.
그리고 기담-기이한 이야기는 이번 에피소드를 끝으로 당분간 중지입니다.
그 동안 써 놓은 거 다 떨어졌는데, 요즘 일이 바빠서 다음 글을 못 쓰고 있거든요.
언젠가 다시 되돌아오면 반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흐흐.
그럼 즐겁게 읽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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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오토바이 한 대면 세상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래서 준비도 대충대충 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겁도 없었구나 싶군. 아무튼 1학기 종강하자마자 침낭이랑 옷가지를 대강 쑤셔 넣은 가방 하나만 오토바이에 싣고 출발했지. 100cc짜린데 출발하기 이틀 전에 샀어. 물론 중고였지. 대학교 신입생 주제에 새 거 살 돈이 있었겠나? 그나마도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겨우 살 수 있었지. 다행히도 마음에 쏙 드는 매물이 싸게 나와서 다행이었어.
서울 빠져나가서 국도를 탔네. 기름 꽉 채우고 핸들 당기니 잘 나갔지. 만날 꽉꽉 막히는 서울 시내만 돌아다니다 국도 타니까 이야, 탄성이 절로 나오더군. 하지만 제한속도는 지켰네. 하이바도 썼고. 쓸데없이 사고를 당하긴 싫었거든.
그렇게 한참 달리다 배고프면 근처 읍내에 들려서 밥 사 먹고, 그러다 근처에 문화재 표시 같은 거 보이면 거기 들려서 구경도 하고, 경치 좋은 곳 나오면 오토바이 세우고 노닥거리기도 하고, 밤이 되면 어디 여관방을 찾아 들어가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적당한 나무 아래 침낭 깔고 노숙하기도 하고. 여름이었으니까. 그러다 아침이 되면 또 달리고 그랬지. 목적지가 따로 있는 건 아니었어. 무조건 남쪽으로 가다가, 바다가 나오면 다시 돌아오는 게 목표였거든. 목포로 가든 부산으로 가든 간에 어디든 상관없었던 거네. 아무튼 낮에 해가 떠 있는 방향으로 달리면 그쪽이 남쪽일 테니까, 지도 같은 거 없어도 아무 문제도 없었지. 그러니까 그 날까지는 말이야.
출발하고 나서 사흘째였나. 가다 보니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가고 있었어. 시간은 대강 오후 일곱 시쯤? 해가 슬슬 저물어가고 있을 무렵이었으니까. 알겠지만 산에서는 해가 일찍 지니까 걱정이 됐지. 가로등 따위는 없는 길이었거든. 다른 차는 한 대도 안 지나가더라고. 나중에 알고 보니 산을 관통하는 터널이 개통되는 바람에 다들 그쪽으로 다니게 되어서 내가 갔던 길은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고 하더군. 나 원 참. 나도 어지간히 정신줄을 놓고 다녔던 모양이지. 멀쩡하고 편한 길 놔두고 그런 길로 들어섰으니 말이야.
아무튼 이거 언제쯤이면 도시에 도착해서 밥 먹고 잘 수 있나 싶기도 하고, 기름이 슬슬 떨어져 가기에 주유소가 언제쯤 나오나 걱정도 되고 할 무렵이었네.
언덕을 넘어 구불구불한 내리막 커브를 도는데 갑자기 사람이 보이는 게 아닌가.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없는 일이잖은가? 차 한 대도 안 다니는 그런 산길에다, 더군다나 근처에는 사람 사는 곳도 없는 것 같은데, 게다가 해는 저물어 가서 조금만 있으면 어두컴컴해질 때에, 연갈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그런데 그때는 왜 이상하다는 생각을 못했는지 몰라. 어쩌면 오랜만에 사람을 봐서 반가웠던 걸지도 모르지. 난 당연하다는 듯 오토바이를 세우고 말을 걸었네.
‘조금 있으면 밤인데 이렇게 계셔도 괜찮아요?’
반대쪽을 보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돌리더군. 지금도 그 모습이 생생하게 생각나네. 엄청나게 예쁜 건 아니었지만 얼굴이 하얗고 눈이 커서 미인이라고 할 만한 여자였어. 생머리가 어깨 부근까지 내려왔지.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연한 갈색 원피스를 입고 웃옷을 마치 외투처럼 걸치고 있었어. 신발은 앞이 둥근 갈색 구두였고. 나이는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많은 느낌이었어.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요.’
왠지 쓸쓸하게 들리는 말투였어. 나는 다시 물었지.
‘누구를 기다리는데요?’
‘남자친구요. 그런데 안 오네요.’
