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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의 신격화에 대한 재미있는 글 그리고 의견
게시물ID : history_646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푸쉬킨
추천 : 12
조회수 : 3721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2/11/24 21:30:31

관우가 돈벌이 재물신이 된 까닭은?

 

유비가 후덕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위선자같이 되어버렸고, 제갈량이 지모가 많다고 그린다는 것이 요괴에 가깝게 되어버렸다. 오직 관우에 대해서는 특히 뛰어난 표현이 많아, 그의 의리와 용맹이 때때로 눈으로 보는 듯하다.”

최고의 중국문학 통사라는 평가를 받는 ‘중국소설사’(소명출판)에서 루쉰은 유비는 온후함이 지나쳐 위선자가 되고, 공명의 지혜는 마치 요술사처럼 여겨지는 반면 관우만이 용감한 장수로 훌륭하게 묘사되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청나라의 장학성이 “나관중의 삼국지는 칠실삼허(七實三虛)”라고 했던바, 관우 또한 픽션이 많이 가미된 인물이다.

교토대 김문경 인문과학연구소 교수는 ‘삼국지의 영광-베스트소설 천년의 역사’(사계절)에서 관우의 칠실삼허를 이렇게 지적한다. 먼저 청룡도와 적토마는 관우와 관계없고,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을 베다, 문추를 베다, 오관(五關)에서 여섯 장군을 베다, 채양을 베다, 화용도에서 조조를 풀어주다, 초선을 베다, 죽은 뒤 옥천산에서 성(聖)을 드러내다 등 수많은 명장면들이 모두 픽션이다. 또 주창은 실재하지 않았고 아들 관평은 양자가 아니라 친자식이었다는 것.

고향 산서성 해주 소금장수들이 신격화 전국 유통

이렇게 하나씩 베일을 벗겨가면 280년 진수가 완성한 ‘정사 삼국지’(민음사)의 관점대로 관우는 오만함 때문에 자멸한 ‘결점 있는 인간’일 뿐이다. 그런데도 관우는 중국에서 한족(漢族)의 시조신인 황제(黃帝)와 더불어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18세기 말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보리)에서 “천하 어디를 가나 관제묘가 있네. 궁핍한 변방과 몇 가구뿐인 작은 마을에도 아름다운 관제묘가 세워져 있네”라고 기록했듯, 그가 신이 된 것은 그 역사도 깊다. 지금도 중국의 많은 도교사원에는 관우상이 모셔져 있다. 일반인의 집에서도 관우 부적은 돈벌이 재물신이다. 찻집 등 상점 앞의 관제상에는 ‘날마다 돈 벌게 해주소서(天天發財)’라고 적힌 문구와 더불어 관운장의 손에 인민폐가 들려 있다. 관우 화상을 살 때는 절대 ‘산다(買)’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청해서 모셔온다(請)’고 말할 정도로 숭배한다. 그러나 관우가 생전에 돈벌이에 능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일 것이다.

중국에서 황제의 묘엔 능(陵), 성인 무덤엔 림(林)자를 붙이는데 공자의 무덤을 공림, 관우의 무덤은 관림이라고 한다. 무수한 중국역사 인물들 중에 공자와 관우만이 성인으로 추존받고 있는 것이다. 형인 유비나 귀신을 부렸다는 제갈공명도 신이 되지 못했는데 왜 관우만 관왕(關王)이 되고, 나아가 관제(關帝)가 되어 공자와 어깨를 겨누며 신으로 숭배받는 것일까.

물론 소설 ‘삼국지’대로 관우의 혼령이 ‘내 머리를 돌려달라’며 옥천산에 나타났기 때문에 관우를 원한 맺힌 혼령으로 믿고 제사 지냈을 수도 있다. 또한 조조가 관우의 꿈에 시달리다 죽고, 관우를 공격했던 오나라 장군 여몽도 이후 병사했다는 소설 내용도 민간인들의 기복 신앙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아니면 나관중이 관우와 같은 산서 사람이기 때문에 지나친시(關係) 의식을 발휘한 것일까.

