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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해전] 살라미스 해전과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2
게시물ID : humorbest_63386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밤바람
추천 : 19
조회수 : 2001회
댓글수 : 0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3/02/21 23:24:58
원본글 작성시간 : 2013/02/18 11:28:17

맨날 오유에서 좋은 자료들 퍼가기만해서 뻘글이지만 제 블로그에 올렸던 글들을 옮겨봅니다.

걍 이런글도 있구나 정도로 생각해주세요

 

[세계 3대 해전] 살라미스 해전과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2

이번글 부터는 소 제목을 넣어서 작성하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그렇게 하는 것이 복잡한 배경 내용을 덜 빠뜨리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리고 존칭도 가능하면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

 

조금전에 다 작성했던것을 날리고 다시 작성하는 것이라서 이번글은 좀 짧아질것 같습니다.

스파르타하면 영화 300 이 아니더라도 강력한 군사국가로 잘 아실겁니다.

 

왜 강력한 군사국가 체계인지 부터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1.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차이점

스파르타가 위치한 지역과 아테네가 위치한 지리적 환경과 역사적인 특성이 이들 국가의

경제적,군사적,계급적 차이를 만들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테네가 위치한 지역은 평지가 적은 산악 지형이 대부분으로

바다가 인접한 포구형태의 지형입니다.

즉 농경보다는 해상을 이용한 상업 활동이 주를 이루게 되며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상업 활동을 하는 이들은 투표권을 가진 자유시민군으로 페르시아 전쟁에 참여를 하게 됩니다.

즉 투표권을 갖는 대신 평소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시에는 본인들 스스로 무장을하고

전쟁에 참여하는 민병들인 것입니다.

스파르타가 위치한 지역은 평지가 넓어 경작이 유리한 지형으로 해양을 이용한 상업 보다는

농경쪽에 치우치게 되며 1 대 16 대 11 정도의 비율로된 계급체계를 갖게 됩니다.

1 에 도리아인으로 구성된 귀족 계층으로 전쟁을 담당

16 정도에 상업에 종사하는 아테네 계통의 일반 평민 계층으로 세금을 담당

11 비율의 피 정복인들로 구성된 농노예 계층으로 귀족에게 복종하며 농경을 담당

전투국가로만 알려진 스파르타가 농경 위주의 경제 체계를 갖게 된것은 바로 농사는 피 정복인인

농노예가 하고 전투는 도리아인으로 구성된 귀족들이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도리아인 귀족들은 평소에도 전투훈련을 하고 전시에는 전쟁을하는 직업군인인 셈인것이죠

강력한 도라아인 위주의 귀족 체제로 남자들이 전쟁에 나가게 되면 귀족 여자들이 남아서

하위 계층의 반란을 진압하는 일을 맡습니다.

영화 300 을 보시면 왕비가 배신자를 처단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원래 이런일은 남아있는 여자들이 맡는것이 전통이었다고 합니다.

이분들이 주로 반란을 진압하고 배신자들을 처형하며 남자들이 전쟁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담당합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차이는 민병과 제대로된 전투 훈련을 받은 군인

그리고 전쟁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사회 체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아테네가 군사력이 약한것만은 아닙니다.

육군이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것이지 해상무역을 하면서 익힌 해양기술에 의해서 해군은

당시 지중해 최고의 군대였습니다.

또한 육군이 약하다보니 성벽 문명이 발달하여 외적을 막아내는데

용이한 건축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2. 헤라클레스의 귀환 도리아인과 미케네 문명

앞서 스파르타의 귀족 계층을 도리아인이라고 하였는데 이들 도리아인들에 대해서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원전 1200년 그리스의 도시국가들과 트로이가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아주 유명한 전쟁으로 일리아드 오딧세이도 이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트로이의 위치는 마케도이아의 동쪽 소아시아의 위치한 작은 국가로 그리스에서 무척이나

가까운 곳입니다만 당시엔 노젓는 갤리를 타고 어마어마한 시간동안 항해를 한 후20년간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트로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포스트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후 거의 동일한 시기 북쪽에서 도리아인들이 내려오면서

근 400년간 그리스의 역사적 암흑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당시에 남겨져있는 역사적 자료들은 현존해 있지 않기에 추정을 해야합니다만

한때는 도리안인들의 그리스 정복으로 인하여 암흑기를 맞았다가 정설이었지만

지금은 관점이 달라집니다.

