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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노 친구와의 오랜 관계를 끊었습니다. 사이다가 아닐수도.
게시물ID : soda_644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겨우햇병아리
추천 : 29
조회수 : 4637회
댓글수 : 53개
등록시간 : 2017/11/28 17:31:06
사이다보단 반대로 고구마를 먹은 듯한 느낌을 느낄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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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친구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 오리엔테이션때였다. 재수하고 입학한 탓에 위축되있던 나에게 말끔하면서도 프랑스 세느강에서 볼법한 패셔너블한 인상착의에 선한 인상으로 먼저 다가가와줬던게 매우 고마웠다.(이 친구는 패션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고 나중에 알았지만 패션과 관련되서는 돈쓰는 것을 아끼지 않는 녀석이었다.)
 
사실 친구라지만 나이는 한살 어리고 형-동생의 관계보다는 친구관계로 지냈기 때문에 친구라고 보는게 옳다.
 
나도 재수까지 했지만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고 이 친구는 재수는 안했지만 그래도 자기 딴에는 아쉬운 성적으로(객관적으로 다른 합격한 애들 및 내 성적과 비교해볼때 이 친구는 이 학교라도 붙은게 기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입학한 터라 공감대가 같았다. 심지어 둘다 애초에 열망했던 학교가 똑같았기에 더욱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친구는 출퇴근이 50분씩 걸리긴했지만 강남에 좀 사는 집 자식이었고 나는 가난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부자도 아닌 지방에서 올라와서 겨우겨우 자취방을 마련한 서울생활을 이제 막 시작한 그저그런 촌놈이었다.
 
나는 최초합격으로 학교를 붙어놓고도 만족하지 못했던 탓에 세상 고뇌를 다 짊어진양 부모님께 일언반구도 없이 게임과 영화만 줄창보며 자취방을 구할 생각조차 안했다.
 
오죽하면 개강이 코앞이 2월 말이 되도록 자취방을 구하지 않았었다.
 
이게 내 병신짓의 스타트였다.
 
내 욕심이 어느정도였는지 알고 아들놈이 애초에 공부를 좀 잘했던 탓에 부모님은 수능이 끝나고도 원서접수철이 되어도 나에게 학교와 관련되서는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줄창 게임만 해대는 아들모습에 괜한 말로 상처줄까 말을 안꺼낸게 2월 중순까지 이어졌다. 그때까지 내가 재수에서도 대학교에 못 붙은줄 알았었다고 하셨다. 2월중순이 되서야 조심스레 꺼낸 어머니의 말씀 "아들 시험 한번 더 봐야하니?"
 
삼수에 대한 생각은 굴뚝같았지만 삼수까지 하게되면 부모님 뵐 면목이 없을것만 같았다.
 
어머니의 물음에 물끄러미 합격증을 들이민 순간 나는 등짝 스매싱을 맞았고 그제서야 부모님과 부랴부랴 자취방을 구하러 갔다.
 
그 덕에 나는 2차 추가합격자들보다도 방을 늦게 구하는 머저리가 되었고 부동산중개업자들에게는 최고의 호구가 되었다.
 
2월말 대학가 인근에 남은 방이라고는 드럽게 비싸거나 가성비가 최악인 방밖에 없었다.
 
가성비가 최악인 방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웠다. 그래서 내린 결론. '이래내나 저래내나 돈 많이 낼꺼면 무조건 좋은 방에서 살아라'라는 아버지의 말씀.
 
결국 그럭저럭 사는 집임에도 나는 나름 과동기 사이에서는 가장 좋은 궁궐수준의 자취방을 소유하게 되었다.
 
나의 자취방은 1학년 1학기 내내 많은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과 동시에 아지트가 되어갔다.
 
문제는 이놈의 친구다.
 
이 놈이 처음에 나에게 다가온 것은 그러한 목적으로 온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가 통학하는데 50분이나 걸리다보니 지쳤었나보다. 서울 강남 인근에서 초중고를 나온 녀석이 갑자기 한강을 건너 강북에 있는 대학교에 나갈려고 하니 지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런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더욱 친한척 하며 우리집에서 자고가는 날이 점차 늘렸다.
 
더불어 자취방 냉장고를 박살내는 날도 늘어갔다. 어머니가 보내주는 족족 음식을 거덜내고 자기는 밖에서 음식한번 사온적이 없었다.
 
본인이 치맥이라도 하자고 얘기를 꺼내면서 자기는 저렴한 카스나 하이트 맥주 피쳐 한통을 사오고 치킨은 내가 사길 기다리는 형국..
 
