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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관계를 돌아본다] ⑤ 해방자인가 침략자인가-38선 분단과
게시물ID : history_1209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우사연
추천 : 1
조회수 : 490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10/15 14:18:15

얄타회담과 포츠담회담


1945년 초 독일의 패망이 눈앞에 다가오자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총리, 소련의 스탈린 원수는 1945년 2월 4일부터 2월 11일까지 소련 측 연안에 있는 크림반도 지역 얄타에서 회담을 개최했다. 얄타회담에서는 독일에 대한 처리 문제뿐만 아니라 극동문제와 관련한 비밀의정서까지 채택되었다. 의정서의 내용은 “소련은 독일 항복 후 '2, 3개월 이내에' 대일전(對日戰)에 참전해야 하며 그 대가로 연합국은 소련에 1904~05년 러일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반환하고 또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얄타회담에서는 한반도 관련한 논의도 있었는데, 2월8일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한국을 다자의 공동주관 하에 둘 생각이 있고 그 기한이 40년까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루즈벨트는 추후 “5년 이상의 기간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고 스탈린은 “더 짧을수록 좋다”고 대답했다고 알려졌다.1)


루즈벨트가 소련을 대일전쟁에 끌어들이려 한 것은 소련을 이용하여 일본군을 상대하기 위한 측면이 강했다. 미국은 소련군과 관동군 모두의 국력을 소모시켜 지금의 적과 미래의 적의 국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다. 이런 경향은 루즈벨트가 죽은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미국은 1945년 초 이오지마 전투,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발목을 잡혔다. 미국은 일본 본토 상륙작전을 앞두고 소모적인 전투를 치르면서 국력을 소모하는 것에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다 당시에는 100만으로 알려진 관동군도 건재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미국에게 부담을 더 안겨주는 소식까지 있었다. 1945년 2월부터 일본은 소련과 접촉하여 불가침 연장과 연합국과의 중재를 요청했는데, 이러한 사실이 미국 측에 알려졌다.2) 미국은 만약 일본과 소련의 불가침협약이 연장된다면 미군이 일본군을 전담하게 되어 많은 인적, 물적 희생 및 국력 손실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우려를 가졌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미국은 포츠담 회담에서도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종용하고 참전에 대한 확답을 받으려 했다.


1945년 7월에 열린 포츠담 회담에서 연합국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내용의 선언을 발표했다. 선언에서 연합국은 "일본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에 직면하게 될 것을 경고했고, 그 내용은 모두 13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회담 도중에 한반도 문제와 관련하여 포츠담선언 8항에서는 ‘카이로선언의 모든 조항은 이행돼야 하며’라고 규정해 적절한 과정을 거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1943년 카이로 선언의 내용이 재확인 되었다. 한반도 점령과 신탁통치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과 소련 사이에는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어떤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핵무기 개발과 미국의 한반도 구상


미국은 한반도를 대륙진출의 교두보로 판단하고 한반도를 장악하려 했고, 소련이 미국의 구상에 걸림돌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미국은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소련의 한반도 진출을 우려했고 소련의 한반도 영향력 배제를 추구해왔다. 미국에서 핵무기가 만들어지고 실험을 통해 그 위력이 확인되면서 미국의 한반도 장악 의도가 좀 더 확연하게 드러났다. 미국은 핵무기를 일본과 한반도를 독점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으로 판단했다. 미국은 소련이 참전하기 전 핵무기를 이용하려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다. 소련이 참전할 경우 얄타회담에서 약속한 것을 이행해야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핵무기 사용을 준비하는 한편, 소련의 참전을 지연시키기 위해 소련에게 “한반도 공격은 규슈상륙작전 이후에나 그 가능성을 결정할 문제”라고 연막작전을 쓰기도 했다.3)


미국은 소련이 참전하더라도 일본 관동군이 막강하다고 알려져 있었으므로 소련군이 만주와 한반도를 바로 접수할 수 없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만약 소련군의 진출이 저지되고 일본의 관동군의 발도 묶인다면 미국의 입장에서는 일본 본토 공격이 훨씬 수월해질 수 있었다. 실제 미국은 일본 본토 공격 계획까지 구상하고 있었으며 본토 공격 계획에서도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까지 상정해두고 있었다.