미노타우르스 전설은 다들 아실겁니다.

크레타섬의 미노스와으이 아들 미노타우르스는 머리가 소의 형상이며

몸은 거대한 괴수로 매년 그리스의 남녀를 재물로 받아 동굴로 만들어진 미로같은

궁전에서 잡아먹는 식인귀이지요

이 미노타우르스를 죽이기 위해 그리스의 왕자가 크레타섬으로 오게되는데

미노스왕의 딸인 공주와 눈이 맞아 공주에게서 미노타우르스를 죽일 수 있는 칼을 받고

미로같은 궁전을 빠져나올 수 있는 실뭉치를 받아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평화를 찾는다는

전설입니다.

전설은 이렇게 풀이 됩니다. 그리스가 크레타섬의 지배를 받았는데 철기로된

칼을 얻어 크레타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런게 아닐까요?

크레타섬의 위치는 발칸반도 동남쪽 즉 문명의 발생지인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그리스보다 가까운 곳으로 크레타 문명이 발전할 수 있었기에 보다 야만적인

미케네 문명인 그리스를 지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크레타문명의 지배를 그리스 북쪽의 도리아인들이 남하하면서 가져온 철기 문명으로

오히려 크레타섬을 정복하게 됩니다.

도리아인들을 그리스인들은 헤라클레스의 후손으로 부릅니다.

별개의 이민족이 아닌 동일한 문화권의 같은 민족이란 뜻이지요

그래서 이들 도리아인의 남진을 헤라클레스 자손의 귀환이라고도 부릅니다.

사실 알고보면 도리아인들은 도리아스계 방언을 사용하는 그리스 민족의 한파이며 이들

도리아인들도 그리스인들에 대해서는 같은 민족으로서 대합니다.

그리스가 청동기에서 철기문명으로 넘어가는 계기와 미케네 문명의 발전은 이들 도리아인의

남진으로부터 시작되며 아무래도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이다보니 스파르타인들이 용맹한것은

당연한가 봅니다.

 

3. 영화 300과 테르모필레 전투

기원전 480년 드디어 아버지 다리우스 1세 와 페르시아의 자존심 회복을 위해 크세르크세스 1세는

4년간의 전쟁 준비를 마치고 대규모 그리스 원정길에 나섭니다.

목표는 그리스 전역의 정복입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을 따르면 200만의 페르시아 원정군이라고 하며 페르시아의 이야기로는

80만 대군이라고 합니다.

현대 역사학자들의 추정으로는 해군 15만 육군 20만의 대군이라하는데 뭐가 어찌되었든 대군인것은

변함 없습니다.

이분들이 레오니다스 왕과 크세르크세스 1세 황제입니다.

이번 원정길에 크세르크세스 1세는 해안선을 따라 해군과 육군이 함께 진격하는 루트를 택합니다.

가다가 만나는 그리스계 국가들은 모두 접수하겠다는 것과 해군과 육군이 함께 힘을 합쳐서 규모를

더욱 크게 보이기 위함입니다.

간단한 지도 설명을 하겠습니다.

지도에 표시는 그림판을 이용한것이라 조잡하지만

검은색 원이 테르모필레 전투가 발생한 뜨거운 문이 있는 지역입니다.

파란색 원은 스파르타가 있는 지역이며

노란색 원은 살라미스 해협 즉 이곳에서 살라미스 해전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곳이 바로 동쪽 해안이 아테네가 있는 곳입니다.

참고로 테르모필레 위에 부분이 마케도니아이며 우측에 보면 조그만 해협이 있는데

이곳을 페르시아 육군이 도보로 건넙니다.

이 해협의 이름은 헬레스폰트해협으로 아무리 작아도 해협인데 이곳의 부교를 설치하여

크세르크세스 1세는 건너려합니다.

마침 바다가 험하여 부교 건설이 어려워지자 채찍으로 바다를 때려 바다마저 복종시킨 후

부교를 건설케하여 건넜다고 합니다.

