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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인 이야기...
게시물ID : humordata_64838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ㅁㄴㅇㄹΩ
추천 : 0
조회수 : 74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0/09/11 12:25:47
감동 [甘同]

요약

조선 세종 때 검한성(檢漢城) 유귀수의 딸이자 평양현감을 지낸 최중기의 아내로서 39명과 간통한 창기(娼妓). 그 정부 가운데 각계의 지도층 인사들이 골고루 포함되어 있었다.

국적  한국

본문

음탕한 행동으로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감동은 스스로 창기라 부르면서 수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감동의 이러한 애정행각은 결국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이같은 사실은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조정이 떠들썩했던 이유는 그녀가 관계한 남자의 수가 39명이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관계한 남자들의 지위 때문이었다. 그녀가 관계한 사람들 중에는 사헌부 지평 및 공조판서를 비롯해 공신 자제, 수령 등 각계의 지도층 인사들이 골고루 포함되어 있었다. 감동은 남편의 매부와도 간통할 정도였다.

감동의 지도층 인사와의 간통은 사건처리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감동은 사대부의 부녀자였기 때문에, 사대부 부녀자와 간통한 지도층 인사들이 법적으로 사형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도층 인사들은 극형을 받지 않고 장형 또는 파직 형벌을 받는 데 그쳤다. 지도층 인사들이 이러한 처벌을 받은 것은 감동이 음녀이기 때문에 간통한 남자들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판결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극형을 받지 않은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이 시대가 성적 문제를 강력하게 억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가 다소 느슨한 성적 규제 사회였다는 사실은 감동의 처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간통녀 감동에 대해서도 일벌백계 차원에서 사형이 논의되었으나, 규정된 법률에 따라 장형을 부과한 뒤 변방의 관비로 영속시키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성종 때 어우동이 감동과 유사한 죄를 지었는데도 사형된 것은 이 시대가 세종 때보다 성적 규제가 심했기 때문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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