미국은 궁극적으로 한반도 전체 장악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나, 한반도 전체장악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신탁통치에 따른 분할점령에 대비하여 분할점령안도 기획했다. 미 합동참모본부 산하 합동전쟁기획위원회 작전국장 헐과 전략정책단장 린컨은 1945년 7월 25일경 번스 미 국무장관의 지시아래 미-소 간 작전분계선의 명목으로 38선 근처에 이른바 “헐선”을 획정하고 포츠담 회담에서 소련과 논의했다.4) 


미국의 의도는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 일본과 한반도를 단독점령 하겠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의치 않을 경우 한반도를 소련과 분할점령 할 수 있다는 예비계획을 세웠다. 이런 방침은 1945년 7월 말 사실상 확정되었다.


분할점령 기획 그리고 38선


미국은 소련의 대일 전쟁 참전 시기를 빨라도 8월 15일에나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8월 6일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투하했다.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번스는 1960년 8얼 15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대통령과 나)는 소련의 대일전 참전 전에 전쟁이 끝나기를 원하고 있었다.”라고 시인했으며 “소련을 유럽에서 잘 다루려고”핵무기를 보유, 과시했다고 증언했다.5) 그러나 독일과의 전쟁이 끝나고 정확히 3개월 후인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8월 9일 0시를 기해 만주 지역으로 들어옴으로써 소련 참전 전에 일본의 항복을 받아 일본과 한반도를 장악하려했던 미국의 의도는 파탄 나고 말았다. 게다가 예상과는 달리 막강하다고 알려졌던 일본의 관동군은 소련군에게 대패했고 소련군은 급속도로 만주 지역을 장악했다. 더불어 소련은 만주와 백두산 지역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독립운동세력과 함께 한반도에 진격했다. 이들은 8월 9일, 함경북도 웅기지역에 상륙했으며 8월 13일에는 청진까지 진격했다. 반면 미국은 한반도에서 960km나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었다. 이대로 가면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차지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한편 일본은 패배가 불가피하다는 걸 오래전에 깨닫고 있었지만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고 있었다. 일부 관료들과 장교들은 핵폭격을 당한 후에도 “옥쇄”를 결의하자며 이런 입장을 지속했다.6) 그런데 소련군 참전 후 첫 교전에서 관동군이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소련이 급속도로 만주를 석권해 나가자 결국 일본 정부는 1945년 8월 10일 “천황의 국가통치의 대권에 변경을 가하는 요구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이해 하에”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제의를 하였다. 미국의 번즈 국무장관은 다음날인 8월 11일, 연합국을 대표한 답변에서 “최종적으로 일본국 정부의 형태는 포츠담선언에 준하여 일본국 국민의 자유로 표명하는 의사에 의하여 결정할 수 있는 것으로 한다.”7)로 답하여 일본의 요구를 사실상 수용했다. 역사학자 김기협은 번즈의 대답을 “천황제를 꼭 폐지한다는 말도, 꼭 존속시킨다는 말도 아니다. 상당한 점령 기간이 지나 투표에 부친다면 일본인의 투표라 하더라도 점령국의 의지에 좌우될 여지가 크다. 요컨대 일본인들 하는 것 봐서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라고 평했다.8) 