남자친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실망스럽더라고. 내가 뭐 한번 어떻게 해 보려고 말을 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왜 좀 그렇지 않은가.
‘남자친구분이 어디 가셨나 봐요? 여자친구를 이런 데 놓아두고요.’
‘좀 싸웠거든요. 저쪽으로 가 버렸어요.’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내리막 방향을 가리켰어. 그쯤 되니 상황이 짐작되더군. 그 구불구불한 도로를 걸어 올라왔을 리는 없을 테고, 더군다나 그 여자는 구두를 신고 있었네. 아마도 남자가 모는 차를 타고 가던 길에 말다툼이 있었고, 홧김에 여자가 내리자 화가 난 남자도 그냥 가 버린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여자는 남자친구를 기다리고만 있는 거지. 아무리 싸웠다고 해도 그렇지, 그런 곳에 자기 여자친구를 버려두고 떠난 놈이 있다고 생각하니 열이 확 뻗치더라고. 그런 한심한 놈도 애인이 있는데 나는 왜 없을까 싶기도 했고.
‘남자친구가 간 지 오래 됐나요?’
‘한참 기다렸는데 아직 안 오네요.
에라. 그 남자친구라는 놈 면상이라도 보면 한바탕 욕이라도 퍼부어 주고 싶더군. 남자 망신을 시켜도 유분수지, 그런 개념을 밥 말아먹은 놈이 어디 있나? 생각해 보게. 그 험한 산길에, 해는 저물어 가는데, 남자친구라는 놈은 여자친구를 버려 놓고 어딘가 가 버린 거야. 나 원 참. 그래서 내가 그랬지.
‘조금 있으면 밤이 될 건데 아무래도 위험하지 않겠어요? 제가 가까운 읍내나 뭐 그런 데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타실래요?’
‘저를요?’
망설이는 것 같더라고. 세월이 하도 수상하니 내가 의심스러웠는지도 모르지.
‘저 이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냥 여기 계시면 너무 위험할 것 같아서요.’
그래도 그녀는 고민하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잠시 기다렸네. 그 사이에도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주변이 어두컴컴해지고 있었어. 아무래도 이 아가씨를 여기 놓아두면 안 되겠다 싶었지. 그 때 한참 망설이던 그 아가씨가 그러는 거야.
‘혹시 남자친구가 돌아왔다가 제가 없으면 걱정할까봐......’
그 한심한 남자에게는 너무 아까운 여자더군.
‘어차피 길이 쭉 이어져 있으니까 남자친구분이 돌아오면 오는 길에 저희랑 만나게 되잖아요. 그러니 괜찮을 거예요.’
내가 그렇게 설득하니 결국 알았다고 하더군. 그래서 뒤에 태웠지. 하이바는 그 아가씨 씌워 주고, 날이 어두워져서 라이트 켜고 출발했지. 핸들 당기니까 아가씨가 내 허리를 붙들면서 등 뒤에 붙는데 이야.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난 그때까지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봤었네. 그런데 말하자면 그게 바로 스킨십 아니겠나. 스킨십. 얼마나 좋던지 원. 몸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분이더군.
그런데 가도 가도 길이 계속 이어지는 거야. 내가 산을 넘어 내려가던 중이었으니 한참을 내려가다 보면 평지에 도착해야 정상이잖은가? 그런데 아무리 내리막길을 내려가도 계속 길이 구불구불 이어지는 거야. 시계가 없어서 얼마나 달렸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한참을 갔는데도 길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네. 게다가 아까 말했지? 기름이 떨어져가고 있었다고. 그쯤 되니까 막 근심이 생기는 거야. 하지만 뒤에 탄 아가씨가 걱정할까봐 뭐라 말도 못 하겠고 원.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달렸어. 그러다 보니 기름이 다 떨어져서 바늘이 빨간 곳까지 내려가더라고. 이거 큰 일 났다 싶었지. 하다못해 다른 차라도 지나가면 얻어 타기라도 할 텐데 다른 차라곤 하나도 안 보이고. 그 때 뒤에서 아가씨가 그러더라고.
‘저어, 잠시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나도 오토바이를 오래 몰았더니 허리가 아파오던 중이었는데, 아마 뒷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은 훨씬 더 힘이 들었을 거야. 난 얌전히 오토바이를 길가에 새웠지. 아가씨가 내 허리에 두른 손을 떼고 내리는데 그 상황에서도 그건 좀 아쉽더라고. 뭐 그 때는 젊었으니까.
‘한참을 온 것 같은데 아직 산 속이네요.’
그 아가씨가 말했어. 나는 잠시 고민하다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어.
‘예. 게다가 사실은...... 기름도 다 떨어져 가네요.’
