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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사 연재 - 3
게시물ID : history_118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한솥매니아
추천 : 14
조회수 : 975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10/01 14:31:49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추석 이후 시험이 겹쳐 연재를 빠르게 재개하지 못했습니다. 기다려 주신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3. 삼부회, 국민의회, 그리고 봉기



"반역인가?"
"아닙니다, 폐하. 혁명입니다." ─7월 14일, 루이 16세와 그의 측근 사이에 이루어졌다고 하는 대화



─삼부회의 파행

사실 삼부회 소집에 있어 왕정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원래 명사회의를 잘 길들임으로써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를 질질 끌어 삼부회까지 가져 온 데다가, 당사자인 루이 16세는 무능력한 주제에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직위의 신성함에 경도되어 왕권을 코딱지만큼이라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재무대신 네케르는 왕에게 삼부회가 소집되면 특권계급과 제 3신분을 각각 상원과 하원으로 분리하여 서로 견제하도록 해야 한다고 진언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왕은 정치적 역량이 전무했고 이 조언을 따를 능력이 없었습니다.

삼부회는 개회 시점부터 제 3신분의 대표들에게 최악의 인상만을 남겨주면서 시작했습니다. 루이 16세는 '사냥을 해야 하기 때문에' 파리가 아닌 베르사유에서 삼부회를 개최하기로 했는데, 베르사유는 당대 궁정 문화의 심장이자 사치가 이끄는 파멸의 종착역이었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화려한 궁전과 미술품, 환상적인 거울의 방과 금으로 치장한 8두 마차들을 보며, 이제 막 지방에서 올라왔을 뿐인 검은 옷의 제 3신분 대표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의 눈앞에는 구시대의 타락과 모순, 그리고 예정된 종말이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나타나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특권계급의 대표들을 왕이 집무실에서 정중히 배알한 한편, 제 3신분의 대표들은 침실에서 무더기로 허겁지겁 소개되었습니다. 거대한 출입문이 특권계급의 대표들을 위해 활짝 열려 있었던 반면, 제 3신분의 대표들은 작은 뒷문을 통해 회의장에 안내되었습니다. 5월 5일의 개회식에서 루이 16세는 개회연설을 통해 '개혁의 정신'이 갖는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대표들이 국가 재정을 채우는 데에만 집중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다음 연사로 나온 국새상서 바랑탱은 왕의 덕과 은총을 찬양하는, 초점 없고 잘 들리지도 않는 연설을 늘어놓았습니다. 회의 본론을 얘기하기 위해 나온 네케르는 세 시간 동안 오로지 재정상황에 대해서만 얘기했습니다. 그는 예산과 결산을 대조하고 적자 항목을 설명하며 세부적인 몇 가지 지출을 깎아내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듯 그 중요성을 최소화시키려 했습니다.

가장 나빴던 것은 이미 삼부회 개회 이전부터 논쟁의 핵심이 되고 있었던 것, 즉 신분별 투표냐 개인별 투표냐의 문제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만약 이것에 대해 대표들의 확실한 동의를 받으려는 의사가 개최측에 없다면, 제 3신분의 열망은 무시될 것이 뻔했습니다.

사치와 향락으로 가득한 배경에서, 궁정과 특권계급의 온갖 무례를 감수하고, 이젠 마치 주식회사 정례보고 같은 초점 없는 숫자 이야기만 잔뜩 들은, 가슴 속에 자유와 평등에 대한 신념을 품고 손에는 고향의 다양한 핍박받는 사람들이 맡긴 청원서 무더기를 쥔, 제 3신분의 대표들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5월 5일 저녁에 바로 행동을 개시한 제 3신분 대표단은 각 주별로 대표단 회합을 조직하여, 각 주 대표단의 결정을 모아 전체 대표단의 총의를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대표단의 결의는 하나였습니다.