미국의 답변이후 3일 동안 일본과 미국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패전국인 일본의 요구를 사실상 수용했던 미국의 어떤 “특수한” 요구를 들어주는 반대급부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다. 특히 미국에게는 이미 한반도 깊숙이 들어온 소련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항복시점을 최대한 당기는 것이 매우 절실했으므로 항복시점과 관련한 내용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일본군은 한반도에서 미군에게는 순순히 항복을 했으나 소련군과는 끝까지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미국은 일본과 항복협상을 하는 동시에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8월 11일, 포츠담 회담 즈음에 기획했던 데로 서울을 확보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북위 38선을 기준으로 이북은 소련군이 이남은 미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는다는 내용의 <일반명령 1호>를 소련에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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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38선을 획정한 인물로 언급되는 사람이 전략정책단 실무자였던 본스틸, 러스크 대령인데, 이렇게 중요한 일을 대령 두 명이 결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략정책단의 단장인 린컨이 분할문제를 계속 담당해 왔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38선 획정을 실무적으로 기안한 인물은 린컨이며, 이를 도운 인사가 본스틸 대령이고, 부임한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은 러스크 대령은 본스틸 과장을 보좌한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신빙성이 있다. 린컨은 그의 상관이었던 헐과 함께 7월 25일 경 “헐선”을 확정한 인물이다. 38선은 7월 25일을 전후하여 “헐선”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고안되었고 8월 10일에서 11일 사이에 확정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실무자급이 아니라 상부의 책임자를 더 추적해 들어가면 “국무장관 번스 → 국무차관보 던 → 전쟁차관보 맥클로이 → 린컨”의 계선 상에서 분할 결정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9) 


38선 이남의 점령과 군정의 도입


미국은 한반도를 점령하여 소련이 한반도에 진출하는 것을 저지하고 한반도를 사회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방파제로 삼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10) 소련에 의한 사회주의권 확산을 저지한다는 미국의 구상은 한반도에 38도선을 긋고 그 이남을 점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은 경제적인 목적보다는 사회주의의 확산을 저지한다는 정치적, 군사적 목적이 두드러졌다. 미국은 정치, 군사적 목적을 위해 점령한 지역에서 체제의 안정과 질서유지를 추구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체제의 안정과 질서유지란 한국을 경제적으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체제에 편입시키고 정치적으로 한국에 친미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은 거세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한반도에 대해 많은 연구를 진행했다. 미 전략정보국(OSS)은 1945년 2월 28일 ‘한국의 공업중심지에 관한 지도’, ‘한국의 도로와 철도에 관한 지도’, ‘한국의 식량생산에 관한 지도’를 작성했고 3월 3일에는 ‘한국의 행정구역에 관한 지도’ 등을 작성해 두고 있었다. 미 합동정보연구처는 1945년 4월 ‘한국의 인구집중에 관한 지도’, ‘한국인의 일본어 해독능력에 관한 지도’, ‘일본인이 만 명 이상 거주하고 있는 한국 도시에 관한 지도’ 등을 작성하여 한국에 대한 파악을 해 둔 상황이었다.11)


또한 한국인의 성향에 대한 조사도 진행했다. 미국이 1945년 6월에 작성한 정책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의 민족해방 운동에 대해 “일제하의 착취와 억압 하에서 한국인의 혁명의식은 고양되어 있었고 이들의 저항운동은 그 당시 타 점령지에서의 그것과 비교할 때 상당히 잘 조직화되어 있었다”고 평가했다.12) 혁명의식이 고양되어 있는 한국의 상황을 고려할 때, 신탁통치를 통해 한반도를 관리한다는 기존의 정책으로는 소련을 저지하고 친미국가를 세운다는 미국의 정책 의도를 실현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 분석을 바탕으로 미국은 한반도에 자신의 교두보를 굳건히 다지고 한국의 혁명적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강력한 군정을 실시하였다. 이는 한반도 전체에 대한 신탁통치 대신 남한 만이라도 친미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의도가 담긴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일제가 조선을 통치하던 방식 및 제도를 유지하여 점령정책의 기초로 삼았다.