교토대 김 교수는 ‘삼국지의 영광’에서 관우가 신이 된 것은 그의 생애나 성격과는 관계없을 성싶고 그가 태어난 고향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관우의 고향은 산서성 해주(海州)다. 해주는 중국 최대의 염호(鹽湖·소금호수)로 유명하다. 영어 봉급(salary)의 어원이 소금(salt)이고 고대 로마에서 군인의 월급을 소금으로 지급했던 데서 알 수 있듯, 자고로 소금은 생활필수품이었다. 때문에 동양에서는 염전을 얻는 자가 천하를 지배한다고 했다.

사실 중국의 중원은 바로 이 해주의 소금을 소비하며 융성했다. 진시황제도 먼저 해주를 제압하며 천하통일 전쟁을 시작했다. 한나라 때 소금은 국가의 전매품이 되었다. 국가 보호 아래 해주 사람들은 소금을 전매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고 전국의 상권을 장악했다. 더구나 산서지방은 예부터 유목민족과 대치하는 군사 요충지였던 까닭에 막대한 군사비는 주로 소금장수들 몫이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듯 정부에 의한 소금 전매는 민간의 소금 밀매를 낳기도 했다. 당나라 말기의 황소, 원나라 말기의 장사성 등 반란군 대장들은 모두 소금 밀매 상인이었다. 대만을 세운 장개석도 소금장수 아들이었고 해주 소금장수들이 그의 경제적 후원자였다.

중국인들은 특히 향토애가 강하다. 그래서 산서 소금장수들도 장사를 떠나면서 행선지마다 관우신상(神像)을 짊어지고 다녔다고 한다. 이로부터 관우를 군사의 신이자 상업신, 비밀결사의 수호신으로 떠받는 관우 신격화 현상이 전국으로 퍼진다. 지금도 화교가 동남아시아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뿌리를 내릴 때는 관제묘가 세워진다.

원래 중국에서는 궁중에서 군신(軍神)을 제사하는 습관이 있었다. 첫 번째 신이 바로 화하족의 신황제와 싸워 패한 동이족의 전쟁신 치우인데, 한나라 고조 유방은 천하통일을 하고 먼저 치우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당나라 때 군신의 자리를 주나라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친 태공망 강자아가 차지한다. 송나라 때는 궁중에서 여전히 강태공을 제사 지냈지만 민간에서는 관우의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 시점에 관우가 산서성 해지에서 치우를 무찔렀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원나라 때는 치우와 강태공을 앞질러 촉한정통론의 촉나라 장수 관우가 전국적 군신의 자리에 오른다. 이민족의 나라인 원나라 치하에서 정통 한족 출신 장수를 군신으로 대접해 몽골족의 원나라에 정신적으로나마 저항한 것이다. 명나라의 영락제는 자신의 쿠데타가 성공한 것은 관우가 도왔기 때문이라며 관우에게 제(帝)라는 시호까지 붙였다.

그래서 김운회 동양대 경영관광학부 교수는 ‘삼국지 다시 읽기’(삼인)에서 관우가 충의의 화신으로 재탄생해 신격화된 데는 송나라의 주자와 명나라 촉한공정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얼굴 빨갛다는 전설 때문에 집단운동의 상징으로

한편 관우는 고향에서 탐관오리를 죽이고 도망자 신세로 쫓기다 강물로 얼굴을 씻을 때 물속 관음보살의 도움으로 얼굴이 빨갛게 되어 추격자의 눈을 속이고 관(關)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때 이름을 관이라고 속였으며 원래 성은 관씨가 아니라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인은 빨간색을 성실, 재물복, 충성심으로 생각한다. 교토대 김 교수는 관우의 얼굴이 빨갛다는 전설이 바로 관우를 체제 측과 반체제 측 모두에서 신으로 모시는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실제 원나라 말기의 홍건적에서 중국 공산당 홍군에 이르기까지 관우는 하나의 집단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또 만주족의 청나라 타도를 목적으로 생겨난 비밀결사에서도 관우를 수호신으로 숭배했고, 청나라 정부도 한족을 달래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관우를 궁중에서 제사 지냈다. 정부는 충성을 다한 관우를 정부홍보용으로, 서민은 보잘것없는 유비를 끝까지 섬긴 관우에게서 대리만족을 느끼며 신격화한 것이다.

