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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발전에 헌신한 인간 박정희
게시물ID : humorbest_64577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버터터컵
추천 : 47
조회수 : 3766회
댓글수 : 1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3/03/16 13:59:20
원본글 작성시간 : 2013/03/14 23:48:59



어제 인터넷 검색어와 SNS는 때아닌 '화폐개혁'으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일부 언론에서 박근혜 정부가 화폐개혁을 추진한다는 보도로 시작된 화폐개혁 논란은 기획재정부가 "재정부는 화폐개혁에 대해 전혀 검토한 바 없다"고 보도자료를 배포함으로 우선 일단락되었습니다. 

화폐개혁을 전혀 검토한 적이 없다고 기획재정부는 말하지만, 사실 화폐개혁을 전혀 검토하지 않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파장이 워낙 크기 때문에 기획재정부에서 서둘러 진화에 나선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성공한 대통령으로 박정희가 손꼽힙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는 그가 경제를 발전시켰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사실 그를 경제 대통령으로 부르기에는 일부러 미화시켰던 요소가 너무 많습니다. 그가 경제 정책에서 실패한 사례는 한두 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화폐개혁이라는 화두와 함께 박정희가 왜 '화폐개혁'에 실패했는지 알아봄으로 우리가 화폐개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북한군에게 뺏긴 조선은행권 지폐 원판' 

1905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 과정에서 발생한 화폐개혁을 빼고 한국에서의 화폐개혁은 총 3번에 걸쳐 이루어집니다. 그 중의 한 번은 박정희의 화폐개혁이고 나머지 두 번은 한국전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한 화폐개혁이었습니다.
 

▲1차 화폐개혁으로 구화폐는 무효가 됐다.


한국정부는 조선은행이 아닌 한국은행을 새로 발족함으로 구조선은행권을 폐기하고, 새로운 한국은행권을 발행하려고 했으나 한국전쟁이 발생하면서 서울을 비롯한 남한 지역 대부분이 북한군 수중에 떨어지게 됩니다. 이때 북한군은 당시의 조선은행권 천원권(A기호) 원판과 백원권 (48A 기호)수중에 넣게 됩니다. 천원권과 백원권 원판을 확보한 북한군은 천원권을 대량으로 찍어내서 전국에 유통합니다.

북한군의 통화공작을 차단하기 위해 한국정부는 1950년 8월 28일 자로 '대통령 긴급명령 조선은행권 유통 및 교환에 관한 건'을 공포하고 일차로 영남지방 및 제주도 일대의 조선은행권을 우선 정리합니다. 그 후 10월 25일부터 11월 3일까지 10일간 전국적으로 구화폐를 교환해주고, 이후에는 사용하지 못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합니다. 

 

▲2차 화폐개혁으로 바뀌어진 화폐 단위. 출처:1953년 동아일보


한국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지만, 한국은 전쟁으로 통화남발이 발생하면서 인플레이션율이 엄청나게 높아졌습니다. 한국전쟁 전에 통화량은 560억원이었는데 1952년 말에는 1조원이 넘었으니 얼마나 인플레이션이 높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해 화폐단위를 원에서 환으로 변경하고 100원을 1환으로 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그동안 사용됐던 일본정부 지폐와 주화, 조선은행권, 원표시 한국은행권 등의 유통을 금지합니다. 이처럼 2차 화폐개혁을 통해 11,367억원이 발행됐던 구권을 97%인 11,066억원을 회수하기도 했습니다. 

1차 화폐개혁이 1:1의 화폐 교환이었다면 2차 화폐개혁은 화폐의 명칭변경과 함께 명목절하가 이루어진 '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이었습니다. 

'폭발물로 위장해 들여온 새 화폐' 

5.16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군사정부는 군사쿠데타로 침체된 경제활동 때문에 정권 유지가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재정적자는 물론이고 인플레이션이 점점 위험 수위에 올라가자 박정희 군사정부는 1962년 6월 9일 저녁 밤 10시에 '긴급통화조치'를 실시합니다. 

1) 화폐단위를 환화에서 원화로 바꾸고 10환=1원으로 1/10의 명목절하 
2) 유통화폐의 은행등 금융기관의 환화표시 금전채무의 거래를 금지. 단 국가,지방자치단체,금융기관,주요 관리기업체 등은 원화표시 화폐로 지급
3)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구권과 6월10일 이전에 발행된 수표. 어음 또는 우편환 증서 등은 금융기관에 신고하고, 6월17일까지 신고하지 않은 청구권은 무효

쿠데타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발생한 화폐개혁은 철저히 비밀리에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재무장관 천병규를 비롯한 5명의 화폐개혁 준비반은 업무에 들어가기 전에 "기밀 누설시 총살형도 감수한다"는 선서를 했을 정도입니다. 

화폐개혁에 사용할 돈은 영국 드라뤼 회사에서 제조됐는데, 영국제 새 화폐는 화폐개혁이 있기 44일 전 부산항에 도착, 폭발물로 보안 처리된 상태에서 보관되기도 했습니다. 


▲ 은행 앞에서 화폐를 교환하기 위해 밤새 줄 서 있는 시민들.


