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과학적 사실과 과학의 응용
과학은 엄연히 사실을 탐구하며 지향하는 학문입니다. 이는 과학의 이념과도 같은 것으로 만물의 과학적 원리가 실제로 어떠한가를 탐구하여 밝혀내는 것, 다시 말해 이 세계의 과학적 사실을 알고자 하는 것이 과학의 목적의식입니다. 즉 과학적 사실은 엄연히 사실판단입니다. 사회정치적 혹은 윤리적 맥락에서 과학과 가치가 연루되는 것은 오로지 과학적 사실의 응용이라는 차원에서 입니다.
예를 들어
1) A와 B를 결합하면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다.
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고 합시다.
이 때 1)은 의심의 여지 없이 사실판단입니다. 그 폭발현상을 광산 개발에 이용할 것인지 혹은 대량살상무기를 만들 것인지는 그 사실의 응용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가치판단을 내리든 - 광산 개발이 환경을 파괴하므로 옳지 않다던지,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이 비인도적이라든지 - 간에, 1)은 여전히 사실입니다. 이렇게 과학적 사실과 이러한 맥락의 가치의 문제가 분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뒤에 긴 글이 남아있지만 일단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하고 넘어가자면, 과학 스스로는 분명히 몰가치성/가치중립성을 지향하고 표방하고 있으며 이는 막스 베버가 간단하게 정리한 바 있습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87783&cid=282&categoryId=282). 따라서 과학의 응용이라는 측면에서 가치론적 비판을 가하는 것은 엄연히 과학적 사실 자체의 가치중립성에 대한 비판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과학의 응용에서의 가치론 논의는 별다른 이견이 있을 것도 없으니 굳이 길게 가져갈 필요도 없을 듯 하니 여기서는 과학적 사실 자체의 가치중립성에 대해 먼저 논하겠습니다. 이는 다분히 인식론/과학철학/메타과학적 논의입니다. 반면 과학적 탐구 과정의 사회정치적 맥락 - 자본이 과학 연구에 개입하는 것이 과학 탐구를 어떻게 왜곡시키는가 - 하는 문제는 사회철학/정치철학적 논의일 것입니다. 이 맥락은 지금의 맥락과 구별되어야 하는만큼 다른 글에서 따로 논하겠습니다만, 지금 이 글에서의 메타과학적 논의와도 분명히 연관이 되어있으며 그 단초는 이 글 후반부에서 비로소 드러날 것입니다.
1. 사실판단과 가치판단
위에서 나타났듯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구분은 (적어도 이러한 단계에서는) 명확합니다. 핵심적인 구분은 사실판단은 대상이 되는 개념들 자체에 대해서 주관을 배제하고 판단하는 것이라면, 가치판단은 대상과 그 대상을 인식하는 주관과의 관계를 판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87362&cid=282&categoryId=282).
"사과가 지구를 향해 등가속도운동을 한다"는 것은 인식하는 주관과는 무관하게 그 대상이 되는 사과, 지구, 운동, 질량 등등 간의 사실적 관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통상적으로 사실판단은 객관성을 함축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는 주관을 떠나서 성립하는 판단이기 때문이죠. 또한 객관성은 보편성 역시 함축하게 되는데, 이는 그 어떤 주관으로 판단하더라도 보편적으로 동일한 판단을 내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 가치판단은 그 대상에 대한 주관의 인식에 의존적입니다. "사과는 맛있다"와 같은 판단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주관이 대상과 맺는 관계를 특징짓는 판단으로, 철수가 "사과는 맛있다"는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철수라는 한 인간의 주관이 사과라는 대상에 대해 갖는 경험과 인식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치판단은 객관성이 아닌 주관성에 종속되며, 이에 따라 사실판단과는 달리 보편성을 함축하지 않습니다.