다만 이놈은 변죽이 좋았다. 형 어머니의 음식솜씨가 너무 뛰어나다면 먹는 족족 엄지를 세워가며 내가 먹을 식량을 거덜내고 자기는 점심값을 아끼고 아침밥을 챙겨먹었다.
 
비록 남에게 돈쓸때는 세계에서 세 손가락안에 들 정도로 짜디짠 놈이지만 성격이 부드럽고 어지간한 일에 화를 내지 않는 성격 탓에 나도 뭐라고 하긴 어려웠다. 립서비스와 변죽 하나만큼은 최고였다.
 
 
#.2
 
나는 삼수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뭐가 그렇게 아둥바둥했는지 알수 없지만 그때는 열등감만이 내 안을 가득 채운 유일한 감정이었다. 
 
원하지 않던 네임밸류의 학교 생활을 3개월하면서 느낀 점은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고 이 전공을 살려서 평생 밥벌이하는 것은 어렸던 그 당시 나에게 지옥에 떨어지는 형벌보다도 무서운 형벌처럼 느껴졌다. 
 
나는 삼수를 결심했다. 부모님에겐 말하지 않았다. 그 친구(이하 수전노)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혼자 결심하고 혼자 실행에 옮겼다. 1학기가 종강하자마자 수능문제집을 잔뜩 사제끼고 두문불출한 채 공부를 시작했다. 
 
학기중엔 그렇게 자주 연락하던 수전노는 방학 동안에는 귀신같이 연락을 안했다. 수강신청 시즌이 되서야 연락이 오는 수전노. 나는 1학기때의 일도 있고 각자 짜자고 얘기했지만 내가 보통 호구가 아니었던 탓인건지 수전노는 나에게 시간표를 같이 짜자고 줄기차게 요구했다. 결국 수전노에게 나는 나의 상황을 얘기하였다.
 
뭔가 뒤통수를 맞았다는 듯한 멍한 표정. 먼저 구태여 얘기할 생각이 없었을뿐 반수 사실을 아주 꽁꽁 숨길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수전노 본인이 1학기때는 반쯤 살다시피했던 나의 자취방을 방학때는 해외여행 다닌다고 싸돌아 댕기면서 수강신청 전까지는 거의 연락조차 안했으니 모르는게 당연했을뿐.
 
수전노의 경우 거의 몇 안되는 장점중 하나는 거의 화를 내지 않는 부드러운 성격이었다. 그런 성격탓에 그냥 '형 잘해봐'라는 무미건조한 조언 한마디와 함께 응원아닌 응원을 해주었고 나는 2학기 내내 아웃사이더의 길을 자처하며 수능공부에 매진했다.
 
다만 수능공부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렇게 열심히 하리란 생각은 안했던건지 틈나는 대로 방에 찾아올려는 못된 습관은 여전했다.
 
방에 찾아올려는 수전노에게 나는 처음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또 하나의 문제는 연애상담을 나에게 할려고 시도했다는 점이다. 다만 나 또한 그 당시에는 모쏠이었는데 뭘 알았겠는가? 도통 나에게 연애 상담을 할려는 수전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워낙 간곡하게 혹은 눈물까지 흘려가며 자신의 사랑의 힘든점을 구구절절 얘기하며 누군가에게 상담받고 싶어하는 모습에 나는 등신같이 마음이 약해져 그 바쁜 시간을 쪼개가면서 이 녀석과 놀아줬다.
 
하지만 그런 훼방에도 불구하고 정말 운 좋게도 나는 삼수에서 성공했다.
 
사실 성공한 수준이 아니라 매우 매우 잘봤다. 그냥 쌩삼수를 했다면 이만큼 잘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랑글은 아니다. 10년도 더된 일이니까.
 
그래서 차마 나로썬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학과들을 생각하게 되었고 나는 전적대와는 비교할수도 없는 성적의 학과에 진학했다.
 
그 사이 학교에선 내 소문이 파다했다. 1학기 성적을 워낙 망쳐서 군대갈려고 잠적했다는 소문부터 이성관계에서 실패해 폐인처럼 게임만하며 두문불출하는 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얘기까지 파다했다. 소문의 무서움을 그 어린 시절 처음으로 경험했다.
 
얼마나 터무니 없고 얼마나 의미없는게 소문인지 깨달았다. 다만 수전노의 두번째 장점은 자기 지갑에서 돈 안쓰는 것만큼 입에서 나오는 말도 매우 신중한 점이었다. 내가 비밀을 꼭 지켜달라고 부탁한적은 없었는데도 말이다.
 