그런데 ‘삼국지’는 언제부터 우리나라에서 유행했을까. 임진왜란 이후라는 게 정설이다. 당시 원병으로 온 명나라 군인 태반이 관우를 신으로 모시고 있어 조선에도 관우사당이 세워졌는데, 현재 서울의 동묘(東廟)가 유명하고 서울 장충동에 있는 관우사당에는 관우부인의 초상도 있다. 남산 기슭에 있는 와룡묘(臥龍廟)는 제갈공명과 함께 관우의 신상을 모시는데, 단군묘나 삼성각처럼 우리나라 재래신앙과 관련된 사당도 나란히 있다. 우리나라 무속신앙에는 소열황제 유비, 와룡선생 제갈공명, 관우의 사부 옥천대사, 오호대장, 감부인, 미부인도 등장한다. 원래 샤머니즘은 민족의 무의식을 반영한다. 최영·임경업 장군 등이 신격화된 것은 그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서민들의 대리욕망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삼국지 인물들을 이렇게 신으로 숭배하고 있는 것일까. 소중화주의일까.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도서출판 일빛 편집장

 

 

 

관우가 왜 숭배를 받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나름 재미있는 분석을 한 글입니다.

 

요약을 하자면 중국인들의 특유의 문화의 영향인데

 

고향을 중시하고 대가족을 형성해 살아가는 중국인들의 생활은

 

산서성 해주출신의 영웅 관우에 대한 이 지역출신들의 사랑으로 발전하였고  

 

송나라때 상업의 융성과 함께 이런 산서성 해주출신 소금상인들이

 

자신들의 고향 영웅을 수호신으로 삼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퍼졌다는 것이죠

 

 

더불어 관우의 일화가 보여주는 대표적 영웅담

 

즉 신의를 위하여 가장 큰 세력인 조조의 부귀영화를 마다하며

 

의리와 신의를 위해 유비에게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구두계약으로 상업을 하던 당시 상인들이 중요시한 

 

신뢰의 상징으로 충분한 이유기도 했습니다.

 

 실제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관우의 오관육참의 전설이

 

부곽되고 꾸며지게 된 것도 바로 이런 관우의 의리와 신뢰라는 상징을

 

사람들이 특히 기억하고 덧붙이다 보니 발생한 이야기겠죠.

 

관우에 대한 신앙은 송나라 때 어쩌면

 

아직은 민간 상인들을 통해서만 유행하던 것에 머물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송나라의 문화도 함께 조명해 보았음 하네요

 

중세의 문학의 발전에서 조명해 보면

 

송대의 문학은 당나라때의 정형시 중심의 시문학을  넘어

 

이른바 詞 문학이 형성되고 발전하던 시기입니다

 

詞 역시 시의 일종이지만 가사형식의 문학으로

 

곡조와 함께 자유롭게 이야기를 담은 형태였고

 

이런 문학의 확장은 원나라에 이르면 소설의 유행으로 발전하죠

 

관우의 신앙은 상인들을 통해 중국 전역에 확장 되었고

 

운문의 곡조를 넘어 스토리 문학으로 발전하던 문학사조의 흐름과 함께

 

관우의 미담은 민간에 더욱 널리퍼지며 살을 덧붙이고

 

민간의 숭배대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민을 근본으로 한 중앙의 관료층 역시 이런 흐름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되지요

 

송나라 휘종때 처음으로 관우에 대해 충의후라는 작위를 수여합니다

 

군신의 반열은 아니지만 국가적으로 이미 그 중요성을 인식했다는 것이겠죠.

 

 

이는 유교국가였던 송나라 사대부들이 유교의 충의를 논하며

 

국정을 운영하던 정치적 이상과도 부합하는 것이기에 관우의 대한 중시는

 

민간이 아닌 사대부 관료계층으로 확장된 것도 사실 이때가 아닌가 합니다

 

대표적으로 관우가 춘추좌전을 한손에 쥐고 있다는 것은

 

그가 단순한 무인만이 아닌 공자의 말씀과 유교의 충의사상을 몸소 실천한

 

군자의 표상이란 뜻도 함축한 것이기 때문이죠.

 

참고로 관우의 청룡도 역시 삼국시대엔 존재하지 않았던 병장기이고 

 

송나라 시대 사용한 병장기입니다.