2. 칸트의 문제제기
여기까지는 상당히 안정적이고 상식적인 구도이지만,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구별이라는 문제는 칸트에 이르러서 두 가지 측면에서 재조명됩니다. 첫번째는 사실판단이 더 이상 대상 그 자체에 대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점이고, 두번째는 가치판단에도 보편성을 결부시켜야만 하는 필요성 때문입니다. 첫번째는 인식론적 문제이고 두번째는 윤리학적 문제로 서로 구별되는 것 같지만 그 중심에 있는 개념은 역시나 주관으로서 두 논의가 연결될 수 있습니다.
먼저 사실판단이 대상 그 자체에 대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은 흔히 잘 알려진 칸트의 물자체 개념을 말하는 것으로, 물론 굉장히 어려운 개념입니다만 최대한 단순하게 말해보자면 우리가 대상을 논하는 순간 그 대상은 다만 "우리에게 인식된 대로의 대상" 혹은 "우리에게 나타난 대로의 대상"일 수 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대상이 우리에게 그러하게 나타남, 을 가리켜 바로 "현상" 혹은 "표상"이라고 부르며 우리는 오직 현상에 대해서만 논할 수 있을 뿐, 대상 그 자체는 우리에게 알 수 없는 것일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칸트는 말한 것이죠. 이는 결국 우리가 사실판단에 아까 부여했던 객관성을 포기할 수 밖에 만듭니다. 애초에 인식이라는 것이 주관성을 내재하고 있으므로 "객관적 인식"이라는 것 자체가 형용모순이 되어버리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객관적 인식을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임이 밝혀진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사실 칸트의 성과라기보다도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흄의 성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흄은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의 구분을 통해 우리가 어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참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분석판단 뿐이며 종합판단에 있어서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참이 말해질 수 없다고 논증했습니다. 말이 어렵게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 논지는 매우 간단합니다. 분석판단이란 "총각은 미혼 남성이다"와 같이, 개념의 포함관계만으로 참값이 결정되는 판단을 말합니다. 우리는 저 판단의 진위를 위해 일일히 총각들과 남성들을 조사해보지 않아도 됩니다. 애초에 총각이라는 개념의 뜻이 미혼 남성이기 때문이죠. 반면 "사과가 지구를 향해 등가속도운동을 한다"는 판단은 어떻습니까? "지구를 향해 등가속도운동을 한다"는 것이 사과의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는 사과의 운동을 실제로 경험을 통해 관찰하는데서 실증되는 판단입니다. 그러나 흄의 논지는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과의 운동을 관찰할 수 없습니다. 결국 귀납적 추론, 그러니까 개별적 관찰의 유한한 집합으로부터 일반적 원리를 이끌어내는 일반화를 통해서만 그 판단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납적 추론은 애초에 그 개념부터가 "연역적으로 참이 보증되지 않는 추론"을 뜻합니다. 결국 종합판단은 참을 보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과학적으로 "유의미한" 모든 지식은 종합판단입니다.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과학적 지식의 유의미해지는 것은 오로지 종합판단에서 뿐입니다.
이러한 흄의 논증은 "귀납의 문제"라고 흔히 칭해지는데, 여기서 과학과 논리-형이상학 사이의 심각한 괴리가 드러납니다. 과학은 결국 "가장 그럴듯한 일반화"를 통해 귀납적으로 정당화되는 종합판단들의 집합일 뿐, 절대 그 이상이 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칸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객관성이 박탈된 사실판단에 어떻게든 보편성을 결부시키기 위해 주관의 보편성,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면 주관적 이성의 보편성을 논증합니다. 이 논증은 데카르트에 그 근원을 빚지고 있는 것으로, 그 골자는 인간의 이성은 비록 주관의 영역에 해당되더라도 우리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보편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선험성과 보편성을 매개하는 것은 굉장히 까다로운 논증이며 이 내용이 칸트의 저작 중 순수이성비판에서 심도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 결론만 간단하게 표현하면 우리들 모두가 보편적으로 동일한 이성적 판단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논증을 여기에 다 소개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깊게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 약간 더 어려워지는 것은 칸트가 가치판단에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보편성을 결부시킨다는 것입니다. 