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절대적 도덕을 논하는 윤리의 프레임에서 말하는 "인간"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무분별하다. 즉, 국적도, 성별도, 직업도, 나이도, 이해관계도 가지지 않는 원시적 현실, 혹은 전-현실 (pre-reality)의 인간을 가정한다는 것이다. 이 전-현실 인간 (pre-real human being)이라는 개념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은 물론 그 정의로부터 자명하다. 따라서 도덕철학에서 말하는 "도덕적 인간"은 그 정의에서부터 현실 바깥 (초현실) 혹은 현실 이전 (전-현실)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에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비현실성으로 대표되는 도덕적 보편주의에 대한 환상적 이상이 선험적 이성에 대한 낙관에 뿌리를 둔 합리주의와 결합할 때, 도덕적 문제는 칸트가 구획해 둔 이법적 세계 저편으로 넘어가 버린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보편주의와 합리주의의 결합, 즉 보편주의적/선험주의적 합리주의를 요청하는 것은 "정의"라는 개념에 대한 자연적 논변이다. 정의라는 개념을 그 의의, 즉 내용에 있어 지탱해주는 것이 목적론이라면, 정의의 개념을 그 구조, 즉 형식에 있어 지탱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평등"의 개념이며, 이 평등의 개념은 다시 "동일성"의 개념으로 소급된다.
따라서, "그 어떠한 조건도 초월하여 궁극적으로 완전한 하나의 동일성으로 회귀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정의의 개념에 대한 자연적 논변을 구성하며, 여기서 내용은 초월적 목적론이며, 형식은 초월적 동일성이 된다. 이 논변을 합리적으로 분석하여 도출해낼 수 있는 궁극적 지점은 정언명령 뿐이라는 것이 칸트의 선험철학을 통해 증명된 결론이다. 그러나 이 정언명령이라는 것은 재귀적 어법에 갇혀있는 것으로, 실은 그 자체로는 태생적으로 도저히 공허함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 결론을 구속하고 있는 공허함은 위에서 밝힌 인간론의 비현실성과 정확히 동치이다.
언뜻 보기에 이는 도덕철학의 허구성-비현실성을 짚어내어 그 무용성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이는 도덕철학이 허구성-비현실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추상적 지평에 귀속되는 동시에, 그 귀속성이 철저히 현실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자연적 논변에 비롯된다는 것을 예증하는 것이다. 도덕의 개념으로부터 현실성과 비현실성의 이러한 모순적 괴리가 출현하는 것은 따라서 필연적이다. 도덕 개념의 이러한 필연적 모순은 현실과 관념 사이의 필연적 모순과 정확히 동치이다. 이 모순이 필연적이라는 점은 현실과 관념 사이의 관계를 단순히 이상-현실 혹은 이론-실천의 관계가 아닌 각각을 서로 독립적인 주체이자 서로의 대상물인 관계, 다시 말해 즉자대자적인 관계로 새롭게 정립시킨다.
따라서, 도덕 이론에 현실이 귀속되어 현실이라는 것이 단지 도덕적 이상의 모방으로써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도덕이 현실적 실용주의의 도구나 합리화의 전략으로 전락해 존재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도덕도 현실도 고정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개념적 운동 속에 있는 것임이 드러남에 따라, 도덕철학은 현실을 부정하는 동시에 현실을 비추는 것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도덕의 존재는 곧 현실의 자기부정, 자기지양의 변증적 운동 속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칸트가 물자체라는 이름으로 구획한 현실과 관념 사이의 까마득한 공허의 경계가 하나의 실재가 되는 것이며, 이 변증적 실재에서 "인간"의 개념은 "도덕"의 개념을 넘어서 그 현실성과 비현실성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서 드러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