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에서 소녀가 배가 아파 죽겠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차트에는 '16세 백인 소녀, 복부 통증, 월경은 5일 전에 끝남, 체중 96Kg'으로 적혀 있었다. 환자는 나이에 비해 상당히 뚱뚱했다. 땀을 흘리며 간헐적으로 통증이 심하다고 소리를 질러 대는 통에 문진을 간단하게 했다. 그녀의 통증은 16시간 전에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배가 뜨끔뜨끔 아프더니 점점 심해졌고 욕지기가 심해 토했다. 성관계도 없었고 결코 임신한 적도 없었다. 월경은 2년 전부터 불규칙했으며 지난 2년 동안 서서히 살이 찌더니 30kg이나 불었다. 다시 한 번 월경과 섹스에 대해 확인했다. 그녀의 마지막 월경은 1주일 전에 시작하여 5일 전에 끝났다. 성관계는 활발하지 않았다고 극구 부인했다. 복 부 진찰을 막 시작하려는데 환자가 갑자기 몸을 비틀며 괴성을 질러 댔다. 순간 무언가 물컹 터지면서 양수가 분출했다. 곧이어 미끌미끌한 뭉치가 꿈틀꿈틀 움직이며 미끄러져 내려왔다. 순간적으로 클램프(죔새)로 죄고 탯줄을 잘랐다. 응급 출산 가방을 열고 흡입기로 입과 코를 빨아들였다. 3.8kg의 사내아기는 우렁차게 울어 대기 시작했다. 아기를 조심스럽게 소녀 어머니의 가슴에 안겨 주었다. “아-아!” 그녀는 탄성을 지르며 외쳤다. “저것이 내 몸에서 나오지 않았지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부모와 애인, 학교 친구들 그 누구도 이 소녀가 임신한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태아의 어머니인 소녀 자체도 자신의 임신을 모르고 있었다. 임신에 인해 부모, 친구, 학교와의 관계가 잘못될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가 임신거부증(déni de grossesse)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상의 이야기는 미국에서 일어난 임신거부증으로 인한 실제 사건이다. 임신거부증은 임신으로 고통을 느끼는 여성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임신 사실을 부인하고 임신하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상상임신의 반대 개념이다. 전문가들은 임신거부증의 경우 출산을 하면 아기에 대한 모성애를 전혀 갖지 못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례적이지만 임신거부증의 경우 임신 상태에서 생리를 하는 사례도 발견된다.
외신들은 지난 29일 프랑스 북부 마을에서 살던 부부가 자신의 아이들 8명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보도했다. 남편은 시 의회에서, 부인은 간호사로 일했던, 이웃들이 ”파리 한 마리도 못 해칠 사람들“로 생각한 이들의 범죄에 다시 한 번 임신거부증이 화제가 되고 있다.
베로니크 쿠르조의 재판 광경을 묘사한 프랑스 신문의 삽화 ⓒ 자료사진
지난 2006년 서울 서초구 서래마을에서 프랑스 여성이 자신이 낳은 신생아 2명을 살해하고 냉동고에 넣어 보관했던 엽기적인 사건이 있었다. 베로니크 쿠르조(Veronique Courjault)라는 이 여성은 자신의 아이 3명을 살해한 혐의로 그해 10월 프랑스 현지 경찰에 긴급 체포됐다. 이 후 2009년 6월 18일 영아 살해-유기 등의 혐의로 베로니크 쿠르조는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 투르 중범재판소는 당시 8시간의 토의를 거친 뒤 검찰 구형량 10년보다 가벼운 형을 선고했다. 쿠르조는 지난 5월에 가석방됐다. "내가 죽였어요. 하지만 아이는 아니에요. 내 뱃속에서 나온 무언가를, 내 신체의 일부이던 무언가를 제가 죽였어요." 베로니크 쿠르조는 법정에서 재판을 마친 뒤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절규했다. 그녀는 한국에 오기 전인 1999년 프랑스에 머물 때도 또 다른 영아 1명을 살해한 바 있다. 프랑스 법원이 이례적으로 낮은 형량과 가석방의 온정을 베푼 것은 그녀가 이처럼 중증 임신거부증을 앓고 있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한 조사에 의하면 프랑스 여성 가운데 매년 800~2000명이 임신거부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이는 프랑스의 경우만 아니라 한국의 경우도 예외일 수 없다고 의학계는 얘기한다. 한 산부인과 전문의는 “한번쯤은 뉴스에서든 어디서든 들어봤음직한 ‘여고생이 학교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았다더라’는 얘기를 떠올리면 된다”고 말했다. 그런 뉴스에 접하면 보통 “어떻게 학생의 부모나 주위에서 그것을 몰랐을까”라고 믿지 않지만 그렇지 않다는 설명이다. 즉 임산부 자신도 알지 못하기(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충격적인 것은 임신부가 자신의 임신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안)하고 임신을 하지 않았다고 믿으면 태아도 알아서 조용히 큰다는 것. 자 궁도 둥글게 커지는 것이 아니라 길게 커지고, 태아는 태동도 없이 아홉 달 동안을 최대한 엄마에게 방해를 주지 않는 방향으로 큰다고 한다. 실제로 서래마을 사건의 베로니크 쿠르조의 경우 임신 7개월 때 수영을 즐겼지만 주위에서 임신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산부인과 전문의들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끝내 거부할 때 강렬한 마음이 초능력적으로 신체를 조절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전문의들은 이를 ‘정신 방어기전’(mental defense mechanism)이라고 설명한다. 정 신방어기전이란 원초적 본능이 의식화하는 것을 막고, 내적인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아가 이용하는 수단이다. 정신방어기전은 이런 보호를 목적으로 반응하는 외에도 어떤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자신이 안심할 수 있는 쪽으로 마음의 방향을 조절하기도 한다. 임신거부증의 경우 함든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자기방어수단으로 ‘부정’이라는 수단이 사용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전문의들은 “임신거부증이 극히 드문 예이지만 사회의 급속한 성 개방과 함께 남의 나라의 일로만 치부해서는 안된다”고 경계하고 “의심되는 경우 주위의 관찰과 함께 빠른 시간 내에 전문의의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