결국 다소 해석의 여지는 있지만 (이 부분은 상당부분 저의 칸트 해석에 의존하는 것으로 칸트에 대한 정론을 대변한다고 주장하기에는 제 연구가 부족하여 무리가 있습니다) 칸트는 가치론의 영역도 엄연히 이성의 영역, 즉 합리적으로 다루어져야만 하는 영역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는 실천이성비판에서의 규범적 가치 (도덕)와 판단력비판에서의 미학과 목적론이라는 두 가지 비판서의 맥락에서 이루어집니다. 약간 더 나아가서 말하자면, 칸트에게 있어서는 사실판단이든 가치판단이든 합리적인 이성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가치에 의해 사실이 오염되는 현상은 걱정할 것이 못됩니다. 오히려 사실에 가치가 종속되어 버린다는 고전적 비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하는 고중세철학이 이러한 비판을 받습니다)이 칸트에서도 유효한 것이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가능할 정도이며, 이는 칸트가 그만큼 보수적이고 단단한 윤리적/윤리학적 의식을 가진 학자라는 점을 방증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3. 후설의 근대과학 비판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루어진 칸트의 이러한 연구는 이제 더 이상 쉽게 간과할 수 없게 되어버린 근대과학과 철학의 괴리를 종합적으로 화해시키고자 하는 노력이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사실판단 자체의 존립이 위협받았을 뿐,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이 객관의 지위를 잃고 가치와 함께 주관의 영역으로 전락했다지만 주관 내에서도 여전히 뚜렷한 구분을 가진 채 독립적 영역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사실판단이 가치판단에 의해 위협을 받는 문제는 나타나지 않는 셈입니다). 그러나 후설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구분을 적극적으로 무너트리게 됩니다. 물론 후설은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이라는 프레임이라기보다는 <유럽과학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에서 근대과학 비판이라는 테제로 이 문제를 접근합니다.
후설의 비판에서도 과학이 객관성을 붙잡고 있는 것은 여전히 인정됩니다. 더군다나 후설은 과학이라는 학문의 위기는 과학의 치명적인 오류에서 비롯된 어떤 실패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과학의 어마어마한 성공이 바로 역설적으로 위기를 초래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후설에 따르면 과학의 문제는 객관성을 획득하지 못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성의 이념보다 앞서 우리에게 미리 주어져 있는 세계, 직관적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세계가 보다 근본적인 세계의 존재이며, 그러한 직관적 경험을 통한 세계와의 만남 이후에야 비로소 과학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이념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임을 망각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과학이 엄청나게 성공적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과학이 워낙 세계를 탁월하게 설명해주는데다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보니, 그러한 과학으로 파악된 세계가 세계의 참된 존재라고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후설에게 있어 과학이란 우리가 세계와 만나는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세계의 유일한 개념으로, 즉 세계 그 자체로 여겨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후설이라는 철학자가 원체 난해하기로 유명한데다 논란의 여지도 몹시 많은 부분이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후설은 과학의 성과를 부정하지도, 과학 자체를 부정하지도 않으며, 그럼 과학은 참된 인식이 아니니 과학을 폐기 혹은 전면적으로 수정하고 어떤 대안을 제시해야 할 필요성을 천명하는 시도로 받아들여져서도 안됩니다. 그럼 후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냐? 아주 거칠고 쉽게 말해보자면 과학은 과학이 하는 것만 해야지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거나 과학이 모든 학문적 인식을 포괄하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구체적인 맥락이 있는데, 당시 학계에서는 심리학이 철학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의 분과를 확립하고자 할 때 과학에 기대어 내관주의, 행동주의, 기능주의, 인지주의 등등으로 발전하면서 전통적 철학의 문제를 과학적 문제로 환원시키려는 시도에 대한 후설의 비판의식을 표명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중력과 전자기파의 속성을 연구하듯이 인간의 마음과 의식 역시 과학적 작용 및 프레임으로 전부 해명할 수 있으리라는 (좀 더 나아가서는, 그렇게 과학적으로 해명되어야만 한다 혹은 결국 과학적으로 해명될 수 밖에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팽배했습니다. 후설에게 있어 의식의 문제는 과학 자체의 성립에 선행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과학이라는 것이 애초에 의식의 활동의 산물이자 의식이 작용하는 하나의 방식에 불과한 것으로 분석했기 때문입니다.