삼수 결과가 발표난 이후, 내가 완전히 다른 전공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학과로 진학한 사실을 수전노에게 알렸을때 수전노는 두 눈을 떨면서 축하아닌 축하의 말을 건넸다. 내가 성공할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학교 동기들과 페어웰을 하고 나는 또 다른 학교로 이사를 갔다.
 
나는 지방으로 갔고 수전노는 서울에 있는 탓에 방학을 제외하고 서로 별로 만날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한학기 동안 보여준 호구잡힘이 인상적이었는지 아니면 이유는 알수없지만 나를 좋게 평가했는지 줄기차게 연락이 왔다. 나는 원래 집도 지방이었고 다시 간 학교도 학과가 굉장했지 위치한 곳은 지방인지라 서울 갈일이 없음에도 수전노의 연락을 받고 줄곧 서울에 갔다.
 
대략 중간쯤에서 보면 좋으련만 '형 지방에는 놀게 없어'라는 말과 함께 간곡하듯 서울에 오라는 수전노. 남자둘이서 만나봤자 뭐 얼마나 재밌게 놀까? 지방에서 만나든 서울에서 만나든 깡촌에서 만날 것도 아니고 얼추 비슷했음에도 꼭 서울을 고집했고 부드러운 말씨와 대화로 나를 설득했다. 그 말인즉슨 그냥 자기가 지방 내려가게 되면 추가적인 차비가 들기에 꺼려진다는 동어반복임을 알면서도 등신같이 서울에 매번 올라간 나도 등신이었다.
 
여튼 나의 원치않는 서울행으로 우리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물론 내가 차비 들여 서울까지 갔음에도 밥값이나 피씨방, 플스방비를 내는 것은 항상 내가 더 많았다. 자기 옷 구매에만 한달 100만원씩 용돈받아 쓰면서 돈없다고 같은 옷 서너개로 돌려막으며 지내는 나에게 하소연하는 꼴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등신처럼 형이랍시고 돈을 많이 냈다.
 
 
#.3
 
세월이 지났다.
 
나는 학교를 다니고 수전노는 취직을 했다.
 
내가 간 학과가 다 학과에 비해서 공부기간이 길기도 했고 수전노는 군대를 갈 필요없는 신의 아들이었던 탓에 모든 사회생활이 빨랐다.
 
나중에 들어보니 내가 삼수성공하고 나서 본인도 2학년때 재수(나이로는 삼수)를 생각하고 준비했다는데 성적이 너무 형편없어 아무에게도 안알리고 그냥 취직준비에 힘을 다했다고 했다. 대학원을 생각도 했지만 나보다도 학과전공을 더 싫어했기에 실패했다. 다만 공대가 깡패였는지 대기업에 쉽게 취직했다.
 
원래도 집이 잘살아 해외여행을 잘 다니는 녀석이었는데 대기업 입사 이후엔 휴가는 무조건 해외여행으로 갔다. 게기에다가 해외여행에는 돈을 팍팍 쓰면서 다른 곳에는 돈을 아끼니 꽤나 돈을 모았다. 몇천을 모았네하는 식의 자랑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돈낼때만 되면 내가 돈내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런 와중에도 틈나는대로 연락오면 만나자는 녀석.
 
지쳤다. 지방에서 볼꺼면 말고 아니면 힘들어서 못간다고 최초로 말 했더니 무슨 생각이 든건지 지방까지 왔다. 나의 본가. 나의 근거지로...
 
뭔가 이제는 돈도 넉넉하고 정신좀 차렸겠지라는 생각으로 녀석을 만났다.
 
나만의 착각이 그렇게 심각했다는 것을 녀석을 만나고 깨달았다.
 
오히려 대기업에서 월급을 따박따박 타먹는 이 녀석은 더 뻔뻔해지고 더 노골적이 되어갔다. 있는놈이 더하다는 옛말은 틀린게 하나 없었다.
 
이래저래 여러가지 얘기를 나누며 회포를 풀다가 막상 계산할때가 되었다. 2차나 커피정도는 내가 살 생각이었지만 1차는 은근히 그 녀석이 계산하길 바랬다. 같은 학생일때는 형이라는 이유로 내가 더 많이 낸적이 많았고 심지어 자기가 간곡히 오라고 해서 서울에서 만났음에도 내가 돈을 냈으니 이번 한번만큼은 그 녀석이 사길 바랬다.
 