‘그래요? 큰일이네요.’
하지만 왜인지 딱히 걱정스러운 말투는 아니더군. 그렇게 가볍게 대꾸하니까 나도 마음이 편하졌지. 그래서 가방을 뒤져 물이랑 비상식량을 꺼냈어. 비상식량이라고 해 봐야 초코파이 정도였지만.
‘이거라도 좀 드실래요?’
‘네. 고맙습니다.’
마침 길섶이 수풀이어서 앉을 만했지. 오토바이 머리를 그쪽으로 돌려서 라이트를 비추고, 배낭에서 침낭을 꺼내 바닥에 깔았어. 그리고 거기 앉아서 둘이 초코파이를 먹었지. 그 때 먹은 초코파이 맛이 지금도 기억나네. 군대에서 화장실에 숨어 먹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맛있었어. 그렇게 다 먹고 났는데 갑자기 라이트가 픽 나가버리는 게 아닌가? 순식간에 컴컴해져서는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고. 요즘 도시에서는 밤이 되어도 여기저기 불빛이 있어서 그다지 어둡지 않지. 하지만 그건 그런 어설픈 어둠이 아니었어. 진짜 눈앞에 손을 가져다 대고 흔들어도 모를 정도였지. 난 깜짝 놀라서 이걸 어떡해야 하나 하고 있었지. 그 때 다행히도 라이트에 다시 불이 들어왔어. 안도의 한숨이라는 게 뭔지 알겠더군. 정말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거야.
“휴우. 다행이네요. 깜짝 놀라셨죠?”
그리고 옆을 보았는데 이런. 그 아가씨가 없지 않겠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더라고. 라이트가 꺼진 게 기껏해야 한 삼사 초쯤 되었을까. 겨우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그것도 그 어두운 곳에서 대체 어딜 갈 수 있었겠나? 하지만 정말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거야. 정말 당황스럽더군. 아무리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이 안 보이는 거야.
“저어, 저기요?”
혹시나 싶어 불러 보았지만 대답은 없었어. 원래 아가씨가 앉아 있던 곳을 보니 조금 전에 먹은 초코파이의 봉지만 덜렁 떨어져 있더라고. 허 참.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지.
그날 이야기를 더 자세하게 해 봐야 별 소용없겠지. 결국 그 아가씨는 찾지 못했고, 나는 침낭을 풀어서 눈을 붙였어. 새벽에 잠에서 깼을 때도 여전히 그녀는 보이지 않았지. 주변을 찾아봤지만 흔적조차 없었고. 혹시나 돌아올까 싶어서 한참을 기다려 봤지만 오지 않더라고. 결국 점심때쯤 되어서야 기름 다 떨어진 오토바이를 끌고 터덜터덜 내리막을 내려왔지. 전날 밤에는 한참을 가도 나오지 않던 마을이었는데, 호수를 끼고 내리막을 걸어 내려가 조금 더 가니 금방 나오더라고. 오토바이를 끌고 걸었는데도 고작 한 시간 정도밖에 안 걸렸으니까 정말 가까웠던 거지. 하지만 그곳에도 그 아가씨는 없었어. 물론 그녀를 그곳에다 버리고 갔다는 그 한심한 남자친구 놈도 찾지 못했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지금도 궁금해.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네.
해원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난처한 일입니다. 말씀하셨다시피 벌써 이십일 년 전의 일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의뢰인인 중년 남자는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자네에게 의뢰하는 게 아닌가. 쉬운 일이면 내가 했겠지.”
“하지만 사람을 찾는 건 제 일이 아닙니다.”
“알고 있네. 그래서 같은 일을 사립탐정에게도 의뢰했어. 만일 그 아가씨가 사람이었다면 그쪽을 통해 찾을 수 있을 거네. 그렇지만 사람이 아닌 존재를 찾는 것이라면 자네 일 아닌가?”
‘우리나라에도 사립탐정 같은 게 있었나.’
해원은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 의뢰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허튼 소리는 아닐 터였다. 그는 하릴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널찍한 방은 티끌 하나 없이 깔끔했고 방음이 잘 되어 있는지 외부의 소음은 거의 차단되어 있었다. 다만 귀를 기울이면 어렴풋하게 환기용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중으로 된 큼지막한 창문 너머로는 잘 조성된 공원이 내려다보였다. 중년 남자가 누워있는 환자용 침대와 그 팔에 주렁주렁 매달린 링거액을 제외한다면 그 누구도 이곳이 병실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심지어는 남자가 입고 있는 환자복도 일반적인 것과는 달리 고급스러워 보였다.
