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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떨리게 다가오는 단어인지 너희가 알까? 그 이름 하나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전 생애를 바쳤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사라졌을까? 혁명이란 ‘한 체제를 결정적이면서 급진적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산업혁명, 프랑스혁명이라고 말할 때 그런 의미다. 나는 한국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킬 꿈을 꾸어왔다. 돈이 아니라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 폭력으로 인간의 꿈이 짓밟히지 않는 세상을 위해 투쟁해왔다. 그런 꿈이 잘못된 것일까?
왜 여전히 혁명을 꿈꾸냐고?
신지호라는 사람이 있다. 울산에서 같이 지하조직을 할 때 책임자였다. 1992년 어느 날 그가 우리가 만든 [길]이라는 잡지에 느닷없이 “그대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운동을 포기한다는 일종의 전향선언이었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벌어진 용산참사에 대해 “무고한 시민들의 재산과 생명을 심히 위협하는 도심테러 행위” “철거민연합은 범죄집단” “고의적 방화” 라는 등의 막말을 하기도 했다. 도저히 같이 혁명을 꿈꿨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행보를 보인다. 386세대를 팔아 정치를 하는 사람은 많이 보았지만 과거의 동지들을 팔아 출세하려는 사람을 가까운 주변에서 처음 본 경우다.
무릇 모든 변절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변절이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 총구를 옛 동지들에게 겨누는 것은 과거에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 좌파가 그들의 낡은 이념을 수술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바로 도덕성 회복 운동이다”라고 그가 말했을 때 그건 코미디다. 제 버릇 개 못준다고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100분 토론에 술을 마시고 나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한 그의 도덕성은 무엇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1990년대 소련 공산당의 몰락을 보면서 운동을 떠난다. 그러고 보면 내게는 ‘이론이 아닌 사람들의 삶’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론이 더 중요한 가치였나 보다.
“진보의 가면을 벗겨보면” “좌파들의 무작정 편들기” “운동권 평등논리에 묻힌 ‘자유’ 살리기” “친북주의자들을 어떻게 고립시킬 것인가” “한국 좌파의 도덕적 파산”… 대충 그들이 만든 [자유주의연대]의 홈페이지를 들여다 본 제목들이다. 그들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분명히 드러난다.
나는 당시 내가 그들을 비판하는 글을 쓰면서 딱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요지는 “노무현 정부를 수구좌파로 불러줌으로서 국민들을 헷갈리게 하지는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노무현 정부를 좌파로 부르면서 공격을 해댔다. 그래서 자신들 같은 새로운 우파가 필요하다는 논리다.
“노무현 정부를 수구좌파로 부르는 것이야 말로 좌파를 가장 크게 욕하는 길이다. 자기가 공약했던 공무원노조의 노동3권 인정에 대해서도 그렇고, 비정규직의 문제에 대해 연대파업까지 하는 정규직 노조를 두고 이기적으로 몰아대는 노무현이 좌파라면 그건 너무 심한 왜곡이다. 개구리 올챙이적 기억 못하듯 천방지축인 노무현을 수구좌파로 몰아대서 살아갈 ‘진정한’ 우파라면 처음부터 싹수가 노랗다.”
불행하게도 노무현 대통령은 보수세력에게는 ‘좌파정권’으로 욕을 먹었지만 거꾸로 진보진영에게는 좌파의 꿈과는 거리가 먼 신자유주의 신봉자로 규정되었다.
좌회전 신호를 하면서 계속 우회전
같이 운동을 해 온 또래들 중에 노무현 정부에 깊숙하게 진출해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한번은 웃으며 말한 적이 있다.
“대통령에게 말 좀 하지. 좀 잘 좀 하시라고!”
“왜? 잘하고 있잖아!” 그게 돌아온 대답이었다.