"제 3신분─이들은 자신들을 하원(commune)이라고 지칭했습니다─은 다른 양대 신분에게 그들이 자신들의 회의에 합세하여,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개별 대표자의 위임장을 공동으로 심사하는 합동심사(verification de pouvoirs)를 진행해야 한다고 제의한다. 그리고 이것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하원은 별개의 회의장을 구성하기를 거부한다."

이로써 삼부회는 소집된 바로 그 날부터 제 3신분의 보이콧에 직면하게 됩니다.



─국민의회의 성립

제 3신분 대표단이 보이콧을 시작하고 나서, 한 달 동안 각 신분별 회의장 사이엔 성과없는 협상이 오갔습니다. 성직자 대표단은 평사제들의 압력으로 이미 신분별 위임장 심사를 중지했고, 중재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습니다. 왕은 국새상서로 하여금 직접 조정회의를 주재하도록 하였으나, 협상은 처음부터 타결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귀족 대표단은 결코 평민들의 무리 속에 1/n로 끼어들어갈 마음이 없었으며, 제 3신분 대표단 역시 정당성 확보를 위해 일시적으로 관망하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결국 제 3신분 대표단은 파행의 책임을 귀족 대표단에게 확실하게 전가했고, 자신들을 파견한 전국 각지에 귀족들의 타협 의지 없음을 알린 후 행동에 나섰습니다.

자신들에게 합세하라는 최후통첩을 양대 신분에 보낸 후 6월 12일, 하원은 출석이 요청된 모든 대표들에 대한 점호를 시작하여 독자적으로 위임장을 심사하는 데 착수합니다. 이는 17세기의 전통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새로운 대의체, 각 대표가 오직 개인으로서 평등하게 전체를 구성하는 회의를 독립적으로 만들겠다는 의지의 실행이었습니다. 또한 이는 무엇보다도 제 3신분이 다른 양대 신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 오직 자신들만으로 전체 국민을, 전체 프랑스를 대표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만천하에 선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점호를 통해 확정된 580명의 대의원은 490대 90으로 국민의회(Assemblee nationale)를 구성한다는 결의를 통과시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강제로 해산당하는 날에는 세금이 더 이상 징수되어선 안 된다고 결정했으며, 더욱 대담하게도 그들이 방금 통과시킨 결의와 장차 통과시킬 모든 결의에 대한 왕의 거부권을 전면 부인했습니다.

이 역사적이고 중대한 사건 앞에 루이 16세가 보인 반응은 정말이지 초라하다는 말조차 어울리지 않는, 무의미하고 시대착오적이며 졸렬한 행동에 불과했습니다. 특권계급은 왕에게 제 3신분의 대표단을 불경죄로 재판에 처하라고 주문했으나, 왕이 취한 행동은 19일 저녁의 어전회의에서 제 3신분의 모든 결의사항을 폐기한다고 '선언'하고, 이후 제 3신분 회의장을 폐쇄하도록 명령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신이 내려 주신 엄숙한 위광에 둘러싸인 자신의 선언에 모든 백성들이 벌벌 떨며, 폐쇄된 회의장의 문을 망연자실 바라보다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한 걸까요?

왕에게는 안타깝게도 그런 망상은 현실화되지 않았습니다. 20일 아침 회의장에 집결한 국민의회는 회의장 문이 닫히고 군인들이 둘러싸고 있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의원들은 다소 혼란스러워 했으나 사태는 빠르게 진정되었습니다. 이후 혁명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미라보의 지도 아래, 국민의회는 근처의 테니스 코트(사실 엄밀히 말해 테니스는 아니고, pomme라는 비슷한 경기. 실내에서 하는 것이 특징)로 자리를 옮겨 토의를 계속합니다. 그 자리에서 몇몇 의원들은 왕이 군대를 동원해 강제로 회의를 해산시킬 것을 우려하여 파리로 위치를 옮겨 안전하게 토의하자는 제안을 내놓습니다. 하지만 무니에가 열정적인 어조로 국민의 총의가 무력에 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따라 "헌법이 제정되어 확고한 기초 위에 세워질 때까지, 국민의회는 결코 분산되지 않고 상황이 요구하면 어디서든 모이겠다"는 선서에 대한 서명을 대의원 모두에게서 받아냅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테니스 코트의 선언'입니다.