물론 내가 학생이고 그 녀석이 직장인이라 월급받는다고 꼭 내야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항상 서울가도 사준적이 더 많았으니 당연히 이 녀석이 밥을 사줄줄 알았다. 더군다나 메뉴를 정한 것도 이 수전노녀석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상상을 넘어선다. 아주 뻔뻔하게도 '형 고향에와서 내가 형한테 한번 밥 얻어먹어야 우리사이가 더 돈독해지지는 않을까'라는 말과 함께 다시 시작된 돈없다는 하소연.
 
이 녀석을 지방으로 오라고 한 내 자신이 짜증났다. 식당에서 뭐라도 한마디 할까 고민도 했지만 왠지 그러기엔 내가 너무 쪼잔해보였다. 실제 쪼잔한건 그 수전노 녀석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결국 그냥 계산했다. 그리고 집에서 급하게 연락온척 하고 2차는 취소하고 집으로 갔다. 2차는 얻어먹어야 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쉬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수지 맞은 듯한 표정으로 집안일 잘 처리하려면서 그 녀석은 나를 배웅했고 그 녀석도 서울로 돌아갔다.
 
더 이상 알고지낼만한 관계는 아니라는 판단에 이후에 온 모든 연락에 적당히 답장하거나 혹은 연락하지 않으며 관계를 서서히 지워갔다.
 
 
#.4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아내나 나나 고향이 서울이 아니었지만 결혼식을 처갓집 사정상 서울에서 하게되었다. 그것도 아주 유명한 호텔. 많은 친구들을 불렀다. 대학시절 인연들이 많이 올수밖에 없었는데 새로운 학교에서 사귄 친구들이 대다수였고 전적대에서 인연을 이어갔던 친구 소수에게도 연락했다.
 
하지만 그 수전노에게는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오랫동안 연락을 안하기도 했고 그동안 당했던 일이 많아서 연락하고 싶은 맘이 없었다.
 
결혼식 전날. 혹시나 먼저 찾아오겠다고 하는건 아닐까라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한 예상은 적중했다. 아니나 다를까 결혼식 당일날의 바쁜 일정 탓에 하루 일찍 올라와 결혼식이 치러지는 호텔에서 방을 구해 잠을 청하려던 찰나 수전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안받았다.
 
부재중 전화가 5통이 되고서야 받았다. '형이 결혼식 앞두고 자기에게 연락 안해서 서운하다는 내용' '내일 약속이 있는데 형 결혼식은 무조건 가겠다는 내용' 대체 얘가 나한테 왜 이러는걸까라는 생각과 얼마나 내가 호구를 잡힌건가라는 생각과 함께 별수없이 결혼식 위치와 시간을 알려주고 오라고했다.
 
상상도 못한 축의금액수를 받았다.
 
0원.
 
인당 10만원에 육박하는 식사비용을 지불하는 결혼식에서 나는 축의금은 0원을 받았다. 숱한 결혼식을 다녔지만 그렇다고 결혼식이 뿌린 돈 거둔 잔치라는 생각으로 살지는 않았다. 다만 축의금을 0원은 상상조차 못했다. 그것도 내가 직접 초대도 안하고 지가 직접 서운하다면서 무조건 참석하겠다는 녀석이...
 
3만원이나 5만원은 낼줄알았다.
 
생각조차 못한 통수에 당황한 사이. 카톡이 왔다.
 
내가 초대도 안한 결혼식을 굳이 오겠다면서 나랑은 안면이 있긴하지만 친하지 않은 전적대 동기 한명을 데리고 왔는데 이 동기랑 같이 돈을 모아서 거액의(?) 축의금을 내려고했는데 얘가 먼저 축의금을 내버리는 바람에 자기는 낼 축의금내기가 애매했다는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개소리.
 
나중에 부모님 수중에 안들어가게 따로 돈을 챙겨준다는 녀석. 믿지도 않았고 진짜 관계를 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뜩 생각난 빅픽쳐.
 
이후에 일부러 관계를 유지했다. 물론 이 녀석을 따로 네 다섯번 만났지만 축의금을 챙겨준다는 이 녀석에게 돈을 받아본적이 없었고 축의금의 ㅊ도 꺼내지 않았다.
 
음식점가면 누가 돈을 냈는지 안냈는지부터 더치페이 횟수, 자기가 음식을 산 횟수를 모두 기억하고 얘기하는 녀석이 이런 것을 까먹었을리는 없었다.
 
