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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에게 쓰는 편지
게시물ID : freeboard_62954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건내꺼야
추천 : 1
조회수 : 24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10/23 02:44:50


이미지출처: 구글링 어디선가







라면에게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다섯살의 여느때와 다를것 없던 저녁, 어머니의 손길 너머로 빨간 봉지에 담겨있던 꼬불꼬불한 너의 면발과 보기만해도 매울듯한 스프를 훔쳐본게 너와 나의 첫 만남이었지. 너는 수줍은듯 하지만 당당하게 끓는 양은냄비 속으로 들어가 스프가 담뿍 녹아든 물거품의 운무에 몸을 맡겼다. 

면발이 올올이 다 풀어질대로 풀어진 네가 하얀 그릇에 담기던 순간이 생각난다. 


하얀 김을 가득 피워올리며, 매끈하고 샛노란 면과 빨간 국물이 냄비의 손을 떠나 그릇에 안착하는 그 순간은 입영열차 안의 정인情人을 떠나보내는 여인의 애달픔이었을까. 그릇에 떨어지는 마지막 라면국물은 떠나보낼듯 못보내며 아쉬워하고 눈물 훔치던 그 여인의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이었을까. 냄비는 마지막 김을 올리며 그렇게 너를 떠나보냈다.

다섯살의 나는 너에게 다섯번의 젓가락질 후 다른그릇에 덜어먹어야 했다. 너를 입에 품고 목넘기던 그 맵고 아릿한 감각, msg의 알싸한 조미료맛에 느껴지던 것은 너를 오롯이 먹지 못하고 그릇에 덜어먹어야 했던 나의 아픔이었을 것이다.

새벽은 낮에 퍼질러 잔 자와 대출금때문에 잠 못이루는 자와 세월좋은줄 알면서 클럽에서 달리는 자와 귀신과 신부와 스님과 배고픔에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일어나 라면을 끓이는 자의 시간이다. 새벽 배고픔을 못이기고 깨어 너를 끓이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면, 

지금껏 너는 나의 위장을 수없이 달래주었건만 나는 너에게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었다는 것일게다. 

이 자리를 빌어 너에게 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끼니를 나와 함께 해주어 고맙다.

앞으로도 맛있게 먹혀주길 바란다. 언젠가 또 배고픔에 깨는 미명의 새벽이 오면, 나는 너를 죽염 굽는 장인의 마음으로 가스렌지를 켤 것이다.

-허기로부터 탈출한 너의 미욱한 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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