궁정은 실책에 실책을 거듭합니다. 23일에 소집된 어전회의에서, 특권계급은 곧장 회의장에 입장했으나 제 3신분은 비를 맞으며 문 밖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회의장 주변에 배치된 군대는 의원들을 겁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격분하게 했습니다. 왕은 날카롭게 제 3신분의 불충을 질책하며, 그들이 빨리 과거의 삼부회 형식으로 돌아와 신분별 회의를 계속해야 한다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계속될 회의를 위한 회의장을 준비하도록 하고 의원들을 해산시킵니다. 그러나 국민의회의 의지와 자신감은 이미 확고했고, 국민의회 의원들은 어전회의 자리에 그대로 앉아 해산을 거부하고 회의를 계속했습니다. 국민의회는 왕이 폐기한다고 선언한 자체의 결의를 고수한다는 취지의 동의안을 통과시켰고, 국민의회 의원의 불가침성에 대한 결의 또한 통과시켰습니다. 이는 왕의 의사가 명확히 확인된 어전 바로 앞에서 이루어진 항명이라는 점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이러한 국민의회의 대담한 행보는 왕의 위신을 지속적으로 깎아먹었습니다. 가장 비천한 고지인(동네를 돌아다니며 명령을 전하는 사람)조차 거리에서 왕명을 알리기를 거부했고, 자기 지역 대의원의 편지를 받은 지방들은 크게 동요했습니다. 6월 24일엔 평사제로 이루어진 성직자 다수파가 국민의회에 합류했으며, 그 이튿날엔 오를레앙 공작(*)이 이끄는 47명의 귀족대표가 합류했습니다. 명백한 패배 앞에 루이 16세는 모욕을 쓰게 삼켰습니다. 이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군대의 무력밖에 없어 보였습니다.

* 왕의 사촌으로 당대의 대표적인 자유주의적 대귀족. 자유주의적 대귀족의 멘탈리티에 대해선 1편 참조



─반혁명 음모와 파리 봉기

6월 26일에 루이 16세는 보다 믿을만 하다고 판단되는 국경지역의 외인부대에 대한 소집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는 애국파가 이미 정규군 내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오직 귀족들만 장교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엄격한 훈련을 강요하는 장교에 대한 병사들에 대한 불만과 승진이 막힌 하사관들의 불만은 군대 내에 이미 만연해 있었습니다. 만약 루이 16세가 말 위에 올라 늠름하게 자신의 부대를 지휘했다면 이러한 불충을 억누를 수도 있었겠지만, 이 뚱뚱하고 게으른 사내에게 그럴 용력이 있을 리는 없었죠.

왕이 무력으로 반역을 찍어 누르려 계획하는 와중, 애국파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개혁에 대한 왕의 적대성이 명확한 형태로 드러난 어전회의 이후 애국파는 경계태세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파리의 선거인단은 자발적으로 파리 시청에 모여 국민의회와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고 귀족정치가들의 행동을 감시하는 일을 시작했으며, 6월 29일엔 자체적인 무장 계획을 작성했습니다. 오를레앙 공작의 소유였던 팔레 루아얄(Palais Royale)은 시민들에게 공개되어 노천 회의장이 되었고, 각종 계획이 작성되고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이윽고 7월이 되자 왕이 소집한 외국인 연대들이 파리 근교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이 파리 근교 및 시내에 주둔하자 시민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새로 도착한 이 입들을 먹여 살리려면 기근이 더 심각해질 것이 불 보듯 뻔한 데다가, 이 병력들의 용도가 국민의회를 해산시키고 파리의 반발을 억누르려는 데 있음 역시 명백했기 때문입니다. 파리 선거인단은 국민의회에 사람을 보내 군대를 철수시키도록 요구했고, 7월 8일 국민의회는 철수명령을 가결시킵니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당연하게도 이 요구를 거절합니다.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7월 11일 왕은 네케르를 해임하고 극렬한 반혁명분자였던 브르퇴이유를 통해 내각을 개편합니다. 12일엔 국가 파산이 선언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주식거래인들은 네케르 해임에 대한 항의로 거래소를 폐쇄합니다. 부르주아들은 병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돈을 뿌리고, 자기 하인들과 직원들을 무장시킵니다. 이후 혁명적 언론인으로 이름을 날리게 될 카미유 데물랭은 애국파에 대한 학살이 임박했다고 팔레 루아얄에서 발표했고, 극장은 폐쇄되었습니다.