맥아더 포고령


1945년 9월 2일 맥아더의 이름으로 일본군의 항복을 규정한 일반명령 1호가 발표되었다. 일반명령 1호를 근거로 하여 한반도는 북위 38도를 경계로 이북은 소련군이, 이남은 미군이 들어오게 되었다. 38도선을 단순히 군사적 목적을 가진 선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일본군 무장해제라는 군사적인 목적만 따진다면 한반도에서 960km나 떨어져 있는 미군을 기다릴 필요 없이 이미 한반도에 진주해 있는 소련이 일본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그러므로 미국이 38도선을 그은 것은 군사적인 목적 뿐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 즉 소련의 확장을 막겠다는 의도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국은 일반명령 1호에서부터 식민지 민족해방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1945년 9월 2일 맥아더의 이름으로 발표된 일반명령 1호에는 “전기 각 지휘관만이 항복을 수락할 권한이 부여된 연합국대표자로서 일본국군대의 항복은 전부 이 지휘관 또는 그 대표자만에 대하여 할 것”이라고 하여 일본이 피식민지 세력에게 항복하는 것을 금지했다.


일반명령 1호 일부

b. 만주 북위 38도 이북의 조선, 화태 급 천도제도에 있는 일본국의 선임지휘관과 모든 육상, 해상, 항공 급 보조부대는 소비에트 극동군최고사령관에 항복할 것
e. 일본국과 일본국 본토에 인접한 제소국,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류구제도 급 필리핀제도에 있는 일본국의 선임지휘관과 모든 육상, 해상, 항공 급 보조부대는 합중국 태평양육군부대최고사령관에 항복할 것13)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 15일 패망을 눈앞에 두고 여운형 선생과 담판을 통해 일본인의 안전을 보장 받으려 했다. 여운형 선생은 일본의 엔또 정무총감을 만난 자리에서 ① 전국적으로 정치범과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② 3개월간의 식량을 보장할 것, ③ 치안유지와 건국운동을 위한 모든 정치운동에 대해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④ 학생과 청년을 훈련, 조직하는 일에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⑤ 노동자와 농민을 우리 건국사업에 동원, 조직하는 데에 간섭하지 말 것 등 5가지의 조건을 붙여 일본인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는 조선총독부 요청을 받아들였다.14) 조선총독부는 일본인에 대한 치안을 부탁하였으나 여운형 선생이 제시한 5가지 조건을 보면 치안권을 넘어 사실상 행정권을 이양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여운형 선생은 바로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이와 인민위원회도 전국 각지에서 결성되었다.


그러나 8월 16일 오후, 조선총독부에 38선 이남은 미군이 점령한다는 일반명령 1호의 내용이 미리 전달되자 총독부는 여운형에게 이양한 행정권 이양을 취소한다고 발표하고, 건준 폐쇄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인계하였던 신문사와 학교 등을 다시 접수했다. 심지어 일본군 3000명으로 구성된 ‘특별경찰대’까지 편성하기도 했다. 조선총독부는 9월 9일까지 실질적인 통치기구로 부활했으며, 미군이 진주한 이후에도 10월 초까지 미군정의 보조기능을 수행했다.15) 총독부의 태도 변화는 바로 일반명령 1호에서 피식민지 세력에게 항복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은 일반명령 1호에 따라 1945년 9월 8일, 인천항을 통해 38도선 이남에 진주했다. 진주 하루 전인 9월 7일 태평양 미 육군 최고지위관 더글라스 맥아더는 미 육군 총사령부 포고 제 1호를 발표하면서 38도선 이남을 점령한다고 선포했다.


- 태평양방면 미군 육군부대 총사령부 포고 제1호 -
조선인민에게 고함
 
태평양방면 미군 육군부대 총사령관으로서 나는 이에 다음과 같이 포고함.

일본국 정부의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은 우 제국(諸國) 군대간에 오랫동안 속행되어온 무력 조인한 항복 문서 내용에 의하야 나의 지휘하에 잇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영토를 점령한다.