집권 초기부터 보수언론들은 “정부가 노동자에게 밀리고 있다” “정부가 노동자 편만 들고 있다” “떼쓰면 뭐든지 얻는 세상, ‘목소리 크면 승리’ 파업 만능 초래” 등등의 기사를 가지고 몰아붙였다. 그래서인지 노무현대통령은 취임 후 불과 100일도 안되어 “대통령 해먹기가 힘들다.”고도 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사실 노동자 해먹기가 더 힘들었던 시절이다. 노무현대통령은 “노조를 최대의 지원 그룹으로 생각했는데 이럴 수가 있느냐?”라고 서운해 했다고 한다. 글쎄 누가 더 서운해 해야 하는 것일까?
당시 어느 글엔가 “보수 언론의 장단에 춤추기 시작하면 정권이 끝날 때까지 피곤한 춤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썼는데 실제 그랬다.
보수 언론에 휘둘렸다. 노무현 대통령의 행보와 관련해서는 “좌측 깜박이를 넣고 계속 우회전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딱 어울렸다. 이라크파병도, 새만금 사업도, 한미 FTA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개정도 그랬다. 심지어 2005년에는 전용철, 홍덕표라는 농민 2명이, 2006년에는 하중근이라는 건설노동자가 집회 도중에 경찰에 의해 백주대낮에 맞아 죽기까지 했다.
특히 노동문제에 대해서 더욱 우향우를 했다. 노무현 정부의 노동정책은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라고 한다. 이에 따라 ‘노사관계선진화방안’이라는 것을 추진했다. ‘노사관계로드맵’이라고도 한다. 말이 되게 어렵다. 일반적으로 뭔가를 속일 때 사람들은 말을 어렵게 한다. 말로는 선진화 방안이었지만 대부분 조항은 후진적인 것이었다.
노동법을 개악하여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파업의 자유가 제한되었다. 파업을 하더라도 정부가 ‘필수적인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정하면 그 사람은 파업에 참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지하철노조가 파업하더라도 기관사의 일부는 파업을 하지 못하게 제한하는 식이었다. 국제노동기구인 ILO에서 오랫동안 폐지를 권고해 온 직권중재라는 제도는 긴급조정으로 대체되었다. 노동기본권을 대폭 제한한 셈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비정규직관련 법이었다. 사용자의 반대가 있다고는 했지만 노무현 정권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을 외면했다. 합리적 이유가 없는 한 기간을 정해 비정규직 노동자를 채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만일 사용하더라도 1년으로 제한하고 그 기간이 지나면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등의 비정규직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듣지 않았다. 학습지 교사, 화물 및 레미콘 운전자, 간병인, 퀵서비스·택배 기사, 골프장 캐디와 같은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3권 요구도 외면했다.
수차에 걸친 민주노총의 파업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외면해 버린 비정규직법에 의해 지금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그것을 노무현 정부는 ‘비정규직 보호법’이라고 했다. 그 법이 정말 비정규직을 보호했다면 그 이후 비정규직이 축소되었어야 옳다. 과연 지금 너희가 그런 세상에 살고 있을까?
기간을 두고 계약을 하는 노동자의 고용기간이 최대 2년으로 정해짐에 따라 사용자들은 2년이 되기 전에 해고를 반복한다. 학교비정규직의 경우 2012년 서울에서만 788명, 인천에서만 526명이 해고되었다. 학기초만 되면 여기저기 해고자가 발생한다. 엊그제도 TV에서 울면서 이런 사정을 얘기하는 학교비정규직이 나왔다. 심각한 것은 학교비정규직만 해도 15만명이 이런 상황아래서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있다. 2년 이상 고용한 사람을 정규직으로 하라고 하니까 사용자들은 별도의 직군을 만들어 저임금을 그대로 유지하기도 한다. 이 글을 쓰는 요즘 나는 부여에서 2011년 9월 11일부터 천막농성을 하며 싸우고 있는 인삼공사 노동자들과 함께 하고 있다. 이 경우가 잘 보여준다. 생산직 사원들을 S급, M급이라는 별도 직군으로 편제하여 일반직과 차별을 둔다. S급 사원은 최저임금을 갓 넘긴 수준의 월급을 받는다.