 

이런 이미지의 구축은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으로 도망가며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중원의 본거지를 잃고 변방으로 쫓겨난 남송에서 성리학의 성립과 함께

 

중화정통론이 이른바 체계화 되고 동시에 촉한정통론이라는 관점도 생겨납니다

 

성리학적 관점에서 정통성을 중시하고 비록 힘에서 밀렸지만

 

남송이 중화의 정통성을 가진 국가라 합리화하였던 이들은  

 

자신들과 같은 처지로 중원에서 밀려나 촉나라에 자리를 잡았던

 

촉한이 한을 계승한 정통국가라는 관점도 생겨난 것이죠

 

중원을 잃고 강남에 자리잡은 남송이나

 

중원을 잃고 사천에 자리잡은 촉한이나 비슷한 처지로 서로 동정하는게

 

사실 이심전심이고 촉한정통론을 주장함으로 동시에 남송의 정통성도 확립되는 것이죠

 

이 과정에서 관우에 대한 숭배는 그가 가진 충의와 신뢰라는 유교적 가치관을 넘어

 

촉한을 대표한 구국의 무장이라는 영웅적 모습으로 완성된게 아닌가 합니다.

 

 

원이 등장하고 남송은 망했지만

 

관우는 차별받던 남인들 (남송 유민)들의

 

정신세계를 지탱하는 하나의 신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겠죠.

 

이런 민간의 문화는 이어 등장한 강담문학과 소설문학의 성행과 함께

 

나관중의 유명한 소설 삼국지연의를 통해 구체화 되어

 

지금에 전해지게 됩니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관우는 재물신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건 더불어 조폭들도 관우를 극히 중시하며 섬기는데

 

이는 관우의 무용담과 그 군사적 재능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가 가진 충의와 신뢰의 상징을 섬기는 것이죠

 

신뢰는 상인의 가장 큰 자산이며 조직문화를 지탱하는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90년 유행한 홍콩 영화를 보며 느와르에 나오는 인물들이

 

따거~~ 이러면서 의리를 말하는게 꼭 삼국지 유관장의 의형제를 보는듯 느껴지는게

 

다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도 관우신을 섬기며 서울의 지하철 동묘역이 바로

 

관우를 섬기는 동묘를 말합니다

 

지금도 동묘가 있고 무속신앙에서도 관우를 신으로 여전히 섬기죠

 

위의 글처럼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에 오면서 퍼졌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관우신에 대한 숭배는 좀 다른 경우가 아닌가 합니다

 

무속신앙에서 신으로 섬기는 대상은 이른바 기가 쎈 인물을 말합니다

 

이는 살아생전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을 수도 있고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었을 수도 있으며

 

한을 품고 죽어간 애뜻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 사연 만큼 강한 기를 가졌기에 귀신이 되고 신으로 무속의 신으로 자리를 잡는거죠

 

 

임진왜란때 명나라 장수들이 군신으로 삼아 섬기던 관우를 보며

 

재조지은의 상국이자 국왕도 재상도 고개를 숙이는 명나라 장수들이

 

섬기며 숭배하는 관우를 보는 관점이란게 이런게 아니었을까요

 

국왕은 물론 그 무서운 명나라 장수들도 누르는 진정 기가 쎈 관우신

 

더불어 유교500년의 조선왕조에서 너무도 친숙한 이념

 

충의를 대표하는 군신이란 관우는  무속인들이 신으로 섬길만 한 이유가

 

충분한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멀리 볼거 없이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을 구원한

 

재조지은의 은혜를 베불었던 미국에 대하여

 

한때 한국인들 생각한 멕아더에 대한 경외심하며

 

미국인들이 존경하는 링컨, 루즈벨트, 케네디에 대해

 

학교서도 가르치고 위인전으로 배우고

 

존경하는 해외위인이 누구냐하면 종종언급되는

 

한국의 독특한 문화풍토를 보면

(아이들에게 위인전을 가르치며 성인들 조차 존경하는 인물이 누군지 묻는

재미있는 문화풍토말이죠.)

 

하물며 이것이 국가를 운영하는 근본 이념이었던

 

조선시대라는 점을 생각하면 크게 이해 못할 바도 아니겠죠

 

그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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