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생활이 윤택해지면서 가정마다 여러 종류의 가전제품을 구비하고 살다 보니, 예전에는 공장에서나 볼 수 있었던 진공포장기까지 가정집 부엌 한편에 놓일 만큼 흔해진 듯싶다. 한동안 텔레비전 홈쇼핑 채널에서 인기 상품으로 판매될 정도로 가정용 진공포장기가 널리 보급된 것은 아마도 제한된 냉장고와 부엌 수납공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고 필요한 분량만큼 음식물을 상하지 않게 따로 분리해 보관할 수 있는 장점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진공포장기 상품 광고에서 빈번하게 목격할 수 있었던 광경 하나가 생선이나 육류, 아이들 과자는 물론 먹다 남은 반찬까지도 플라스틱 필름 봉투에 담아 진공포장하는 장면이었다. 이렇게 포장해 냉장고에 넣어두면 언제라도 원래 상태 그대로 유지되어 필요한 때 다시 꺼내 사용하거나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잘 부각되도록 연출해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산소가 매우 풍부한 환경 조건(대기의 약 21%)이며, 대부분의 미생물은 대사 과정에 산소를 필요로 한다. 일반적으로 대사 과정에서 산소는 분해 작용을 촉진하여 조직을 파괴하고, 탄수화물을 연소시켜 거대한 복합분자를 작고 단순한 분자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산화 반응이 우리가 먹는 식품에서 일어나면 그 자체에 나쁜 영향을 주어 곧 품질이 저하되고 저장 수명이 단축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이유에 근거하여 신선한 식품을 오랫동안 저장하고자 할 때 주변 산소를 제거하거나 일부 감소시킴으로써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를 직접 실생활에서 활용하는 데는 기술이나 비용 측면에서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진공포장기는 물론 고차단성 플라스틱 필름 포장재를 비교적 저렴하고 손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일반 가정에서도 장기간 식품을 보관하려는 목적으로 진공포장이 점차 보편화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포장 방법의 장점에 비해 제한 사항이나 위험성 등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식품의 종류에 따라 의도하는 효과를 볼 수도 있지만 진공포장으로 인해 오히려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으므로 구체적인 활용에 앞서 몇 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사전지식을 갖는 것이 좋겠다.
식품이 산소와 반응하면 대부분 산화되어 각 구성 성분으로 분해되기 때문에 포장 내부의 산소를 제거하여 이러한 분해 과정을 가능한 한 억제시키면 식품을 오랫동안 저장할 수 있다는 것이 진공포장의 기본적인 원리다. 즉 기체가 투과되지 않는 플라스틱 필름 포장재에 내용물을 넣고 밀봉하기 전에 공기를 제거하면 내용물의 호흡을 거의 정지시키고, 식품을 상하게 만드는 대부분의 호기성 부패 미생물을 잘 자라지 못하게 하며, 지방질을 함유하는 여러 가지 식품의 산패를 억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효과가 생긴다. 그러나 반대로 산소는 살아 있는 생체 조직의 에너지 생산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므로 신선한 과일과 채소류의 정상적인 호흡 대사 과정에서 산소는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이들을 진공포장할 경우 오히려 신선도가 더 떨어지는 역효과를 나타내기도 한다.
또한 진공포장은 기본적으로 다소 위험성을 갖고 있다. 산소의 제거로 인해 호기성 부패균들이 억제되어 식품의 변패 신호인 이취는 발생하지 않더라도 E. coli O157, Listeria monocytogenes나 Clostridium botulinum과 같은 혐기적 병원균들은 산소가 적거나 없는 조건에서도 계속 생육이 가능하므로 문제가 된다. 더욱이 이들 병원균은 육안으로는 전혀 감지할 수 없어 소비자들이 육안으로는 그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도 없다. 이런 이유로 상업적인 식품 가공 공정에서는 진공포장 내부에서 병원균들이 증식하지 못하도록 또 다른 미생물 억제책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제품의 수분 활성도 저하, 염 함량 증대, 산 함량 증가(pH 저하), 항균제 첨가, 저온 유통 등의 방법을 진공포장과 함께 병용하고 있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이런 처리를 할 수가 없다.
진공포장한 신선 식품을 오랫동안 보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마도 적절한 온도 관리일 것이다. 냉장 또는 냉동과 같이 저온 조건에서는 산화, 효소적 분해, 이취, 지질 산패 등 각종 생화학 반응 속도와 미생물 대사, 증식 및 독소 생성 속도가 감소하기 때문에 식품의 품질을 효과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진공포장 방법은 활용 대상 품목에 알맞게 제대로 사용할 경우 내용물의 품질 보존에 매우 유리한 보관 방법이 될 수 있으나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품질 저하를 촉진시키고 식중독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진공포장 방법을 실생활에서 편리하게 활용하고자 할 때는 몇 가지 사항을 유념하는 것이 좋다. 우선 물기가 없는 건조품, 충분한 양의 소금이나 식초가 가미된 조리품, 지방 함량이 많은 육제품 등에는 비교적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으나 신선한 과일, 채소류 또는 편이 가공품, 물기가 많거나 한 번이라도 손을 댔던 조리품, 가공식품 등에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또 서로 종류가 다른 식품을 한꺼번에 포장하지 않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