한 겨울 열린우리당을 점거하기도 하고, 매서운 추위를 이기며 국회도서관을 증측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타워크레인에 오르기도 하고, 국회 앞에서 경찰에게 물대포를 맞으면서까지 “비정규직 철폐하라”며 요구한 그 소리를 외면했다. 한겨울 물대포를 맞으면 얼마나 추운지 네가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노무현 대통령은 입만 열면 ‘대공장 노동자들의 이기주의’를 입에 달고 살았다. 마치 민주노총이 비정규직의 고통에는 무관한 집단인 것처럼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
2009년 5월 23일이다. 노무현대통령이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 있는 사저 뒷산의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2008년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귀향하여 오리농사 등 평범한 전원생활을 하던 참이었다.
새로 당선된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하던 때의 기록물 복사본을 가지고 귀향한 것과 관련하여 ‘국가기록물 무단유출’이라고 수사를 시작했다. 뒤이어 검찰에 의해 측근과 친형, 부인·아들·딸 등이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연이어 불거지자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등진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을까? “분신을 투쟁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났다. 지금과 같이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자살로 인해 목적이 달성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해 모진 말을 하던 그는 왜 같은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죽음으로 항거하는 시대는 끝났다”던 그는 죽음으로 무엇에 저항한 것일까?
엄마와 나는 영결식장을 찾았다. 은지 너도 친구들이랑 왔다. 또 다시 시청광장이었다. 이한열 열사의 장례를 치른 곳, 붉은 악마의 함성이 메아리치던 곳, 촛불이 환하게 민주주의를 염원하던 바로 그 곳이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은 너희 또래가 많이 좋아했다. ‘바보 노무현’ ‘노짱’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권위주의적이지 않고, “이제 막 가자는 거지요?”라는 식으로 말을 돌려서 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동네아저씨처럼 친근했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처음으로 시골로 귀향해서 자전거도 타고, 구멍가게에 앉아 막걸리도 한 잔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학벌위주의 사회에서 고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은 사람으로서 쟁쟁한 정치인들의 패거리주의를 넘어 국민과의 소통을 시도했던 대통령은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안타까운 일이고, 역사의 비극이다.
쌍용자동차와 조현오 경찰청장
조현오라는 경찰만은 기억하자. 그는 2009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77일간의 투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공을 인정받아 경찰청장이 된 사람이다. 2004년 쌍용자동차는 중국 상하이 차에 매각되었고, 중국은 기술이전이라는 목적을 달성한 후인 2008년 12월 운영자금이 없다며 7000여 명의 직원 중 3500명을 정리하지 않으면 철수하겠다고 통보한다. 결국 2,026명의 희망퇴직자와 정리해고자 159명, 무급 휴직자 455명 등 2,600여명이 공장을 떠난다. 정리해고를 실시하려는 회사에 맞서 노동조합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투쟁밖에 없었다.
2008년 뜨거운 여름, 기나긴 투쟁이 있었다. 평택역에서 집회를 하고, 쌍용자동차 정문까지 가는 길은 멀다. 하늘에서는 헬리콥터에서 최루액을 뿌렸고, 회사에 붙어야 정리해고를 면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구사대는 집회 도중 각목을 들고 우리를 쫓아오기도 했다. 창피한 얘기지만 우리는 도망쳐야 했다. 어느 날인가 그들은 도로에 세워진 민주노총 산하 노동조합의 모든 방송차량의 유리창을 깨버리기도 했다.