해원이 의뢰를 받은 것은 어제였다. 차분한 목소리의 젊은 남자가 전화를 걸어와 ‘회장님’이 만나 뵙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집에서 시간을 보내며 쌀과 김치만 축내고 있던 해원은 당연히 응낙했다. 하지만 약속을 잡으며 그는 다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의뢰인을 만날 곳은 모 대학병원의 7층에 있는 VIP 병실이었다.
“회장님은 몸이 좀 편찮으십니다.”
젊은 남자가 말했다.
“자세한 걸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최근에 수술을 받으신 후 회복 중이십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병원으로 와 주십사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아니, 저는 아무 곳이나 괜찮습니다.”
“그럼 자택의 주소를 말씀해 주시지요. 내일 저희가 차량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차...... 말씀입니까?”
“사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해원은 당황해하면서도 자신의 허름한 아파트 주소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아침, 약속시간을 정확하게 한 시간 앞두고 휴대전화가 울렸다. 집 아래 대기하고 있다는 차량 기사의 전화였다. 현관을 열고 나간 해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덩치가 너무 커서 주차공간을 한꺼번에 둘이나 잡아먹고 있는 메르세데스 벤츠였다. 차량 밖에 서 있던 나이 지긋한 기사가 공손히 머리를 숙이더니 오른손으로 차 뒷문을 열어 주었다. 뒷자리는 발을 쭉 뻗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고 음료가 들어 있는 미니바와 함께 크리스탈 잔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목이 마르시면 편안히 드셔도 괜찮습니다.”
“아, 예.”
해원은 다소 허둥거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뭔가를 마시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벤츠가 조용하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동안 해원은 뒷좌석에 앉아 어색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VIP용 1인 병실에 들어가 본 적은 난생 처음이었다. 해원이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VIP 병실이 일반 병실에서 크기만 키운 것이었다면, 실제로 본 것은 병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호텔 스위트룸에 가까운 방이었다. 바닥에는 깔끔한 대리석 타일이 깔려 있었고 한쪽에는 푹신해 보이는 가죽 소파가, 반대쪽에는 식탁처럼 넓은 벽걸이 TV가 배치되어 있었다. 벽에는 일정 간격으로 그림 액자가 걸려 있었다. 큼지막한 창문 옆에 침대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서 상체를 반쯤 기댄 체 창밖을 보고 있던 중년 남자가 해원을 돌아보았다. 사십대 초반쯤으로 보였는데 눈빛에는 힘이 있었고 목소리는 환자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굵은 저음이었다.
“어서 오시오. 내가 이런 처지라 일어나지 못하는 걸 양해해주면 좋겠군.”
해원은 목례한 후 침대 옆의 목제 의자에 앉았다. 누가 미리 준비해 놓았는지 의자 옆의 낮은 탁자에는 간식거리와 함께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커피 잔이 놓여 있었다. 중년 남자가 손짓했다.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군. 드시게.”
“고생이랄 건 없었습니다. 오히려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어쩐지 얼굴만 마주보고 있는데도 기가 눌리는 느낌이라, 해원은 일부러 가슴을 펴면서 대답했다. 커피는 향이 좋았다. 해원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자 남자는 바로 말을 시작했다.
“석길대 만신께 신세를 종종 지고 있네. 이 문제 때문에 혹시 도와주실 수 있는가 여쭈어 봤더니 자네를 추천해 주시더군.”
“아. 그래서 제게 연락을 주셨군요.”
그렇잖아도 이렇게 대단해 보이는 ‘회장님’이 왜 자신을 불렀는지 의아하던 해원이었다. 하지만 회장의 말을 듣는 순간 자연스럽게 의문이 해결되었다. 석길대 큰무당은 워낙 영험한지라 그녀를 만나기 위해 정재계의 유명한 인물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래도 참, 날 추천하셨으면 미리 귀띔이나 해 주실 일이지.’
물론 해원도 그런 과묵하고 일방적인 큰무당의 성격에는 이미 익숙해진 터였다. 그래도 가끔씩은 바리와 비교해 보며 모녀의 성격이 왜 이렇게도 다를까 궁금해 하곤 하는 해원이었다. 회장은 잠시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산길 도로에서 한 여자를 만난 적이 있네. 벌써 이십일 년 전의 일이지. 부탁할 일이란 그 사람을 찾는 거네. 그런데 사람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하네. 그래서 만신께 의논드렸던 것이고.”
“이십일 년 전입니까?”
해원이 반복하며 되물었다. 까마득한 예전, 그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난 그 때 대학생이었네. 입학하고 나서 여름방학에 있었던 일이지.”
회장은 덤덤한 말투로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