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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Over the rainbow
게시물ID : readers_629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cene
추천 : 0
조회수 : 29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2/09 05:03:57

삐삑! 날카로운 소리에 잠시 졸고 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계에 빨간 불이 들어와있다. 지역을 확인하자마자 머리로 인식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해서 어느새 나는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기다려 레인!"

"얼른 나와!"


대문을 열며 외치자 토루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지역을 확인하고 따라나온다. 이미 자동차에 올라 타 있는 내 옆에 올라타며 토루가 운전대를 쥐었다


"아주, 탐사할 생각 따윈 없지?"


씩 웃으며 내게 던져준 건 내 갈색 가방이였다


"아, 고마워. 얼른 가자"


약간 쑥쓰러워져서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토루를 재촉했다. 탐사장비들이 잔뜩 담긴 이 가방을 두고 나왔다는 거 자체가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것의 증명이리라. 이미 수십번이나 무지개를 쫓아다녔고 말 그대로 '눈 앞에서' 무지개를 본 적도 몇 번 있었지만 여전히 무지개가 근처에서 생겼다는 소리만 들리면 만사를 제쳐두고 뛰어가게 된다


"얼마나 걸릴까?"

"글쎄......많이 막히지 않는다 쳐도 이십 분 정도? 하지만 지금 막 조건이 성립한거고 삼십 분은 지속될거랬으니까......그래도 십 분 밖에 못 보겠네"

"휴우...옆 나라에서는 다섯 시간도 지속되고 하던데 왜 여기는 이런 식이람..."

"불평해봤자 소용 없는 거 알잖아?"


토루가 자동차 시동을 걸며 대답했다. 내가 몇 년 전 만든 무지개 추적기 덕분에 그래도 우리는 무지개를 많이 목격하고 있다. 예전에는 한 시간 가량 지속된 무지개 덕분에 논문도 몇 개 발표할 수 있었고......


"이번에는 볼 수 있을까?"


웃으며 넌지시 물어오는 토루에게 그저 웃어보였다. 내가 찾는 건 그 어떤 기상학자도 찾지 않는 것이다. 특히나 기상학, 그리고 무지개에 관해서는 논문도 여럿 쓴 서른 두 살이나 먹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찾지 않는 것이겠지.

창 밖은 방금 소나기가 지나가고 개어있었다. 낮게 뜬 태양. 정확히는 42도 이하로 뜬 태양이다. 그것이 무지개가 생기는 조건. 저 아름다운 현상을 이렇게 기계적으로 보게 되는 자신이 우스워서 실소가 나온다. 무지개를 쫓기 시작한 건 어렸을 때부터였다. 13살의 여름,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를 대신해 나를 열심히 키워온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아빠? 뭐하세요?"

"응, 이건 레인과 아빠의 추억을 모아놓는 상자야"


아버지가 나무상자 안에 오늘 꽃밭에서 찍은 사진을 넣으며 말하셨다.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들여다 본 상자 속에는 사진 여러 장과 내가 아버지에게 만들어드린 작은 보자기인형 등 아기자기한 여러가지가 잔뜩 들어있었다. 앤틱한 열쇠로 상자를 잠근 아버지가 내 손에 열쇠를 꾹 쥐어주며 웃으셨다. 뭐, 정작 그 상자는 친척 집을 근근하며 살아갈 때 완전히 잃어버렸지만......

그 날로부터 몇 일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폐병으로 쓰러지셨고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돌아가셨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내 손을 잡고 자신은 무지개와 함께 있을 테니 무지개를 볼 때마다 힘내라고 하셨었지. 그 때부터였다. 내가 무지개에 반쯤 홀렸던 게......

처음에는 단순한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었다. 무지개에 아버지가 있을 거라는 믿음. 그렇게 무지개만 쫓으며 10대를 보내고 나니 어느새 나는 기상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상학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무지개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가게 될 수록 한 가지는 확실해져갔다. 아버지는......절대로 무지개와 있지 않으리라는 것. 무지개는 공기 중의 물방울에 햇빛이 닿아 물방울 안에서 굴절과 반사가 일어날 때, 물방울이 프리즘과 같은 작용을 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단지 그 뿐.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가 무지개에 있을 리 없다는 건 이 세상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다 왔어"


멍하니 있다가 토루의 말에 정면을 보니 녹음이 가득한 초원 중앙에 무지개의 끝이 있는 게 보였다


"와, 무지개 끝은 오랜만인데?"

