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미지의 대상만이 광기로 표현될 수 있다. 대상이 인지되어 이해되었다는 것은 곧 의미의 지평 내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더이상 광기로 치부될 수 없는 것이다. 의미의 지평 내로 들어왔으나 도무지 설명할 도리가 없는 것이 바로 아포리아를 구성한다. 이 아포리아는 의미의 지평 내에서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은 부분, 즉 블라인드 스팟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집단이성의 종합적 발전이 이 부분을 명쾌하게 규명해낼 때 그 안개가 걷히고, 의미의 지평은 확장을 이루며, 동시에 이성의 완결성이 진보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성의 포섭과 설명의 기제, 혹은 역사적 맥락에서는 "계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아주 재미있는 난점을 제시한다. 미지의 대상이 이성적 해명의 대상이 되는 계몽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광기가 이해로 흡수될 때, 이 포섭의 과정은 대상과 이성 양쪽 모두에게 핵심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보통 근대적 이성의 권위와 계몽의 부정적 측면을 조명할 때에는 이를 대상의 관점에서 접근하는데, 이를 짧게 말하자면 대상이 본디 그 자체로 가지고 있던 고유한 비동일성을 이성이 휘두르는 동일성의 원리에 의해 거세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무 뜻도 없이 피어난 꽃 한 송이는 그 자체로 고유한 자신 하나로 그저 존재하는 것이지만, "장미"라고 명명당하고 각종 과학적 분석을 거치게 되면 이는 식생의 분류에 속하는 개체이자 유기체 덩어리로 파악되어 버리며, 심지어 그 달콤한 향기마저도 화학 분자로 환원되기에 이른다. 여기서의 분석의 도구, 이를테면 화학적 구조나 유기물, 식생의 분류 같은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이며, 우리는 미지의 대상 - 장미 - 를 기지의 도구으로 재단하여 동일화시키는 작업을 거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우리가 눈 앞의 장미를 이성적으로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은 틀림없지만, 장미로서는 그 자체의 고유한 비동일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인간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나 감흥 같은 것은 우리에게는 그 자체로 즉자적이고 즉각적인 것으로 고유한 것이지만, 이것이 이성적 분석을 거치며 우리의 유전적 형질이나 생리학적 특성, 혹은 사회적 배경이나 정서구조 등으로 파악되게 되면 그러한 것은 더이상 고유한 것이 아니라 그저 보편적인 일반개념에 속하는 한 개별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대상의 측면에서 바라본 계몽적 이성의 횡포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이면인 이성의 측면에서도 독특한 현상은 분명히 일어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이성적 포섭의 과정이 종합적 발전을 통해 이성의 완결성을 진보시킨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발짝 물러서서 이 이성의 완결성이라는 것을 좀 더 거시적으로 조명해 볼 수 있다. 위에서는 이성이 비동일성을 동일성에 의해 포섭시키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비동일적 측면을 배제시키게 되며, 이를 "거세"라고까지 강력하게 비판적으로 조명하였다. 여기서 거세된 비동일적 개별성이란, 일차적으로는 장미를 저렇게 분석시킨다해도 모든 장미들은 다 한 송이 한 송이가 제각각 분명히 "다른" 것이라는 점에서 나타나는 것인데, 이는 꽃의 모양이나 줄기의 길이가 약간씩 다른 정도에 지나지 않으므로 사실 그다지 이성의 완결성을 위협하지 않는다.
문제는 예외적인 상황을 포섭하려고 할 때에 나타난다. 이를테면 모든 장미가 빨간색이라고 이성이 파악했다가 분명히 다른 모든 것이 장미의 분석과 일치하나 단지 색깔만 노란 색인 경우가 발견되면, 직전단계의 이성은 더이상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들을 서로 전혀 다른 꽃이라고 규정해버리면서 간단하게 문제를 회피할 수도 있겠지만, 동시다발적/통시적 유사성의 관찰을 통한 귀납적 추론 위에 세워진 과학적 탐구의 정신에 비추어볼 때 이는 만족스러운 설명일 수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이런 장미들이 서로 교배가 가능하다면, 그 유전학적 기반에 비추어서라도 이들을 서로 전혀 다른 꽃이라고는 말할 수 없게 된다.
