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문경미] '서울대 프락치 사건' 담당했던 전 관악경찰서 김영복 수사과장
"군사정권이 자신을 '폭력사건'으로 엮었다는 유시민씨의 주장은 100% 옳다." '서울대 프락치사건(일명 서울대 린치사건)'의 수사 책임자가 <오마이뉴스>를 통해 최초로 입을 열었다.
지난 84년 9월 당시 관악경찰서 수사과장으로 근무한 김영복(70)씨는 5일 오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서울대 프락치사건은 군사정권이 학생회 조직 결성을 기선제압하기 위해 폭력사건으로 엮어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에 따르면, 사건 당시 유시민(47) 보건복지부장관 내정자가 피해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관여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수사책임자였던 김씨의 직접적인 증언이 나옴에 따라 7일로 예정된 인사청문회에서의 공방은 더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은 이날 인사청문회를 통해 유 내정자의 '폭력전과'를 크게 부각시키겠다며 칼날을 벼르는 중이다.
5일 증언에 나선 김씨는 '서울대 프락치사건' 수사를 현장에서 지휘·감독한 사람이다. 또 유씨의 구속영장 청구서류를 직접 검찰에 전달하기도 했다. 이보다 앞선 70년대 말 80년대 초반, 그는 두 차례나 관악경찰서 기동중대장으로 근무하면서 학생데모를 진압하는 입장에 있었다. 따지고 보면 서울대 운동권 학생들을 그보다 잘 아는 경찰관도 없는 셈이다.
당시 상황을 비교적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그는 이날 인터뷰에서 ▲피해자인 전기동(당시 만 29세)씨 등 4명이 애초 고소장조차 접수하지 않으려 했고 ▲유씨 구속 직전 허문도 문화공보부 차관이 주관하는 대책회의가 열렸으며 ▲구속영장이 발부되기도 전에 서울시경이 유씨의 구속 사실을 발표했다는 등의 중요한 비화를 털어놨다.
"앰블런스 부른 사람이 유시민... 유씨 얼굴 모르는 피해자도 있었다"
우선 그는 유 내정자가 '가짜 대학생'으로 잡힌 임신현(당시 만 25세), 손현구(당시 만 19세), 정용범(당시 만2 5세), 전기동씨의 폭행 과정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임신현씨의 경우 서울대복학생협의회 술자리에서 수상한 점이 발견돼 후배들이 당시 복학생협의회 집행위원장인 유씨에게 말했지만, 유씨는 단지 '학생과에 알아보면 되지 않겠냐'는 말만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유씨가 학교로 와 보니 이미 폭행사건이 벌어져 있었다.
손현구씨는 유시민씨가 백태웅 당시 학도호국단장을 대신해 2시간 동안 면담 조사한 사실은 있지만, 폭행을 가한 게 아니라 단순하게 얘기만 나눈 것으로 밝혀졌다.
4명 중 가장 심하게 폭행당한 전기동씨의 경우에도 유씨는 폭행사건 뒤 사실을 알았고 엠블런스를 불러 전씨를 병원으로 보내는 등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경찰이 수사에 착수하게 된 것도 "전기동씨를 병원에 보내기 위해 엠블런스를 불렀기 때문"이라고 말한 김씨는 "피해자 중에는 유씨의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고 말했다.
뒤늦게 사실을 파악한 경찰은 당시 서울시경 제2부국장이던 안아무개 경무관을 책임자로 해 수사에 착수했다. 김씨는 이 때 상부(시경)로부터 "폭력사건으로 엮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전했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고소장조차 접수하지 않아 처벌이 어려웠다고 김씨는 회고했다.
"형사들을 시켜 피해자들을 찾았지만, 처음에는 피해자가 모두 고소장 접수를 꺼린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너희들이 직접 쓰든지, 대서소를 가든지 알아서 하라'고 다그친 기억이 있다. 그렇게 가까스로 고소장을 받았다. 폭력사건으로 엮으려면 고소장이 있어야 세게 처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찰이 수사에 착수하자 백태웅·이정우·윤호중 등 당시 서울대 핵심간부들은 모두 잠적했다. 하지만 유씨는 수습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학교와 경찰, 피해자들을 만나러 다녔다고 김씨는 전했다. 이 때문에 유씨가 혼자 구속됐다.
"당시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 관악서 정보형사가 유씨를 만나고 있었는데, 안 경무관(서울시경 제2부국장)이 그 이야기를 듣고는 '그렇다면 유시민으로 엮자'고 말했다. 그래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관악서 정보분실에 슬리퍼 차림으로 나온 유씨를 그대로 유치장에 가뒀다."