마침내 7월 12일의 어느 시점, 독일인 근위연대가 튈르리 왕궁에서 군중을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 날 이후 약 100년 동안 혁명의 상징이 될, 파리 시청의 경종이 날카롭게 울려 퍼집니다. "국민은 공격받고 있다!!" 파리 인민은 교회에 모여 군 조직에 등록한 후 무기상들에서 탈취한 무기로 무장했습니다. 상이군인회관에서 탈취한 2만 4천 정의 총과 여러 문의 대포 역시 배치되었습니다.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평판 나쁜 인물들은 신중히 배제되었습니다. 파리의 선거인단은 예전의 시의원들과 함께 파리 시청에서 상임위원회(Comite permanent: 부르주아 중심의 자치기구로, 나중엔 코뮌과 대립하며 반동화됨)를 구성하여 봉기를 지도하게 됩니다. 국민의회 측은 사태의 책임이 신임 대신들에게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운명의 7월 14일, 상임위원회는 파리 시내의 바스티유 성의 사령관에게 무기를 양도하고 요새의 탑으로부터 대포를 제거하라는 등의 몇 가지 요구사항을 전달합니다. 그러나 사령관이었던 드 로네 후작은 이를 거부했고, 시민군에 의한 포위가 개시됩니다. 생탕투아느 구에서 온 장인들은 시민군에 합류한 위병대의 도움을 받아 즉석에서 공성 훈련을 받고 대포로 성을 공략합니다. 매캐한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 속에 전투는 1백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결국 시민군은 승리합니다. 승리한 시민군들은 보복 행위에 몰두하는데, 바스티유 수비대뿐 아니라 무기고의 위치를 거짓으로 알려주려던 파리 시장 플레셀, 파리 근교에 주둔한 군대에 식량을 공급하는 일을 했던 초밀원 고문관 풀롱과 베르티에 등이 잔혹하게 처형당했습니다.

루이 16세는 이 경천동지할 봉기 결과에 짓눌려 결국 7월 15일 의회에 출석하여 군대를 철수시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국민의회의 대표단이 파리를 방문했고, 파리 시민들은 테니스 구장의 선언을 기초한 바이이를 신임 파리 시장에, 워싱턴의 친구이자 자유주의 귀족인 라파예트를 국민군(la guard nationale) 사령관에 임명했습니다. 귀족정치가들은 왕에게 독일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메츠로 달아나, 충성스러운 군대를 모아 파리로 돌아와서 반역자들을 진압해야 한다고 진언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떠난 사이 오를레앙 공작이 왕에 즉위할 것을 불안해 했는지 루이 16세는 그대로 남았고, 결국 그는 예전 내각을 복귀시키고 국민의회를 승인하며 파리에서 삼색휘장(현 프랑스 국기)을 받는 굴욕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비겁함에 실망한 몇몇 귀족정치가들은 외국으로 달아나, 이후 혁명기 내내 망명귀족들의 반혁명 운동을 주도하게 됩니다.

주불 영국대사 도셋 공작은 본국 정부에 이 사건을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이 순간부터 우리는 프랑스를 자유국가로, 왕을 권력이 제한된 군주로, 귀족을 국민의 수준으로 떨어진 사람들이라 간주할 수 있다." 이제 프랑스의 최고 권력은 왕이 아니라, 의회를 그 기관으로 삼은 프랑스 인민이 되었습니다. 전 유럽의 부르주아는 분명 이제 자신들의 때가 왔음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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