단지 내가 까먹었기를 바라면서 내가 말할때까지 기다릴뿐이다. 말하면 주고 말안하면 안주고 이 녀석의 셈법은 항상 그래왔다.
 
하지만 나는 빅픽쳐를 그리고 있었고 조용히 내가 그리고 바라던 그때까진 아무말없이 잘 지냈다.
 
 
 
#.5
 
수전노의 결혼식 날. 대망의 날이 밝았다.
 
당연하게도 이 녀석은 축의금조차 안낸 주제에 나에게 연락을 했고 형이 꼭 와줬으면 좋겠다는 신신당부와 함께 결혼하느라 사정이 어렵다는 얘기를 늘어놓으며 자기 혼자만 베스트 프렌드라고 생각하는 내가 엄청난 축의금을 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결혼식에 갔다. 다행스럽게도 식권 배부를 담당하는 친구가 내가 아는 녀석이었다. 때문에 나는 축의금을 내지 않고도 식권을 받을 수 있었다.
 
한 장이 아니라 10장. 
 
전적대학교의 동기들이랑 같이왔는데 내가 줄려고 10장받아간다는 얘기와 함께.
 
안면이 있는 사이였기에 아주 쉽게 나는 열장을 챙겼다. 
 
원래 집이 좀 잘 사는 녀석이라 이 녀석도 호텔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혹시나 코스요리를 하면 어떡해하지라는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 인당 십만원이 넘어가는 뷔페에서 피로연을 열었다.
 
나는 친한 친구 9명을 불렀다. 당연히 그들은 수전노와 일면식도 없었다. 남의 결혼식을 자기들이 왜가냐는 친구들에게 내가 수전노와 워낙 친분이 깊고 축의금을 정말 많이 냈는데 와이프도 못가니까 너네들이라도 데려가서 먹일려는 얘기와 함께 이 기회에 우리끼리 회포나 풀자는 나의 제안에 그들은 동행했고 나의 빅픽쳐를 완성시켜주었다. 호텔 뷔페 식당이 피로연장이었기 때문에 일반 손님들도 있어 친구들의 내 제안에 쉽게 동의했다.
 
친한 친구들과 최고급 뷔페를 즐기며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몇 주뒤에 신혼여행을 다녀온 그 녀석에게 전화가 왔다.
 
자기가 축의금을 안낼때는 카톡을 보내 변명했던 녀석이 자기가 못받으니 전화하는 꼴이란.. 역시 수전노 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애초에 성격이 부드러운 녀석이라 다짜고짜 화를 내지는 않았다. '형 축의금 낸거 누락 된것 같다'는 녀석의 말.
 
그래서 사실 축의금 안냈다고 얘기했다. 너도 안냈으니 그냥 나도 안냈다고 했다.
 
그 얘기에 수전노는 '우리 사이가 돈으로 재단할수 있는 사이냐'며 서운하다고 말했다. 
 
"돈으로 재단할수 없는 사이인데 왜 자꾸 너는 우리사이를 돈으로 재단하냐"는 나의 일침에 그는 꿀먹은 벙어리.
 
그래도 식권 10장은 좀 심한게 아니냐는 그 녀석의 말.
 
사실 결혼식이 꽤나 크게 열렸고 하객이 많은터라 10장이나 가져간 것을 모를줄 알았는데 그 모든 축의금과 식대를 계산해서 내가 10장을 가져간 사실을 알아낸 녀석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까지 철두철미한 녀석이 실수로 내 축의금을 안냈을리가 없었다. 완벽하게 내 의심에 쐐기를 박아줬다.
 
식권 10장은 내가 가져간게 아니라고 발뺌했다. 나는 동기들 나눠줬는데 다른 애들이 돈안내고 먹은 것 같다는 나의 말도 안되는 변명에 그 녀석은 난생 처음 화를 내려고 했다.
 
"너가 OO이랑 축의금 같이 내서 거액 만들어줄려고 했는데 실패해서 축의금 아예 안냈다는 얘기보다는 내 얘기가 더 신빙성있지 않냐"는 일침에 이 녀석은 다시금 꿀먹은 벙어리.
 
성품 자체가 악다구니를 쓰는 녀석은 아니었다. 말없이 조용히 있다고 '형이 많이 서운했었구나'라는 말과 함께 끊은 통화.
 
이걸로 10년지기 우리 사이는 끝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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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념 좀 해봤습니다. 당하고 당했지만 10년을 이어왔던 인연이라 끝내고도 뭔가 서글프네요. 사이다인지 고구마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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