"상부에서 '폭력사건 엮으라, 유시민으로 엮자' 지시"
유씨의 신병을 확보한 공안당국은 범죄사실 조사결과와
"책임질 부분이 있다면 책임지겠다"고 진술한 유씨의 조서를 근거로 구속영장 신청서류를 작성했다. 이 과정에서 공안당국은 사전에 대책회의를 갖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유씨의 구속영장이 발부되기 하루 전인 10월 3일 허문도 (당시) 문공부 차관 주관 하에 안기부, 치안본부 등 관계기관이 참가하는 대책회의가 열렸다. 대책회의 결과 4일 낮 관악경찰서장이 수사결과를 발표하기로 했는데, 뒤에 서울시경 국장이 발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발표문도 경찰이 작성한 게 아니라 '전문가'라 불리는 문공부 직원 2∼3명이 작성했다."
경찰 발표 당시 김씨는 안 경무관의 지시로 구속영장 청구서류를 갖고 서울 남부지청에서 대기하도록 돼 있었다.
"안 경무관은 나에게 관련 서류를 갖고 남부지청에 가 있도록 했다. 그리고 전화를 걸어 지시가 내려지면, 곧바로 구속영장을 신청하라고 했다."
10월 4일 낮 12시, 서울시경은 서울대학생들에 의한 민간인 폭행사건이 발생했다는 수사결과와 함께 유씨의 구속 사실도 발표했다. 하지만 유씨의 구속영장이 발부된 시간은 그보다 훨씬 뒤였다. 공안당국이 법원의 영장발부 사실도 없이 자의적으로 '구속'을 발표한 셈이다.
"당시 남부지청 제1부장검사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부장검사가 지청장의 호출을 받고 불려갔다 오더니 '가져온 서류를 좀 보자'고 했다. 그래서 유씨 구속영장 신청서류를 줬더니 그 자리에서 자신이 결재하고, 지청장 결재까지 맡아 담당검사에게 넘겨주면서 곧바로 영장을 받아오라고 했다. 그 뒤 부장검사는 나에게 크게 화를 냈다. 어떻게 검사가 범죄사실 요지도 읽어보지 못하고 구속영장을 청구하느냐면서…."
김씨에 따르면 당시 검찰조차 구속영장 청구 과정에 문제가 있었음을 시인했던 셈이 된다. 그 뒤 유씨는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항소해 2심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돼 복역했다.
"서울대생들 '물고문'도 있었다... 피해자들 어떤 보상받았나"
김씨는 당시 군사정권이 유씨를 무리하게 '폭력사범'으로 엮었다는 점을 인정했지만, 폭력행위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당시 학생들이 4명의 피해자에 대해 심한 폭행을 가한 것은 사실이다. 마치 왜정 때 순사들이 하던 것처럼…. 몽둥이로 악랄하게 했다. 심지어 학생들은 피해자들의 손발을 묶고 주전자로 물고문을 하기도 했다. 서울대 학생들이 그 때 매우 흥분한 상태였고, 유씨조차 그런 상황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김씨는 유씨가 폭행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유씨가 '항소이유서'에서 밝혔듯이,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집행위원장으로서 책임은 있지만 폭행을 지시하거나 가담한 사실은 없다. '항소이유서'에서 유씨가 말한 내용이 100% 맞는 말이다. 일부 언론에서 유시민이 폭력을 행사했다고 보도하거나, 마치 유시민이 '폭력배의 거두'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모두 헛소리다."
그는 뒤늦게 당시 사건을 고백하고 나선 이유를 "양심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라고 밝혔다.
"경찰 생활 20여년을 하면서 마음에 걸리는 두 가지 사건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사건이다. 유씨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된 다음날, TV와 신문에 이 사건이 대서특필되는 것을 보고 '내가 너무 지나쳤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사회적으로 확대될 줄은 결코 몰랐다. 다음날 유씨가 유치장 간수를 통해 글을 보내와 '단식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도 못할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여년이 지난 현재, 김씨는 당시 사건이 당연히 '민주화운동'의 일부로 인정돼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피해자들의 명예와 피해 회복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뒤늦게 당시 사실을 밝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유씨가 이 사건을 민주화운동의 일부라고 말하는 것도 맞는 말이다. 학생들이 '가짜대학생'을 이유없이 때렸겠나. 당시 상황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학생들에게 맞은 민간인 4명도 피해자들이다. 대학생들에게 잡혀 심한 폭행을 당했다는 주장도 다 맞다. 그 때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은 국회의원도 되고, 변호사, 교수도 됐지만, 피해자들은 어떤 보상을 받았나. 지금이라도 과거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서로 용서를 빌고, 화해한 뒤 미래를 향해 나가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이다."
< 글 - 김영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