"그러게"


차에서 가방을 들고 내렸다. 토루의 도움을 받아 도로에서 내려와 풀밭에 섰다. 무지개의 끝을 본 건 이게 세번째다. 습관처럼 무지개의 끝부터 반대쪽 끝까지 눈으로 훑었다. 어렸을 적 꿈 속에서 본 아버지는 무지개 한 가운데에 걸터앉아계셨었지......후우, 서른 둘이나 먹어서 여전히 아버지를 보고 싶어하는 건 주책인가. 피식 웃으며 가방에서 장비를 꺼내 사진을 찍고 대기에 대한 기록을 부지런히 남겼고, 무지개는 몇 분 지나지 않아 사라져버렸다


"논문 하나는 더 쓸 수 있겠네"


토루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운전한다. 그 모습에 나도 피식 웃었다. 확실히, 오늘 얻은 자료들은 꽤 귀중하다. 예전처럼 학계를 뒤흔들 정도의 논문은 되지 않아도 연구비를 충당할 정도는 되겠지.

어느새 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쓴웃음이 나온다. 그래......이제는 더 이상 아버지를 쫓아다닐 때가 아니다. 사실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걸......아버지가 무지개와 함께 있을 리가 없잖아. 애써 외면하고는 있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더 이상 매번 무지개가 추적될 때마다 기대하는 일은 그만둬야겠어. 역시 반쯤은 오기였던 것같다. 아버지가 무지개에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인정해버리면...그 어린시절에 단지 아버지를 보고자 무지개만을 쫓아왔던 나의 청소년기는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그냥 그런 허전한 마음에 도망쳐왔던 것같다.






"흐아암-"


토루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레인과 함께 거의 밤을 새서 자료를 전부 통계화시켰다. 레인 쪽을 힐끗 보니 책상에 엎드려 곤히 잠들어있다. 쿡쿡...영락없는 어린애라니까. 어쨌든, 레인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잘 수 있게 사진 현상과 인화를 다 해놓을 생각이다. 다 해놓고 깨우면 칭찬해주려나? 비식비식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참고 얼른 카메라를 들고 암실로 향했다.






"끄응.....하필이면......"


토루가 사진 한 장을 들고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사진들은 다 잘 나왔는데 제일 중요한 무지개의 끝 사진에 빛이 번져있다. 인화하는 과정에서 잘못됐거나 필름 자체가 손상된거라는 건데......제발 후자는 아니였으면 좋겠다. 하는 수 없이 그 현상된 필름을 다시 찾아 인화작업을 시작했다. 

발광 현상, 정지, 표백 정착, 수세......차분하게 모든 과정을 하나하나 다시 했다. 와이퍼와 드라이기로 사진을 말리면서 눈이 한 번 더 찌푸러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또 아까와 똑같은 길쭉한 빛이 무지개 끝의 정확히 한가운데에 있었다. 빛에 노출됐던건지 현상과정에서 실수를 한건지......정말로 하필이면 이 사진이 제대로 안 나오다니. 무지개의 끝을 찍은 다른 사진들은 모두 사라지기 직전에 찍은 거라 흐릿한데......


"하아....."


절로 한숨이 나온다. 레인.....실망하려나......어쩔 수 없긴하다. 필름 자체가 손상된 것 같으니까. 우선은 깨우러 가봐야겠지......지하실에서 위로 올라가자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책상에 엎드린 채 잠들어있는 레인이 보였다. 그래도 인화해 놨다고 하면 칭찬해주려나? 갑자기 치솟는 장난기에 손가락 끝으로 레인의 볼을 꾹 눌렀다. 아무 반응이 없다. 쿡쿡.....몇 번 더 볼을 꾹꾹 눌러대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아, 장난은 그만. 손으로 등을 살짝 토닥였다


"레인, 인화까지 다 끝났어"

"으음.....아.....? 벌써?"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안경을 낀다. 인화된 사진들을 건내주자 차분히 살펴보더니 의아하다는 눈으로 올려다본다.