조선 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리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하고 조선인민은 점령목적이 항복문서를 이행하고 자기들의 인간적 종교적 권리를 보호함에 있다는 것을 새로이 확신하여야 한다.

태평양방면 미군 육군부대 총사령관인 나에게 부여된 권한에 의하야 나는 이에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과 조선 주민에 대하야 군사적 관리를 하고저 다음과 같은 점령 조건을 발표한다.
 
제1조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통치의 전권한은 나의 권한하에서 실시한다.
 
제2조 정부의 전 공공(公共) 및 명예직원과 사용인 및 공공복지와 공공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기관의 유급 혹은 무급 직원 및 사용 중인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기타의 모든 사람은 새로운 명령이 있을때까지 그의 정당한 기능과 의무를 실행하고 모든 기록과 재산을 보존 보호하여야 한다.  
 
제3조 모든 사람은 급속히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권한하에 발한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부대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혹은 공공안녕을 문란케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는 엄중한 처벌이 있을 것이다.
 
제4조 제군(諸君)의 재산소유권리는 존중하겠다. 제군은 내가 명령할 때까지 제군의 적당한 직업에 종사하라.
 
제5조 군사적 관리를 하는 동안에는 모든 목적을 위하여서 영어가 공식언어이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혹은 일본어 원문 간에 해석 혹은 정의에 관하야 어떤 애매한 점이 있거나 부동(不同)한 점이 있을 때에는 영어 원문이 적용된다.  
 
제6조 새로운 포고, 포고규정 공고 지령 및 법령은 나 혹은 나의 권한하에서 발출될 것으로 제군에 대하야 요구하는 바를 지정할 것이다.

-1945년 9월 9일 태평양방면 미군 육군부대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미군은 이 포고령을 통해 북위 38도 이남의 한반도 지역을 점령지역으로 규정함과 동시에 미군정이 남한 내에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기관이라고 선포했다.


미군정은 포고령 2조를 통해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관리와 친일파 한국인 관리들을 그대로 유임시키고 식민지 통치기구도 온존시켰다. 또한 4조를 통해 재산권을 보장함으로써 친일파 및 일본인의 재산을 보장해 주었다. 미군정은 과거 일본 총독부의 지위와 체계를 그대로 인수하였다. 미국이 친일파의 지위를 보장함으로써 식민청산에 어려움이 나서게 되었다. 


미 점령군은 군사점령자로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규정했다. 점령군은 ⓵ 통치권의 담당자로서 남한의 유일한 정부로 자처했고 ⓶ 미 본국의 대리자로서 군사점령자의 권한을 행사했다. ⓷ 남한의 자치정부의 일반기능을 담당하고 ⓸ 귀속 재산의 소유자 및 관리자로 자처했다.16) 이런 미군정의 태도는 한국 민중이 자주적으로 만들어온 자치 기구인 건준 및 인민위원회,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인민공화국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도 부정하는 것이었다.


점령군으로 들어오다


9월 8일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군은 완전무장을 하고 마치 상륙작전을 하듯 인천에 상륙했으며, 미리 일본 군경을 동원하여 한국인들에게 일체 외출을 금지하게 했다. 그러나 많은 시민들이 미군을 해방자로 인식하고 반가운 마음에 미군을 환영하고자 거리로 나왔다. 결국 경비구역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권병권과 이석구 등 2명이 일본 경찰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고 10여명의 사람들이 부상을 입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장례식이 끝난 뒤 유족들은 인천시민들을 향해 발포한 일본경찰을 미군정에 고소했지만 군사재판에서 미군은 '일본 경찰이 폴리스 라인을 넘은 인천시민들에 총격을 가한 것은 정당했다'고 판정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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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9월 9일, 서울 중앙청에서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올라갔다는 사실은 미국이 한반도에 점령군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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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 이전 미국이 한반도를 대상으로 실시한 철저한 조사와 미국의 한반도 신탁통치 구상, 그리고 이어진 점령은 미국이 한반도에 지속적으로 전략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개입하고자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륙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로서, 소련의 사회주의 확산을 저지하는 방패로서, 한반도가 가지는 지정학적 중요성은 일본과 필리핀이 대신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한반도를 중국이나 소련에게 넘겨줄 수 없었으며 소련에게 대일 참전을 요구했으면서도 핵무기를 이용하여 전쟁을 조기 종료시키고 일본과 한반도를 단독 점령할 것을 꾀했다. 미국은 소련의 만주와 한반도 진격 속도에 놀라 38선을 그어 한반도 남쪽을 점령, 최소한의 교두보를 마련하려 했다.



