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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많은 대학생, 고등학생
게시물ID : freeboard_63083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미술관소녀
추천 : 1
조회수 : 82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2/10/29 03:35:05


지금 내 막내동생은 수능을 며칠 앞둔 고등학생이다.

매일 내게 대학생활 무엇을 하며 스펙을 쌓을지 질문하며 앞으로의 창창한 미래를 나와 함께 의논하고 있다.



내가 하고자하는 이야기는 내 막내동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며 지금과 얼마나 달라졌나 되짚어보며 이 글을 써본다.



언제나 하얗게 잘 다려진 셔츠를 입고

무테 안경을 쓰고 3번째 줄 자리에 앉아

선생님 말씀을 조용히 받아적으며

선생님이 반 분위기 전환을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다른 책을 꺼내서 가십거리에서 귀를 닫고 영어단어를 외웠다.



쉬는시간이면 언제나 영어단어를 외우거나 개념원리 수학을 풀었다.

남들이 노는 것이 즐거워보일지라도,

저 아이들은 나보다 똑똑하니 놀아도 되는것이리라.

나는 아직 부족하니 더 노력해야된다.

는 일념으로, 하루 7교시 쉬는시간을 꽉꽉 채워 영어단어를 외우고 지난 시간 복습을 했다.



쉬는시간에 주로 영어단어를 외우고 수학이나 경제같은 예습이 필요한 시간엔

다음 시간 예습을 하고, 전 시간 복습을 했다.



가끔 아주 피곤한 시간엔 엎드려잤다.



친구는 없었다. 

고1때는 대외동아리 서클에도 가입하고 (꼬임에 넘어간 기독교동아리였지만 그다지 거부감은 없었다.)

털털한 성격으로 남학교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 (이성이 아닌 친구로)



고2부터, 내 인생에 친구란 없구나.

단정짓고, 공부에만 몰두했다. 지금 친구 사귀어봤자 서울대가면 다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서울대합격수기, 고3 1년만에 서울대가기 등등 책들을 많이 읽었다.

재수시절에도 3시간 자고 공부한 적도 많았다.

공부 기술이 부족했던 건지 매번 잘 풀리는 문제만 잘 풀리고

안 풀리는 문제는 좀처럼 안 풀렸다.


수능이야기는 이쯤에서 접어두자. 남들이 내 수능성적을 가지고 비난하지만

고교 시절만큼은 비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3때 점심시간이 아까워 매점에서 과자를 사와 교실에서 먹으면서 공부했다.

그날 해야 할 공부량을 채우기 위해 점심을 거르거나 저녁을 거르고 공부한 적도 많았다.



검찰수사관이 꿈이었다. 법대나 경찰행정학과를 가고 싶었다.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준다는 육사나 경찰대도 좋았다. 

집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도 있었다.



위의 서울대 가면 친구도 다 소용없다는 이야기,

같은 반 친구들 중에 서로 같은 학교에 붙은 친구들은 전혀 없었다.

각각 다른 학교에 한 명씩 붙었다. 



담임선생님은 전에 현대백화점 이벤트과에 있었던 사람으로, 설득의 달인이었다.

우리반 35명 중에 33명이 대학을 붙고 2명이 재수를 했다.

물론 나도 대학에 붙었다. 나와 내짝만 재수를 했다. 



담임이 설득과 때로는 비난(너는 재수해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을 해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대학교에 가서 입학포기서를 내고 등록금을 환불받아왔다.



첫 해에 붙은 대학교도 좋은 대학이었다. 영문과에 붙었었다.

영국을 다녀오고 유럽을 다녀온 지금에는, 영문과를 갔어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도 든다.

무엇보다 우리아버지께서 많이 아쉬워하셨다.



같은 반 아이들은 자신의 성적보다 낮은 대학을 써서 33명이 대학을 합격했다. 나까지 합하면 35명 중 34명이 붙은 것이다.

듣도 보도 못한 지방대학에 원서를 쓰라고 아이들을 설득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붙었다.

물론 지금 대학도 전혀 후회하는 마음 없이 다녔다. 