이 때에 이성은 이러한 비동일적인 경험을 동일성으로 포섭시키기 위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수정한다. 즉 이성 내에서 생겨난 분열을 해소하기 위해 선별적으로 자신을 수정하는 것이다. 저 둘이 서로 다른 종이라고 말하려면 유전학 이론의 일부를 포기해야만 하며, 저 둘이 서로 같은 종이라고 말하려면 장미의 개념의 일부를 포기해야만 한다. 여기서 이성은, 경험이 제시하는 비동일성을 포섭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동일성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성의 원리가 이성의 핵심적 기반을 이룬다는 전제에 비춰볼 때, 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는 결국 이성이 휘두르는 동일성이 애초에 순수한 동일성일 수 없음을 뜻하며, 여기서의 순수함이란 순수이성, 즉 경험과 섞이지 않은 이성을 가리킨다. 결국 이성 스스로가 비이성적 기반 위에 서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는 이성이 순수한 동일성이 아닌,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변증법 속에 동일성을 향해가는 것이라고 볼 때, 헤겔적 관념론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이성은 단순히 포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만족스러운 새로운 이론/개념을 도출시키는 것을 요청하게 된다. 이는 대부분의 실질적인 경우에 있어, 단순히 한 명의 과학자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기보다는 수많은 과학자들의 집단 이성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여기서 도출된 새로운 만족스러운 설명으로 기존의 실패한 설명을 대체하게 되는 것 앞서 말한 집단이성의 종합적 발전이라고 볼 수 있는데, 문제는 이 "만족스러움"의 기준이다. 어떠한 설명이 만족스러운가의 기준으로 앞서 경험을 제시한 바 있는데, 분명히 단지 경험만은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다. 아직 포기되지 않은, 혹은 포기하기로 선택하지 않은 다른 이성적 동일성 역시 기준이 된다. 그러나 이것을 더해도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여기서 가장 재미있는 난점은, 이성이 어떠한 기준으로 자신의 동일성의 일부를 포기하기로 결정하느냐 하는 점이다. 이 기준이 이성 자체일 수는 없다. 저울이 스스로의 오차를 점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것을 선험이라고 하면서, 선험이야말로 이성적 동일성의 진정한 근간이라고 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선험적인 판단이라면 그 판단 자체는 절대적이어야 하는데, 그 판단이 절대적이지 않음은 이미 역사적으로 수없이 실증되어왔다. 이 판단의 기원, 즉 정당성을 질문하는 것은 결국 과학철학의 근간으로 회귀하는 문제이다.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접근해보면 이러한 측면들이 왜 난점인지가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분석하기 전에는 제우스 신의 분노였던 것이 이제는 번개구름의 전하로 인해 유도되는 방전현상으로 이해되듯이, 한 때 우리가 광기라고 여기고 배제시켰던 것이 이제는 이해의 지평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는 마치 한 때는 사탄의 자식들이라 부르며 맞서 싸우던 오랑캐들과 이제는 한 나라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야하는 형국과도 같은 것이다. 이는 이성의 관점이 아니라 사회적 / 정서적 관점에서 비추어볼 때, 우리가 "대립"된다고 여기는 그 어떤 것도 진정한 대립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우리가 야만이며 광기라고 부르며 배척하고 대립했던 모든 것들이 어느새 멀쩡히 옷을 차려입고 우리들 사이에 섞여있게 되는 것이며, 우리는 이를 늘상 경험해오고 있을뿐만 아니라, 또 앞으로도 우리가 이성에 의존하는 한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얄궃은 것은, 우리가 미지의 대상을 광기로 배제시킬 때 사용하는 잣대가 곧 그들을 우리 안으로 포섭시키는 잣대와 서로 다른 것이 아닌 하나라는 점이다. 그 잣대가 바로 이성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