5년이 지난 2013년 2월, 나는 평택역 앞에서 열린 쌍용자동차 집회에 갔다. 무척이나 추웠다. 살을 에는 바람이란 표현은 진실이다. 그런데 그 추위에 높은 철탑위에서 3명의 노동자들이 백일 넘게 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꿈은 무엇일까? 쌍용자동차에서는 그 사이 모두 2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말역시 진실이다. TV에서 언젠가 평택에 있는 ‘와락센터’를 보여주었다. 그 아픔과 상처들을 ‘와락’ 안고 치유하는 것을 보았다. 피눈물 나는 얘기들이다.
농성 77일되는 날 경찰이 투입된다. 지금 봐도 끔찍하고, 잔인하게 경찰들은 노동자들을 진압한다. 동영상이 남아 있다. 당시 상황을 언론은 이렇게 쓰고 있다.
“2009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살인진압은 그야말로 80년 광주였다. 하늘에선 농약 살포하듯 최루액이 쏟아지고, 용산참극의 살인도구인 컨테이너 박스 3개 속에 중무장한 경찰특공대를 가득 싣고, 고무총탄과 테이저건이 살인의 표적을 찾아다녔다. 살갗이 녹아내리는 최루액이 ‘인체에 무해하다’라는 경찰의 주장은 스티로폼이 눈 녹듯 녹아내려도 계속됐다. 결국 경찰의 살인진압이 시작됐고 실시간으로 방송되는 살인 장면으로 인해 정책부장의 아내는 자결했다. 자결의 배후엔 당시 진압을 진두지휘했던 경기경찰청장인 조현오가 있었다.” 그런 경찰이었다.
초고속으로 승진한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사망하자 기동부대 지휘요원을 대상으로 한 워크숍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무엇 때문에 죽었나? 뛰어내리기 전날 거액의 차명계좌가 발견됐다. 이 계좌에는 10만원짜리 수표가, 거액의 돈이 들어 있는 차명계좌가 발견됐다. 당시 특검 이야기가 나왔으나 부인 권양숙 여사가 민주당에 이야기해 특검을 못하게 했다.”는 말을 했다. 모두 거짓말이었다.
그는 이 글을 쓰는 며칠 전 명예훼손 등으로 법정에서 바로 감옥으로 가는 처지가 된다. 참으로 질이 안 좋은 사람이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있어도 그렇게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그 역시 자식들에게는 자상한 아빠이겠지만 말이다.
한 시대의 비극적 종말
우리나라 대통령들 중에 끝이 좋은 사람들이 많지 않다. 이승만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쫓겨나서 해외에서 죽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부하의 총에 죽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감옥에 가야 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은 대통령은 처음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처음으로 ‘탄핵소추’를 당하기도 했었다.
2004년 봄, “대통령이 선거에 개입하는 등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여 국법질서를 문란케 했다”고 한나라당 국회의원 등 157명이 헌법재판소에 탄핵소추안을 제출하여 대통령으로서 권한이 정지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이에 반발하여 그때도 촛불시위가 일어난다. 그러나 국민들의 의사와는 정면으로 배치된 정치행위로 인해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크게 패하고,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열린우리당이 국회의원의 과반수를 넘는 152석을 차지한다.
노무현대통령의 죽음으로 한 시대는 비극적으로 끝난다. 87년 6월 항쟁의 후광을 얻어 쟁취한 민주화 투쟁 세대의 정치는 수많은 오점을 남겨둔 채 결국 새누리당으로 정권을 넘긴다.
지금 펼쳐지고 있는 정치는 순전히 김대중과 노무현이라는 두 대통령의 오류에 바탕을 둔 정치다. 조금만 더 국민대중과 노동자 대중의 마음을 잡는 정치를 했다면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는 보수정치를 낳지는 않았을 것이다. 깜박이를 넣었던 방향 그대로 개혁을 시도하고, 수많은 비민주적인 요소들을 제거했다면 오늘의 정치는 달랐을 것이다. 그 후 보다 노골적으로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구호가 등장하고, 더 많은 노동자들이 거리로 쫓겨난다. 애석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