공짜로 운동을 배웠고, 사람을 사귀었고, 공모전에 출전하고 교지를 내고 학보사 기자로 활동했다.



학교 선생님들은 내게 기대가 컸다. 너는 곧 나의 동문이 될 것이다. 라는 기대감과 덕담을 했다.

지금생각해보면 문과인데 수학공부를 한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국어는 잘했다. 글짓기도 좋아했다.

전국 고교생 백일장에서 전국4등을 했다. 성균관대 국문과 수시입학을 담임이 노리기도 했다.

국문과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대학에 와서 학보사 기자로 일했다. 대학 산하 기자는 월급을 받았다.

나는 원고료를 받고 글을 썼다.

수십 권의 책을 읽고, 서울 시내 도서관을 모두 뒤저 원고 자료를 모았다.

그렇게해서 쓴 원고로 부천국제영화제 기자합격을 했다.



기자 생각은 없었다.

처음부터 검찰수사관이 꿈이었다.



그리고 영국을 비롯한 유럽을 다녀온 지금,

나는 프리랜서로 일하며 세계여행을 하고 싶다.



남자친구는 해외이민도 꿈꾸고, 세계여행도 꿈꾸고, 내가 원하는 것이면 뭐든 OK이다.



고교시절로 돌아가자.

고교시절 나는 불어를 배웠다.

불어 선생님은 프랑스어학과를 나오고, 대학시절 프랑스에서 어학연수를 했다.

프랑스 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하며 학교를 다녔다.



우리에게 프랑스 파리의 지하철 티켓과 버스 티켓을 보여주고,

각자 프랑스 빵을 가져오라고 해서

수업시간에 다과회를 열기도 했다.



크로와상을 먹으며 프랑스 이야기를 해주시고,

프랑스 1구역,2구역 지리설명과 우편번호, 집 크기, 가격, 욕실엔 배수구가 없고 욕조에만 있다,

등등의 구체적인 프랑스 이야기를 해주셨다.



에펠탑이야기도 빼놓지 않으셨다.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불어를 배우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독일어를 배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불어를 선택했고,

우리반에는 미대를 희망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일본어반이 새로 생기면서, 일본어를 배우는 학생들이 가장 많았다.

일본어반이 6개반 정도는 되는 것 같았고, 독일어 3개반, 불어 2개반으로 가장 적었다.



불어공부는 우리반말고는 물어볼 게 없었다.

불어선생님이 우리반 담임선생님이었다.



불어선생님은 매우 조용했다.

우리 고등학교 상담실 선생님이기도 했다.



나는 상담실을 자주 찾아갔다.

교우관계, 집안 이야기 등등을 했었다.



그 선생님은 내게 어머니와도 같은 선생님이었다.

내 꿈을 지지해주시고, 내 남자친구와의 좋은 관계를 응원해주셨으며,

나를 포용하고 수용해주셨다.



내가 불성실하지 않는 한,

학교가 나를 배신할 일은 없었다.



불어를 배우던 그때부터,

유럽여행을 꿈꿨다.

학교 영어선생님은 여대에 다니다가 경희대 영문과로 편입을 하였고 교환학생으로 영국에 갔다가

영국 사람과 결혼을 했다.



선생님도 유럽여행을 다녀오셨다. 유럽여행 이야기와 남자친구와 만나게 된 계기를 말했다.

남자친구를 그 나라에서 만나서 사귀었는데, 선생님이 돌아오는 해에 남자친구도 한국으로 교환학생 가기로

이미 만나기 전부터 계획되어있었다고 한다.



내가 졸업하던 해에 선생님은 임신을 했다. 



유럽여행을 위한 돈은 대학생때 모았다. 대학생때 내내 모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입고 있는 옷들 모두 20살때 샀던 옷들로 산 지 6-7년은 족히 되었다.

중학교때 산 옷들도 있고

동생들이 유행 지나서 안 입는 옷들도 있다.



심지어 구멍 뚫린 옷도 있다.



아끼고 아껴서 모은 돈으로 유럽에 갔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나 생각이 든다.