[1. 한겨레, 2010년 4월 11일, 「<길을찾아서> “다자공동 신탁통치” 루즈벨트는 타계하고 / 김자동」]

[2. 1945년 2월부터 일본은 조기 화평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당시까지는 일본과 전쟁을 하지 않던 소련에 중재를 요청한다. 일본의 암호를 해독한 미국은 일본과 소련의 화평을 막기 위해 소련의 참전을 요구했다. 이완범, 위의 책, 93~100p]

[3. 미국은 소련에게 한반도를 “소련이 얼마간 독점할 수 있는 지역”이라는 인식을 심어줘 소련에게 여유를 주려고 했다. 결국 한반도를 소련의 제 1 작전지역에서 제외시켜 시간을 벌려고 한 것이다. 위 발언은 7월 24일 미국의 마샬 육군참모총장이 소련의 안토노프 장군의 “소련의 한반도 공격에 호응해 달라”는 요청에 대답한 말이다. 이완범, 위의 책, 121p~128p]

[4. 이완범, 위의 책, 4p]

[5. 이완범, 위의 책, 160p]

[6. 일본은 오키나와가 점령당하자 제주도를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한 대미 결전의 최후 보루로 삼고 관동군을 비롯한 일본 정예군을 제주도에 이동 배치하는 소위 결 7호 작전이라고 불리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오마이뉴스, 2008. 04. 20 「일본 본토방어 '결7호 작전'을 아십니까?」, 전은옥]

[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1945년 8월 16일자 매일신보]

[8. 프레시안, 2010.08.10. 「미국과 일본의 뒷거래 대상은…731부대?」 김기협]

[9. 이완범, 앞의 책 190~201p]

[10. 이혜숙, 『미군정기 지배구조와 한국사회』, 선인, 2008년, 65p]

[11. 이완범, 앞의 책 217~243p]

[12. 한국의 해방과 함께 소작농민들은 틀림없이 전면적인 농지개혁을 요구할 것이며…… 한국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은 한국의 전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는 데 좋은 조건이 될 것이다. 한국인들은 보통 소련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후원을 받는 한국 내 사회주의 정권의 정책과 활동은 대중의 지지를 쉽게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FRUS, Vol. V, 1945: 561~563) 이혜숙, 위의 책 64~65p에서 재인용]

[1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자료 대한민국사 제1권, 「일반명령1호로 연합군진주지역 분담 결정」]

[14. 이규태,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과 통일국가의 모색」 한국근현대사연구 2006년 봄호 제 36집, 9p]

[15. 김영태, 「친일세력 미청산의 배경과 원인」, 한국학 논총 31집, 496~497p]

[16. E. Frankel,「주한미군정의 구조」, 梶村秀樹 外(김동춘 편역), 『한국 현대사 연구Ⅰ』, 이성과 현실사 99쪽.  안진, 『미군정과 한국의 민주주의』, 한울아카데미, 2005년, 66p에서 재인용]

[17. 노컷뉴스, 2013년 3월 5일, 「주한미군이 '특별한 이유'… 그리고 잊혀진 사실들」]


http://urisociety.kr/?p=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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