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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흘리는 사명당 표충비
게시물ID : mystery_633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포스트댓
추천 : 2
조회수 : 2664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5/07/10 23:22:11
땀 흘리는 사명대사 표충비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를 침범한 일본 왜구들을 물리치기 위해 전쟁에 나가 싸워서 나라를 지키고 일본까지 건너가
왜장과 협상하여 포로로 끌려간 우리나라 사람들을 구해 오신 사명당 유정 대사.
돌아가신 후에 세운 사명당 표충비는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돌에서 많은 물이 흘러나와 세간의 이목을 끕니다.

땀흘리는 사명대사 비석
주제 : 기이 국가 : 한국 시대 : 조선 지역 : 경상도 참고문헌 : 경상남도지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분연히 앞장섰던 의승대장 사명대사의 구국의지를 기리기 위해 조선조 선조대왕은 명을 내렸다. 

「사명대사의 고향에 전각을 세우고 그곳에 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여 훗날까지 스님의 충혼을 모시도록 해라.」 

임금님의 명이 떨어지자 사명대사의 출생지인 경남 밀양군 무안면 산정리에는 사당이 세워지고 스님의 영정이 봉안되었으며, 선조는 이 전각을 『표충사』라 사액했다. 

「누구든 이 표충사 근처를 어지럽히거나 신성시하지 않을 시는 엄히 다스리도록 하라.」 
친히 사액을 내린 선조는 고을원에게 이처럼 신신 당부하여 사명스님의 호국정신을 치하했다. 

그로부터 관료는 말할 것도 없고 백성들까지도 그 사당 앞을 지날 때는 늘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올렸다. 
그렇게 1백여 년의. 세월이 흘러 당우가 퇴락하자 사명스님의 5대 법손인 남봉선사는 표충사를 중수하는 동시에 스님의 공적을 기리는 표충비를 세웠다. 

때는 영조 14년, 1738년이었다. 남봉스님은 표충비를 세울 돌을 고르기 위해 경상도 경산까지 가서 벌석해 왔다. 높이 3 · 9cm, 폭 97cm, 두께 70cm크기의 돌을 구해온 남봉스님은 당시 정승 이익현에게 비문을 부탁했다. 

「내 본시 승려의 부탁으로 글 짓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나 오직 대사님의 사적이 간절하여 특례로 이를 물리치기 어려워 곧 비에 글월을 새기는 것입니다.」 

배불숭유 정책으로 불교를 탄압했던 당시의 정승 역시 사명대사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외면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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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비가 세워지고 다시 백년 후 그러니까 조선 제 24대 헌종 5년(1839), 사명대사의 8대 법손 월파선사는 표충사를 밀양영정사로 옮기고 절 이름을 『표충사』로 바꿨다. 표충사원이 옮겨지자 사명스님의 고향엔 표충비만 남게 됐다. 지방문화채 15호로 지정되어 지난날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는 이 비석은 현재 몸체에 금이 간 것은 일제 때였다. 사명대사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일본사람들은 잔꾀를 냈다. 

「저 비석은 보기만 해도 왠지 섬뜩하단 말이야. 마치 사명대사 귀신이라도 담긴 것만 같으니 무슨 방법을 쓰는 것이 어떻겠소?」 
「좋소. 나도 동감입니다. 저 비석 옆에다 감배 창고를 옮겨 짓도록 합시다.」 

일인들이 사명대사의 혈맥을 끊기 위해 비석 옆에다 창고를 세우던 날이었다. 비석은 마치 살아 있는 듯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한동안 못 견딜 정도로 몸부림치니 비석 몸체에 마치 피를 흘리는 듯한 형상으로 『쫙』 금이 갔다 일본 사람들이 표충비를 무서워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임진왜란 때 왜구를 물리친 용맹스런 승장의 비란 점도 없지 않으나 마치 스님의 구국 혼이 비석에 어린 듯 나라에 큰일이 일어날 때면 비석에서 땀이 흐른다는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진 것이다. 
예전 것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비석이 세워진 후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땀을 흘렀다는 첫 기록은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나기 7일 전으로 되어 있다. 
비석이 있는 곳을 지나던 한 아낙은 매서운 겨울 날씨인데 비석 몸체에서 땀이 흐르듯 물기가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낙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 역시 가만히 두고만 볼일이 아니다 싶어 관가에 달려가 고했다. 
당시 비석이 흘린 땀은 3말 1되나 된다고 한다. 그 뒤 군지에 기록된 표충비의 땀 기록은 경무합방, 기미독립만세운동, 8.15해방, 6·25동란, 4·19의거, 5·16혁명 등 6차례다. 
그중 가장 많은 땀을 흘린 것은 기미만세 사건 때와 5 · 16혁명 때, 기미독립운동 때는 19일간에 걸쳐 5말 7되를, 5.16혁명 때는 5일간에 5말 7되를 1983년 미얀마 랑군 참사때 2말, 1985년 9.18 남북 고향 방문때 1말, 1997년 IMF구제금융 때 1말6되, 2002년 12.3 여중생 미군장갑차 참사 촛불시위 때 2말, 2003년 4.3 이라크 전쟁 때 1말 6되, 2004년 2.21 2말4되, 2004년 2.29 2말 4되로 최근에도 계속 흘리고 있다. 
군의 공식 기록은 없으나 육영수 여사가 입적한 다음날도 비석은 땀을 흘렀다고 한다. 
이렇듯 나라에 중대사가 있을 때면 미리 땀을 흘려 어려움을 예고해 주니 마을 사람들은 비석의 영험을 받아들여 대소사에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됐다. 
6 · 25동란 때는 전쟁이 일어나기 25일전부터 3말 1되 나 흘렸다. 
「표충비가 땀을 흘린다는 소문이 동네에 나돌기 시작하자 주민들은 아무래도 무슨 변이 있을 조짐인 듯하다며 양식이며 비상약품 등을 준비했지요.」 
6 · 25 무렵을 회고하는 주민 이씨의 말처럼 마을 사람들은 땀 흘리는 비석의 영험을 믿으며 크고 작은 일에 조심하고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 
「우리 마을에선 사명대사의 구국 충혼"이 표충비에 어려 있다고 믿고 있지요. 매년 관광 철이면 이 비석을 보려고 1백만의 관광객이 들르는데 주민들은 너나없이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을 강조하며 자랑스럽게 비석을 안내합니다.」 
사명당 추모회 구조회 회장의 말처럼 마을 주민들은 사명대사의 정신을 이어 대대로 정의감이 강하다는 소문이다. 
비석이 땀을 흘릴 때는 꼭 사람이 땀 흘리는 형상과 꼭 같다고 한다. 
앞이마에 방울이 맺혀 턱으로 흘러내리는 듯 비석후면 머리 쪽에서 땀이 나와 비문 글귀이를 타고 흘러내린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요즘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기후 ·습도 운운하지만 여러 차례 땀 흘리는 장경을 목격한 저희들은 사 명대사의 충혼이 서리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을 촌로 한분은 자신의 믿음을 입증이좌도 하려는 듯 62년 장마 때는 보리가 썩어나갈 정도인데 비석엔 숨기 하나 차지 않았다」며 사명대사의 영이를 거듭 강조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앞으로는 이 비석이 나라의 경사로 땀 흘리는 일이 많기를 발원하고 있다. 

<慶商南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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