부모님은 대학 나오고 영국으로 공부하러 갔다와서

쉬고 있는 나를 안타까워하신다.



만약 내가 회사에서 떨어지는 것이라면 모를까

아예 구직생각하지 않고 프리랜서 또는 해외이민을 꿈꾸며 여행을 생각하고 있으니

답답하면서도 함부로 험한 말을 하면 상처받을까-

그러지도 못하고 상황만 지켜보신다.



24살때부터 넣었던 연금보험을 해약할 생각이다.

그리고 남자친구의 아파트가 있으니,

청약통장도 해약할 생각이다.



그 돈과 지금 가진 돈을 모두 모으면,

한 달동안 유럽여행할 돈이 또 생긴다.



그러고도 남는다.

악착같이 살았던 과거의 나에게 감사한다.



지금도 과거에 모아두었던 돈으로 살고 있다.



남자친구가 돈을 조금 더 쓰긴 하지만

내가 눈치껏 먼저 계산할 때도 많다.



가계부를 적고 있다.

한달 생활비를 적으며,



언제쯤 우리가 파리를 가고

언제쯤 우리가 체코&헝가리 여행을 할 지

연차와 휴가에 맞추어 계획하고 있다.



올해 연차는 이미 썼다.

내가 유럽에서 돌아오면서 동시에 남도여행을 다녀왔다.



담양 메타세콰이어길을 걷고, 광주를 둘러보고,

담양 떡갈비 궁중 한정식 한상차림을 먹었다.



하나씩 자격증을 따고 있다.

일기이니 거짓말하지 않고 쓰기로 한다.



어떤 커리어를 더 쌓아야 할까 생각하고 있다.

글쓰는 소질을 살려 작가, 자유기고가, 신문사 기자를 할지

경제학적 마인드를 살려 그쪽으로 나갈지(구체적인 건 밝히지 않겠다)

지금부터 이민준비를 할지(이민준비에도 경제 분야 자격증을 생각하고 있다)



나중에 이 글을 보게 된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

남자친구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흩어졌던 조각이 퍼즐 맞추듯 맞춰지는 느낌이다.



인생에서 내가 진정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떠오른다.



공권력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정의를 바로세우는 것은 좋지만

직장일을 하느라 내 자식 얼굴한번 못보는 것은 원치 않았다.

이건 고교시절부터 생각해왔던 것이다.



결국, 그런 회의적인 일은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으로 기울고 있다.



한가지 자신있는 건,

나의 국문학과 작문 실력, 교정 편집 능력과 외국어 구사 능력으로

적어도 번역 또는 번역출판 프리랜서는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번역출판으로 프리랜서로서 입지를 굳히고

나중에 내 책을 내는 것.



물론 부모님은 프리랜서를 부정적으로 보신다.



한국에서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이민을 갈 수 있을까? 도 생각해본다.



남자친구의 기술로 이민을 간다면 매우 높은 점수로 이민할 수 있다.

그렇기때문에 남자친구는 이민을 생각하고 있다.



노후가 되면

내 레스토랑을 차려서 

그곳에서 내 책을 내는 게 소망이었다.



지금부터 그렇게 해도 될까?

젊었을땐 회사생활을 조금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쉽게 우울증에 걸리는 내가

회사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

가장 걱정이 된다.



밝고 명랑하고 누구에게나 마음을 열고 다가가지만

그만큼 상처받는 일도 많아진다.



사회에 나가면, 나에게 마음을 여는 사람은

나중에 보면 내게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원하는 게 없으면 친하지도 않는데 먼저 밥먹자고 하지 않는다.

보험가입을 권유하거나, 핸드폰 사주길 원한다.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멀어지는 경우도 많다.

"회사가 알려주지 않는 50가지 비밀"이란 책을 읽고 있다.



회사에서는 절대 친구를 사귈 수 없다고 말한다.

지금 내가 이혼할 위기라고 회사동료에게 털어놓으면, 

그자리에서는 잘 들어주겠지만

어느샌가 소문이 퍼져 임직원의 귀에 들어오고, 승진은 물건너간다는 이야기다.