페르시아의 대군이 헬레스폰트해협을 건너 침공해 들어왔다는 소식에 그리스 전역은 비상에 걸리고 전쟁회의를

하게되는데 이때 그리스 아테네의 장군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리스 연합군이 테르모필레 고개에서

페르시아 육군의 진입을 막는 동시에 아르테미시온 해협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막자고 제안하였고

이를 레오다니스왕이 받아들여 테르모필레스 전투가 시작되게 됩니다.

사실 이 작전은 육전이 강한 스파르타를 중심으로한 그리스 연합군이 테르모필레 협곡을 막고

해상무역을 통한 항해 기술고 그간 3단 갤리선 200척 해군 4만명을 육성한 아테네가 주축이된

그리스 연합군의 해군이 페르시아 함대를 막는다는 아주 이상적인 전술입니다.

작전대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가 지휘하는 7000-8000명의 중갑보병과 경장비병으로 구성된

육군은 테르모필레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고, 아테네의 해군은 스파르타의 유리비아데스를 함대

사령관으로 하는 해군은 총 330여척(이 중 아테네 함대가 180척, 스파르타 함대가 10척)으로 구성되어 바다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맞게됩니다.

그리하여 스파르타가 주축이된 그리스 연합군은 기원전 480년 여름에 북쪽으로 행군하여

테르모필레의 뜨거운 문으로 불리는 고갯길을 봉쇄합니다.

이곳은 넓은 평원에서 좁은 협곡으로 이어지는 지형으로 ㅈ에게도 적은 병력으로 대군을 맞아

싸우기에 좋아 보입니다.

이곳에서 그리스 특유의 긴창과 방패를 이용한 팔랑크스 진형으로 방어전을 수행합니다.



팔랑크스 진형은 전편에서 설명하였듯이 앞이 무척 강하고 옆과 뒤에 약점을 갖은 진형입니다

지리적으로 좁은 협곡에선 옆과 뒤를 방어할 필요가 없으니 진형의 이점을 극대화 할 수 있기에

방어전에서 최상으로 효과를 보게 됩니다.

영화 300에서 처럼 짧은 창을 들고 활극을 벌이는 장면은 없었겠지만 이들은

페르시아군 2만명을 협곡에서 죽음으로 몰아 넣으며 7일간 전투기간은 3일간 대군을 맞아 버텨냅니다.

사실 크세르크세스는 폭풍으로 페르시아 함대의 도착이 늦어진 데다가 대병력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 그리스군이 항복할 것으로 기대하여 4일 동안 군사작전을 벌이지 않고 대기하였다가

5일 째 되는 날부터 공격을 감행합니다만 지리적 이점과 진형적 이점 그리고 용맹한

스파르타인들오 인하여 발이 묶이게 됩니다.

영화에서처럼 인근 주민의 배신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몰랐을 일입니다만

팔랑크스 진형의 최대 약점인 배후공격을 위한 뒤로 돌아가는 길에 대한 정보를 접수한

크세르크세스 1세는 배후공격을 강행합니다.

이를 눈치챈 레오니다스 왕은 그리스 군대의 진열을 해체하고 후방을 지키기 위하여 병력을 빼며

스파르타인 300명, 테스피아이인 700명, 테바이인 400명 그리고 여타 몇백명을 배치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은 영화에서 처럼 전사하게 됩니다.

최후의 스파르타군 300 명이 영화 300의 모티브가 된것이지요

역사학자들은 테르모필레 전투를 일컬어 조국 땅을 지키려는 애국적인 자유민 군대의

위력을 보여주는 예로 삼으며 또한 훈련, 장비, 지형의 이점을 살려 전력 증강을

꾀한 사례로 압도적인 적에 맞서는 용기의 상징으로 이야기 합니다.

위에 표현은 고대 역사학자들이 한말들 중 일부입니다.

살라미스 해전까지 작성을 하려고 했으나 글이 한번 날라간 통에 본 내용도 짧아지고

남겨진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이야기할부분은 아래와 같으며 오늘 조금 짧은 부분도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4. 정치가 테미스토클레스의 전술

5. 3단 갤리와 5단갤리의 싸움

6. 전쟁이 남긴 결과 알렉산더 대왕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원본글 출처 내 블로그

이미지 출처 이름 모를 블로그, 오유,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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