 전혀 예상치 못한 박정희 군사정부의 화폐개혁은 사회에 큰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생활비에 한해 6월17일까지 10대1의 비율에 따라서 가구당 한 사람에게 5백원 한도로 새은행권을 바꿔준다고 했지만, 9일밤 저녁 10시에 발표된 화폐개혁은 10일이 일요일이라는 점을 노려 통제를 됐지만, 사회적 불안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특히 이날은 통금 시간까지 앞당겨져서 귀가하는 시민들이 택시를 잡으려고 해도, 택시 기사가 구권은 이제 소용없다면서 승차거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포목상과 쌀집은 늦은 밤에도 현금을 들고 와 치마 저고릿감을 사거나 쌀을 사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토요일 밤에 발표된 화폐개혁으로 귀가하는 시민들은 버스와 택시로부터 승차거부를 당하기도 했다.


화폐개혁이 단행된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돈이 없는 서민들은 술에 취해 '알게 뭐냐'고 외치기도 했으며, 지방에 있는 가족에게 화폐개혁을 알리고 빨리 신고하라는 전화를 하는 사람이 많아 전화 교환양은 '눈코 뜰 사이가 없다'고 비명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군사정부가 급작스럽게 시작한 화폐개혁은 대한민국의 경제는 물론이고 사회적 불안과 혼란을 일으키면서 그냥 밀고 나가면 할 수 있다는 군사문화의 전형적인 정책과정을 보여줬습니다.

' 지하 자금으로 군사정부를 살리려 했던 박정희의 화폐개혁' 

박정희 군사정부는 쿠데타 이후 누적된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하루빨리 자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화폐개혁'을 통해 부정축재자와 화교의 현금을 확보하겠다는 단순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시 군인들로 구성된 혁명위원회는 부정축재자들은 검은돈을 몰래 숨겨 놨을 것이고, 화교는 은행을 이용하지 않고 있어 현금을 다발로 집에다 모아 놨을 것이라고 봤습니다. 

하지만 막상 화폐개혁이 시행되자 이런 자금은 별로 회수되지 않았습니다. 



긴급통화조치의 결과로 1962년 6월 17일까지 예입된 총액은 1,873억환인데, 이중에서 1,582억환은 환화이고 나머지 291억환은 수표 등의 지급수단이었습니다. 6월 9일 당시 우리나라의 화폐발행액은 1,653억환이었으므로 71억원만이 회수되지 않았습니다. 신고액을 보면, 100만환 이하 금액이 90.5%를 차지하였고 1억환을 초과하는 경우는 불과 7건 12억에 불과하였다. 

즉 박정희는 화폐개혁만 하면 이런 지하 자금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화폐개혁'을 실시했지만, 박정희의 예상과 달리 여유자금을 현금으로 거액 보관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오히려 금과 같은 현물을 보유한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박정희의 화폐개혁은 1961년 최고회의 재경위원이었던 유원식이 박정희에게 제안하여 시작됐는데, 모든 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심지어 한국은행 총재와 최고회의 재경분과위원장이었던 김동하조차 몰랐습니다. 

▲10환을 1원으로 화폐개혁을 했던 1962년 6월10일자 경향신문. 한국은행 앞에 총을 든 군인 사진이 보인다.


미국은 박정희의 '무계획'적이고 비전문가적인 '화폐개혁'에 불같이 화를 냈고, 화폐개혁을 실행하기 위해 봉쇄한 예금계정을 빨리 풀지 않으면 아예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협박을 했습니다. 화폐개혁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단순한 생각은 경제 혼란과 함께 산업계의 자금이 묶이는 사태가 발생해 오히려 경제 침체만 더 가중됐습니다.

혁명정부 예산의 반을 미국 원조자금에 의존하고 있었던 박정희 군사정부는 미국정부의 압력에 굴복해 예금봉쇄를 해제함으로, 처음 계획했던 퇴장자금을 끌어내 군사정부의 재정적자를 막겠다는 박정희식 '화폐개혁'은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화폐개혁을 주도했던 유원식,천병규 등은 1963년 증권파동 사건으로 구속된다. 출처:경향신문


박정희 '화폐개혁'이 실패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군사정권이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시행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1962년 군사정권을 영구히 하기 위해 증권파동으로 불법자금을 마련했던 군인들 머리에는 법보다는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위험한 생각만 존재했었습니다. 

결국, 미국의 경제 지배하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군사정부는 미국이 제시한 경제정책에 따라 겨우 경제를 회복했고, 박정희는 미국의 도움으로 성공한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는 이상한 현상이 한국사회에 미화된 것입니다. 

'화폐개혁'을 무조건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별로 설득력은 없습니다. 경제가 변화되고 시대가 변화되면 '화폐개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과 철저한 계획으로 '화폐개혁'을 준비해야지, 그렇지 못할 경우는 아예 않으니만 못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박정희식 '한강의 기적'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경제 정책의 성공 배경은 미국이었고, 실패는 박정희 자신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 박정희가 왜 실패했고, 그가 미국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박근혜 대통령이 깨닫는다면 좋겠지만, 실패는 본받고, 미국의 경제 지배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녀 또한 군사문화처럼 독재로 흐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대통령이 어설픈 지식과 실력으로 큰일을 벌이면 국민이 고통을 받는다는 아버지의 실패를 명심하고, 박근혜 정부 5년을 이끌었으면 좋겠습니다. 


http://impeter.tistory.com/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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