이 책은 동양사람이 아닌 서양 사람이 썼다.

서양도 이런데, 남의 이목 따지는 동양은 오죽할까.



호주, 유럽 각국을 다 다녀봤는데

우리 눈엔 같은 서양 사람이지만 생각하는 방식이 조금씩 달랐다.



미국 사람들이 가장 까칠하고 말빨이 좋다.

유럽에서도, 내게 말걸고 관심가지는 외국인들은

한국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몇몇" 외국인들뿐이었다.



그외에는 서로에게 관심도 없다. 피해도 주지 않지만 도움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가장 인색한 나라 사람은 바로 한국인이 아닐까 한다.



내가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수많은 계단이 있는 다리를 건널 때,

도와준 사람은 서양사람 뿐이었다.



멀리서 뛰어와서 내 가방을 들어주었고,

한국사람들은 "한국말하면서" 유유히 내옆을 스쳐지나갔다.



두 사람밖에 못 지나가는 아주 좁은 길목에서

그냥 스쳐지나가기만 한게, 그날따라 비도 오고 더욱 서럽고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서양사람이 내 캐리어를 들어줄 때,

한국인이 한국말로 "오우 착하다~ㅋ" 이러면서 지나칠때에도 역겨웠다.



전에 호주에 갈때,

시드니로 가는 대한항공 직항 비행기에서 바로 옆자리에 호주 이민생활하는 한국인을 만났다.

그는 시민권을 얻기 위해 호주에서 생활하며 대학을 다니는 시드니 대학 대학생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인은 남의 이목을 중요시여기고 눈치를 주기 때문에,

남의 생활에 관여하지 않는 호주가 좋다고 말했다.



나는 그가 한국사람들에게 적응하지 못해 도피이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 마음이 편한게 최고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남들이 부러워한다고 내가 편하지도 않는데

굳이 그렇게 몸과 마음을 다쳐가면서,

이목에 신경써야할까



라는 생각이 요새들어 들고 있다.



내가 은행에서 일할 때,

은행 사람들은 대부분 여자였는데, 뒷담화가 엄청났다.



한 명이 밥 먹는 멤버에 없으면 뒷담화를 했고,

육아휴직했다가 복직한 여직원을 같은 여직원이 무시를 했다.

자신도 아이를 낳을거면서 어떻게 그럴수 있을까?



청원경찰 남직원을 못생기고 덜떨어졌다고 사람 보는 앞에서 욕하고,

티타임이나 밥먹는 멤버에서 잠깐 자신의 일을 위해 빠지면

곧바로 아웃이었다.



아무리 자기 할일이 바빠도 그자리에서 빠지면 곧바로 뒷담화였기 때문에

서로 자리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이게 회사생활인지, 이지메에서 살아남는 법인지,

잘 모르겠다.



거기다 남자 차장님마저도,

일보다 사회생활이 중요하다며 내게 넌지시 언급을 했다.



거기서 살아남는 법은 이러했다.

은행원 언니들이 누군가를 뒷담화하면 함께 뒷담화를 해야 했다.

무조건 언니말이 옳다고 해야하고, 같이 울어주고,

언니들이 잘난 일(주로 소개팅에서 의사를 물어와 사귀게 되었다는 이야기)에는

무조건 찬양을 해야 했다. 부러워하는 눈빛과 말을 던저야 인정받을 수 있었다.



내가 첫 직장을 이상한 곳으로 잡은 것일수도 있다.

허나 그것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나는 첫직장의 경험이 별로 좋지 못한 것이 된다.



이것으로 앞으로의 직장도 무섭다.

정시퇴근하는 공무원이 아닌,

검찰수사관 같은 공안직 공무원은 정시퇴근이 있다 하더라도

그 시간에 퇴근하는 직원은 거의 없다.

물론 회사도 마찬가지겠지만

회사는 돈이라도 더 준다 치지만,



검찰수사관은 국민을 위해 야근한다고 돈을 더 달라고 말할 수도 없다.

초과근로이면서 초과수당을 요구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위치에 있다.