이쯤에서 후설이 철학자들의 흔한 공명심이나 자아도취적 우월감에 젖어 과학을 깎아 내리고 축소시키려는 사변철학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오해가 있을까 하는 노파심에 말씀 드리자면, 후설은 사실 철학의 전통에서 훈련된 학자라기보다는 원래 과학자/수학자/논리학자 출신으로 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원래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후설은 대학에서 데카르트를 접하면서 점차 철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스승인 브렌타노의 영향으로 심리학에 있어서도 매우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가 처음 철학에서의 자신의 과제로 삼았던 것 역시 과학과 논리학의 기초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며 (그런 점에서 프레게나 화이트헤드와 같은 영미분석철학과도 놀라울 정도로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 후설계통이 독불철학의 대표주자가 되어 영미분석철학과 현대철학을 양분하는 구도로 둘 사이에 깊은 골짜기가 흐르는 것은 다분히 역설적인 일입니다), 이것이 결국 “학문”이라는 것 자체를 기초 놓는 작업으로 발전하여 그 유명한 현상학이라는 학문적 흐름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참고로 후설이 철학을 하나의 엄밀하게 정립된 과학으로 만들고자 했다는 식으로 표현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여기서의 과학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물리화학적 자연과학과 같은 의미에서의 과학이 아니라 “학문 (Wissenschaft)”의 부정확한 번역어입니다.)
그래서 후설이 말한 과학적으로 파악된 세계보다 우리에게 먼저 주어져 있는 세계, 곧 세계의 “참된 존재”라고 후설이 가리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바로 여기서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경계가 비로소 본격적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독일어로 “세계”는 Welt라고 하는데, 이에 대비해서 Umwelt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용어는 철학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윅스킬이라는 생물학자가 만든 것으로, 흔히 “환경세계”라고 번역됩니다. 윅스킬의 맥락에서 환경세계란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 되는 세계를 가리킵니다. 과학적 세계는 그 자체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개념이니만큼 인간이나 사자나 돌고래나 과학적으로는 정확히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의 환경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얘기가 전혀 달라집니다. 평원에 사는 사자의 환경세계에는 바다라는 존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특정한 꽃의 수액만 먹이로 하는 곤충에게는 자기에게 필요한 그 꽃 외의 다른 꽃들은 다 그게 그거인, 구분이 되지도 않고 구분할 필요도 없는 그냥 배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나 색맹을 생각해봐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인식능력의 문제 – 곤충의 지각능력이나 장님/색맹의 시각적 능력 – 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과 직접적으로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세계가 구성된다는 점입니다. 후설은 이를 생활세계 (Lebenwelt)라는 용어로 개념화시켜 구체적인 삶의 경험을 객관적인 과학적 인식 앞에 놓습니다. 후설은 이를 가리켜 이러한 구체적 생활세계가 소위 “객관적”인 학문들의 논리적 하부구조, 즉 그러한 학문적 이념화가 진행되기 위한 조건이자 토대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심하게 사변적인 논의로 보일 수 있으나 이러한 후설의 분석의 파괴력은 상당합니다. 이제는 가치판단과 삶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는 것으로 모자라, 관점에 따라 어떠한 초월적 가치판단 – 삶과의 구체적 연관성 속에서 비명시적으로 암시되는 그러한 초월적 인식 – 위에서야 비로소 정초될 수 있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후설은 가치판단을 구체적으로 염두에 두지는 않았으나 그 구분을 구조적으로 무너트리는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사실과 가치의 영역구분에 내재되어 있는 철학적 문제를 구체적으로 표면화시키는 기반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이제 하버마스나 푸코라는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보다 직접적으로 수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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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가 너무 길어져서 이 정도에서 한번 끊고 내일 계속 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하버마스의 인식주도적 관심과 푸코의 에피스테메에 대해서 이야기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