"무지개 끝은 다 흐릿하네?"

"선명하게 나온 건 한 장 밖에 없는데 빛이 번져있어서. 두 번이나 해봤는데도 그러네"

"이런......심해?"

"직접 볼래? 그건 암실에 두고 나왔어"

"그럴까......"

"배고프지? 아침 주문해둘께 뭐 먹을래?"

"먹던 거"


짤막하게 대답한 레인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허리를 쭉 폈다. 토루가 전화기를 들고 주문을 하는 동안 레인은 암실로 내려갔다. 딸깍. 불을 키자 사진 현상 용 도구들이 잔뜩 늘어서 있다. 시간이나 돈을 절약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토루가 사진 인화를 할 줄 아는 건 다행이다. 필요없는 사진들은......저 쪽인가. 서른 장 정도의 사진이 늘어놔져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사진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바라봤다. 너무 색이 연하게 나온 사진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 중에 선명한 사진 두 장. 확실히 선명하게 나오긴 했는데......아깝네. 빛이 어디 번진거지? 사진을 들어올려 무지개의 밑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레인의 눈동자가 갑자기 커졌다. 사진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등을 휙 돌려 계단을 뛰어올랐다.


"레인?"


토루가 놀란 듯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 않고 뛰쳐나가 차의 운전대를 잡았다.


"레인!! 무슨 일이야!! 자, 잠깐...!"


악셀을 꾹 밟다가 잘못해서 토루를 칠 뻔했다.


"진정해!"


옆 좌석으로 뛰어들며 토루가 외쳤다. 당황한 기색이 역려한 토루가 문을 닫자마자 차를 출발시켰다.


"무슨 일인데 그래?"

"......내 눈이 이상한건지 아닌지 봐줄래?"


레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살짝 구겨진 사진을 토루에게 넘겨줬다. 토루와 함께 연구를 한 지난 5년 간 운전은 항상 토루가 했었으니까 엄연히 말해서는 장농면허다. 그 사실에 살짝 경직되어 있는 토루가 레인의 손에서 사진을 가져가 바라봤다.


"이 사진이 왜?"

"거기 빛이 번진 거, 뭐처럼 보여?"

"응? 그냥 빛이 번진..."


레인에게 대답하던 토루가 멈칫했다. 막연히 빛이 번진 것인 줄 알았는데......


"......열쇠?"


자세히 보니 흐릿하게 열쇠의 형상이였다. 마치 열쇠가 빛을 발하는 듯이 열쇠모양으로 환한 빛이 형성되어 있었다. 구리빛으로 녹이 슬어있는 듯한 기묘한 장식의 열쇠. 

레인의 옆모습을 바라보자 미묘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 운전대를 초조하게 쥐고 있었다. 아침이라 어제보다 훨씬 더 빨리 초원에 도착했다. 어제 탐사했던 흔적이 남아있는 무지개가 있던 곳으로 레인이 한달음에 달려갔다. 어제 그 주변의 기록을 남기느라 풀이 눌려있는 곳. 풀밭을 뒤지거나 할 필요도 없었다. 짧은 잔디들이 솟아나있는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주변을 빙글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차를 잠그고 뒤늦게 쫓아온 토루가 숨을 고르며 나를 쳐다봤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다가 웃음이 터졌다


"레인..."

"하하, 바보같기는......열쇠같은 게 있었으면, 탐사할 때 봤을텐데 말이야"

"......울지마"


어....? 어느새 울고 있었나보다


"왜 이러지? 하하, 울려던 게 아닌데"


얼른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지만 한 번 터진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 흘러나왔다


"어? 아...하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에 자상하게 안아주는 토루의 품에 안긴 채 그저 눈물과 웃음을 함께 터트렸다. 어쩌면 아버지는 정말 무지개와 계실지도 모른다. 안타까움과 슬픔, 감격, 다행스러움 등이 섞인 미묘한 느낌이다. 토루에게 안긴 채 올려다 본 하늘은 비 온 다음의 눈 부신 푸르름이였다. 눈이 시릴 정도의 새파란 빛. 눈물 때문에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왠지 아버지가 웃고 계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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