일례로 소방관도 그러하다.

목숨을 바쳐 처자식 얼굴도 못보고 일하지만

받지 못한 초과수당이 엄청나다고 한다.

초과수당을 요구하면 거의 권고사직이 오가니,

내생각에 공안직 공무원만큼 부당한 게 있을까 싶다.



물론 정년퇴임과 연금때문에 공무원을 꿈꾸는 이들도 많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것을 꿈꾸지도 않았을 뿐더러

가장 행복한 것이 인생의 조건이기에



명예도 아니고 경제력도 아닌

내 자신의 인생이 평화롭고 윤택하길 바란다.



내가 경영학을 떠나왔다고 해서 경제학에서 눈을 뗄 수는 없다.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고,

오늘 사둔 채권이 10년 후엔 휴지조각으로 변할 수 있다.



연금보험에 가입한다고 내 미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국민연금, 연금보험, 변액보험을 믿느니

내 자신의 커리어를 믿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차라리 부동산 투기를 하는 게 노후대책에 옳은 일일 수도 있다.



24살때부터 노후를 대비해왔지만,

진정 노후를 맞이하는 법이 무엇일까

지금부터 생각하고 있다.



남들이 보기엔 지금 쉬고있는 내가 비생산적일 수 있지만,

내 두뇌는 어느때보다 풀가동하며 열심히 선택의 선택을 거듭하고 있다.



최적화된 선택은 아마 없을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합격을 목전에 두고 포기한 내가 부모님은 안타까울 수 있다.



올해 성적이 의외로 잘 나왔다. 그래도 공부한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내년이면 붙을 정도의 유의미한 성적이 나왔다. 

국어 영어는 당연 고득점이었고, 법학과목도 중간 이상 수준으로 올라왔다.



이것을 버리는 것에 대해 부모님은 아까워하신다. 아직 부모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포기한건 나였다.



포기라기보다, 관심을 끊은 것이다.

완전히 관심을 끊었다.



한가지를 잘 하게 되니 다른 한 가지를 더 잘하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공무원시험은 영어가 당락을 좌우한다고 하는데

영어에서 고득점을 얻어서 그런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직장생활의 회의감을 벌써부터 느낀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절대 - 

더이상 내 마음을 다치게 하는 일은 없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먹은 약들과 고통의 시간을

이제는 없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좋은 남자친구를 만난 게 가장 큰- 행복이고

이 사람과 행복을 영구 지속시키기 위해

내가 노력할 일을 찾는 것뿐이다.



어제도 생각해두었지만.....

아마 그대로 할 것 같다.



처음부터 시작하는게 아니다.

지금까지의 발판을 토대로,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이다.



외국에서 테솔자격증을 따서

영어강사를 하며 해외여행을 하는 것도 생각중이다.

이것도- 대학생때 한번 생각해두었기 때문에

자료는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



고를게 많아서 걱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두 가지로 좁히자면

내가 잘하는 건 영어와 국어이다.

그리고 추가하자면 경제학?

법학은 일반 법대생 수준이다.



물론 일반인들보다야 상식이 있지만

더이상 법률, 변호, 재판 같은 개싸움에 끼고 싶지 않다.

변호나 수사같은 것들 다 -

누군가를 의심해야 하고, 득달같이 따져야 한다.

심문을 통해 자백을 받아내야 하고, 나는 독해져야 한다.



내 남자친구는 나보고 성격나빠진다고 오유하지 말라고 했다.

나도 이젠 정말 지겹다는 생각이 들어서 들어와보지 않다가

오늘 문득 뭔가를 기록하고 싶어서 들어왔다.



블로그나 싸이에도,

이런 글은 못 올릴 것 같다.

차라리 내가 누군지 모르는 곳에 올리는 편이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일기장에 써도 되지만,

왜인지 이런식으로 기록해두고 싶었다.



내 일기지만 공유해도 좋아.

라는 느낌인걸까.

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이 보면 안돼.....

이를테면 대학 친구나 친척들, 가족들 같은 경우이다.



남자친구는 봐도 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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